5화
‹ ›몸속으로 흘러든 그 뜨거운 무언가는 마치 혈관을 타고 도는 뜨거운 국물 같았다.
국밥 한 그릇 먹은 것처럼 속이 확 데워지는 느낌.
비유가 이렇게 초라해서 미안하지만, 정말 그런 느낌이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순댓국에 소주 한 잔 걸친 다음 느껴지는 그 알딸딸함까지 포함해야 할 것 같았다.
지금 이 상황에 술 얘기가 나오다니, 내가 미쳐가는 게 확실했다.
근데 진짜 그랬다. 위장부터 시작해서 손끝, 발끝까지 뜨끈한 게 훅 번지는 느낌.
죽다 살아난 몸뚱이가 지금 뭘 원하는지 정직하게 반응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존재는 여전히 내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알 수 없는 언어를 계속 중얼거렸다.
SAL-A-NAM-A-RA...
JEONG-SU-REUL...
발음이 뭐랄까, 외국인이 한국어 배운 지 3일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근데 그 서툰 발음에서 이상하게 진심이 느껴졌다.
사기꾼도 이렇게까지 열심히는 안 할 것 같은데.
정수라는 단어는 알아들었다.
방금까지 내가 목숨 걸고 모으려던 그 정수.
뭔가 연관이 있는 건가.
설마 이 존재가 지금까지 내가 흡수한 정수들의 관리자였던 건 아닐까.
아니면 정수 채굴권을 두고 은빛늑대랑 나 사이에서 중개업이라도 하려는 건가.
쓸데없는 생각이 자꾸 튀어나오는 건 아마 뇌가 현실을 부정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욥기 33:4,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지금 나를 살리는 게 하나님인지 이 정체불명의 존재인지 헷갈렸지만, 어쨌든 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살아있으면 나중에 신학적 논쟁이든 뭐든 할 시간이 생기는 거니까.
지금은 죽지 않는 게 최우선 과제였다.
갑자기 은빛늑대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지되어 있던 시간이 풀린 것이다.
놈의 발톱이 아까 멈췄던 그 궤적을 그대로 이어서 내려오려 했다.
시간이 멈췄다가 다시 흐르는 그 감각이 얼마나 이상한지, 겪어본 사람만 알 거다.
마치 유튜브 영상을 일시정지했다가 다시 재생 버튼 누른 것 같은, 그런 뚝뚝 끊기는 느낌.
근데 그 정지 버튼을 누른 게 누군지도 모르겠고, 다시 재생시킨 게 누군지도 모르겠다는 게 문제였다.
숨이 턱 막혔다.
존재가 손을 얹은 채로 나를 지켜줄 수 있을지, 아니면 그냥 여기서 함께 죽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같이 죽는다면 최소한 외롭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다가, 아니 이게 지금 위로가 되는 생각인가 싶어서 스스로에게 어이없어졌다.
그 순간, 존재의 눈동자가 강렬하게 빛났다.
그리고 그 빛이 내 몸 전체를 감싸며 퍼져나갔다.
촤르르르륵!
은빛늑대의 발톱이 나를 덮치려던 순간,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튕겨나갔다.
놈이 놀란 듯 뒤로 물러서며 낮게 그르렁거렸다.
으르르릉...
놈의 눈빛에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경계심이 담겨 있었다.
뭐지, 방금까지 나를 씹어먹을 듯 굴던 놈이 왜 갑자기 저렇게 조심스러워지지.
마치 배달 갔다가 갑자기 진돗개한테 안 물리고 살아 돌아온 배달원 표정이랄까.
저 늑대도 지금 자기가 뭘 놓쳤는지 파악하려는 눈치였다.
놈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나며 나와 존재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 시선이 마치 계산하는 듯했다.
저게 뭔지, 먹어도 되는 건지, 아니면 건드리면 손해 보는 건지 재는 눈빛.
동물의 직감이라는 게 저런 거구나 싶었다.
존재가 나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엔 조금 더 명확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Tae-eul... gyeyak..."
계약. 그 단어는 확실히 알아들었다.
등록처 서류에 사인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도 사인 한 번으로 인생이 뒤바뀌었는데, 이번엔 또 뭘 사인하라는 건지.
설마 이번에도 3년 약정에 위약금 조항 붙어있는 거 아니야?
통신사도 아니고 웬 정체불명 존재가 계약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순간부터 심장이 벌렁거렸다.
"저기, 뭘 계약한다는 건데요?"
존재는 내 물음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것처럼.
그 표정이 어찌나 순수하던지, 마치 외국인 관광객이 한국말로 열심히 길을 물었는데 상대가 못 알아듣는다는 걸 그제야 깨닫는 순간 같았다.
아니 그럼 진작 알았어야지, 지금까지 혼자 열심히 중얼거린 게 다 뭐였던 거야.
그리고는 손끝으로 내 이마를 살짝 짚었다.
닿는 순간, 뭔가 정보가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말씀이 계약이 되어 나에게 임하니]
성경 구절인지 뭔지도 모를 문장이 머릿속을 스쳤다가, 그 밑으로 시스템 메시지 같은 문구가 떠올랐다.
[정신체 '태을'과의 계약이 시작됩니다.]
[계약자: 강준서]
[계약 대상: 태을 — 오랜 시간 허공을 떠돌던 정신체]
뭐지, 이게 뭔 게임 창이야.
죽다 살아난 마당에 시스템 메시지가 뜨는 게 말이 되나.
하지만 눈앞에 선명하게 떠 있는 저 문구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글씨체까지 나름 고딕체로 깔끔한 게, 무슨 대기업에서 만든 앱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폰트 디자인에 신경 쓸 여유가 있는 나 자신이 신기했다.
[계약 성립 시 별빛목걸이가 계약자와 완전히 융합됩니다.]
[계약 해지는 불가능합니다.]
해지 불가능이라는 문구를 보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거 완전 임대차 계약서 특약사항 같은 소리잖아.
'해지 불가, 위약금 무한대' 같은 조항이 붙어있을 것 같았다.
전세 사기당한 친구가 계약서 꼼꼼히 안 봤다가 인생 망했다는 얘기를 술자리에서 몇 번이나 들었는데, 지금 내가 딱 그 짝이 될 판이었다.
"저, 잠깐만요. 이거 계약서 조항 좀 더 자세히 봐도 될까요?"
존재는 내 말을 이해했는지 못 했는지, 그저 온화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어쩐지 사기꾼 상담사의 웃음처럼 느껴져서 더 불안했다.
"고객님, 이 조건이 지금 딱 남아있는 마지막 특가입니다"라고 말할 것 같은 그런 웃음.
근데 저 존재는 상담사가 아니라 정체불명의 정신체였고, 특가라고 해봤자 내 목숨값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은빛늑대가 다시 자세를 낮추며 도약할 준비를 하는 게 보였다.
놈은 아직 완전히 물러난 게 아니었다.
아까의 경계심은 잠시였을 뿐, 놈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사냥감을 향한 집요함이 남아있었다.
근육이 팽창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저건 진짜로 다시 뛰어들겠다는 신호였다.
선택의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계약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 존재의 보호가 사라질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다시 저 발톱 앞에 무방비 상태로 놓이게 될 터였다.
계약서 세부조항 따질 시간에 내 목이 날아갈 판이었다.
[전도서 9:12, 사람은 자기의 시기도 알지 못하나니]
지금이 바로 그 알 수 없는 시기라는 거겠지.
선택을 미룰 시간이 없었다.
인생이라는 게 늘 이런 식이었다. 중요한 결정은 항상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코앞에 칼을 들이대며 다그친다.
"계약할게요."
입에서 그 말이 튀어나왔다.
생각보다 먼저 말이 나갔다는 게, 나 자신도 놀라울 정도였다.
마치 급전이 필요할 때 이자율도 안 보고 대출 앱 승인 버튼 누르는 심정이랄까.
후회는 나중에 하고 일단 살아야 했다.
존재의 눈이 커졌다.
마치 예상하지 못한 대답을 들은 것처럼.
그리고는 천천히, 아주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코끝이 살짝 찡해졌다.
오랜 세월 홀로 허공을 떠돌았을 존재가, 이제야 누군가와 연결됐다는 안도감 같은 게 느껴졌다.
얼마나 오래 혼자였을까. 사람 손 한 번 잡아본 적 없이 그냥 허공을 떠돌기만 했다면, 그건 나름 서글픈 이야기였다.
농담이다.
지금 그런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다. 코앞에 늑대가 있는데.
감성팔이는 목숨 부지하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았다.
존재의 손끝에서 다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이 내 온몸을 휘감으며, 별빛목걸이가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촤르르르륵! 촤르르르륵!
목걸이의 은빛 사슬이 살아있는 것처럼 요동쳤다.
마치 목에 걸린 사슬이 자기 의지를 가진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내 피부를 파고드는 것 같았다.
아프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진동이 온몸으로 퍼지면서 뭔가가 재구성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은빛늑대가 다시 도약했다.
[계약이 성립되었습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순간, 내 몸에서 뭔가 폭발적인 힘이 터져 나오는 게 느껴졌다.
이게 뭐지.
방금까지 손목이 부러진 채 죽어가던 놈이 이렇게 힘이 넘치는 게 말이 되나.
헬스장 3개월 다니고도 안 늘던 근력이 지금 몇 초 만에 폭발적으로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이런 게 진짜 있다면 헬스 유튜버들이 다 굶어 죽었어야 정상인데.
하지만 그런 의문을 곱씹을 시간도 없었다.
은빛늑대의 발톱이, 이번엔 정말로 마지막이라는 듯 나를 향해 정확히 날아들고 있었으니까.
놈의 눈동자에 서린 살기는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짙었다. 이번엔 진짜다, 라는 확신이 들 만큼.
그리고 그 순간, 내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마치 내가 아닌 누군가가 조종하는 것처럼.
손끝이, 발끝이, 심지어 숨을 쉬는 방식까지도 전부 낯설었다.
이게 계약의 대가인지, 아니면 뭔가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건지, 그 답은 아직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