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청람 귀족 학원의 아침은 늘 비슷했다.
마차가 줄줄이 정문 앞에 늘어서고, 시종들이 가방을 받아 들고, 학생들은 저마다의 가문 문양을 옷깃에 붙인 채 인사를 나눈다.
누구네 집 마차가 몇 마리 말로 끄는지, 누구 시종의 제복이 어느 재단사 작품인지, 그런 걸로 은근한 서열이 매겨지는 곳이었다.
나는 그 풍경 속에서 딱히 눈에 띄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서연. 백작가의 외동딸. 재상의 아들 강도현의 약혼녀.
딱 그 정도로만 나를 아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게 딱 좋았다.'
눈에 띄면 피곤해진다. 이 학원은 조용히 있는 사람에게는 관대하고, 튀는 사람에게는 잔인할 정도로 촉수를 뻗는다. 나는 그 촉수에 걸리고 싶지 않았다.
조용히 살고 싶었다. 정략으로 묶인 약혼이지만 도현은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고, 학원 생활도 무난했다.
수업 듣고, 밥 먹고, 가끔 도현이랑 도서관 구석에서 시시껄렁한 얘기 좀 하고. 그게 전부였다.
무난하다는 게 얼마나 값진 건지, 그날 이후로 뼈저리게 알게 됐지만.
그날, 전학생이 왔다.
강당에 전교생이 모였다. 새 학기도 아닌데 전학생 때문에 이렇게 모인 건 처음이었다.
'그 정도로 화제란 얘기지.'
"청하 남작령의 영애, 한소라입니다."
강당 단상 위에서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목소리는 가늘고, 손끝은 미세하게 떨렸다.
전형적인 '가여운 신입생' 그림이었다.
'평민 출신이 남작가에 양녀로 들어갔다더니, 저 사람인가.'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귀족 학원에 평민 출신이 들어오는 건 드문 일이었다. 그것도 몰락한 남작가의 양녀라니, 화젯거리가 될 만했다.
"쟤가 그 애야?"
"청하 남작가 자체가 요즘 빚더미라던데, 저런 애 데려다가 뭐 하려는 거지."
"모르지, 그쪽 사정이야."
나는 그냥 흘려들었다. 남의 집 사정에 관심 둘 여유가 없었다. 그때는 그랬다.
소란은 그날 오후에 벌어졌다.
한소라가 계단에서 굴렀다. 정확히는, 구르는 척을 했다.
나는 그 자리에 없었지만 목격자는 많았다.
계단에서 발을 헛디딘 척 미끄러졌고, 마침 계단 아래를 지나던 강도현이 그녀를 받아 안았다는 것도.
"괜찮으세요?"
도현의 목소리가 들렸다는 얘기를, 나는 저녁이 다 돼서야 전해 들었다.
같은 반 애가 흥분해서 종알거렸다. 강도현 님이 저번 마차 사건 때처럼 또 사람을 구했다면서, 낭만적이라면서.
'뭐, 다칠 뻔한 사람 도와주는 게 뭐가 문제야.'
그때까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약혼자가 다른 여자를 안았다는 것쯤 아무렇지 않았다. 도현이 딱히 흑심을 품고 그랬을 리도 없고, 넘어질 뻔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는 게 더 이상한 거니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서연 님, 그거 들으셨어요?"
기숙사 복도에서 시녀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걷다 말고 슬쩍 다가와서, 목소리를 낮추면서.
그런 식으로 물어오는 건 대체로 좋은 얘기가 아니었다.
"뭘?"
"한소라 양이... 서연 님한테 안 좋은 얘기를 좀 하고 다닌다고들 해서요."
나는 걸음을 멈췄다.
'안 좋은 얘기라니.'
"무슨 얘기?"
"그게... 서연 님이 자기를 은근히 무시했다고... 계단에서도 서연 님이 자기를 밀친 거라고요."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내가? 언제? 그날 나는 도서관에 있었는데.'
그날 오후 내 행적을 되짚어봤다. 3교시 끝나고 곧장 도서관 3층으로 올라가서, 역사 과제 자료 찾다가 사서한테 책 빌려달라고 부탁했고, 거기서 거의 두 시간을 있었다. 계단 근처엔 얼씬도 안 했다.
하지만 웃을 일이 아니었다.
소문은 이미 퍼지고 있었고, 나는 그 자리에 없었다는 걸 증명할 방법이 딱히 없었다.
사서가 기억해줄까? 그 시간에 나 말고도 학생이 몇 명 더 있었을 텐데, 다들 자기 볼일만 봤겠지. 알리바이 증명이라는 게 이렇게 어렵구나, 를 나는 그때 처음 실감했다.
"헛소리네."
나는 짧게 말했다.
하지만 등줄기로 서늘한 게 스쳤다.
'이거 뭔가 이상한데.'
시녀는 내 표정을 살피듯 곁눈질을 하다가, 더는 말을 잇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물러났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미 이 얘기가 몇 명한테나 전해졌을까. 시녀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이면, 학생들 사이에서는 이미 몇 배로 부풀어 있을지도 모른다.
다음 날, 도서관에서 한소라와 처음 마주쳤다.
책장 사이를 걷다가 모퉁이에서 딱 마주쳤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마치 겁먹은 사람처럼.
"저, 저...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는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주변에 있던 학생 몇몇이 나를 흘겨보는 게 느껴졌다.
'저것도 다 계산된 거겠지. 안 그러면 이 시점에 저렇게까지 겁먹은 척을 할 이유가 없잖아.'
내가 뭘 했다고 저렇게 벌벌 떤다는 티를 내나. 소문이 이미 저 애가 원하는 방향으로 다 퍼진 뒤였다. 나는 이미 '괴롭히는 약혼녀' 역할을 맡은 배우가 되어 있었고, 저 애는 '가여운 피해자'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었다.
"안녕."
나는 최대한 평범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표정 관리는 이럴 때 하는 거지, 싶었다. 흔들리는 티를 내면 저 애 각본에 완벽하게 들어가주는 꼴이니까.
한소라는 잠깐 나를 올려다보다가, 다시 시선을 내렸다.
그 순간 나는 그녀의 손에 작은 수첩이 들려 있는 걸 보았다.
표지가 낡고, 모서리가 헐어 있었다.
마치 오래된 것처럼 위장된, 새 것 같은 냄새가 나는 수첩이었다.
'저건 또 뭐야.'
가죽 표지에 일부러 낸 듯한 스크래치, 억지로 구겨서 편 것 같은 모서리. 오래 써서 낡은 게 아니라 낡아 보이게 만든 거였다. 그 부자연스러움이 눈에 딱 걸렸다.
왜 그런 걸 들고 다니는 걸까. 일기장인가, 아니면 뭔가 적는 용도인가.
한소라는 내 시선이 수첩에 닿은 걸 느꼈는지, 얼른 그걸 품에 감췄다. 그 동작이 너무 재빨라서, 오히려 더 눈에 남았다.
그날은 그냥 넘어갔다.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도서관 한복판에서 수첩 하나 붙잡고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럴 명분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수첩을, 나는 며칠 뒤 아주 다른 자리에서 다시 보게 됐다.
강도현의 손에 들려 있는 걸로.
낡고 헐어 보이던, 그러나 새것 냄새가 나던 그 수첩이, 내 약혼자의 손안에 아무렇지 않게 쥐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