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누명 쓴 학생회장 약혼녀

5화

며칠 뒤, 조사가 마무리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학생회에서 곧 정식 처분을 내린대." 룸메이트가 조심스럽게 전해준 얘기였다. 밥을 먹다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길래 뭔가 심각한 얘긴가 싶었더니, 결국 그거였다. '벌써?' 생각보다 빨랐다. 마치 누군가가 이걸 서둘러 끝내려는 것처럼. "근데 왜 이렇게 빨리 끝내는 거야?" 내가 묻자 룸메이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몰라. 그냥 위에서 압박이 있었다는 얘기도 있고." '위에서 압박이라니. 누가.' 짐작이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강도현이든, 아니면 강도현 뒤에 있는 누군가든. 이 학교에서 '위'라는 말이 나오면 대충 답은 정해져 있었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나는 젓가락으로 밥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입맛이 뚝 떨어졌다. '먹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데.' 룸메이트가 눈치채기 전에 억지로 몇 숟갈 더 밀어 넣었다. 식당을 나오자마자 나는 윤재현에게 다시 연락을 취했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몇 번이나 머뭇거렸다. 문장을 썼다 지웠다 반복하다가, 결국 짧게 '진행 상황 어때요' 하나만 보냈다. 답장은 짧았다. 『오늘 밤 실습실로. 완성됐어요.』 여섯 글자짜리 문장인데 심장이 다르게 뛰었다. '완성됐다니.' 며칠간 마음 한구석에 얹혀 있던 돌덩이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왜 마음이 놓이는 게 아니라 더 조여드는 기분이지. 그날 밤, 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기숙사를 빠져나갔다. 순찰 시간을 다시 계산하고, 인적이 드문 뒷길을 골라 걸었다. 지난번에 걸렸던 경비의 얼굴이 자꾸 눈앞에 떠올라서 발걸음이 저절로 조심스러워졌다. '이번엔 안 걸려야 하는데.' 건물 그림자를 따라 몸을 숨기고,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구간에서만 빠르게 움직였다. 신발 밑창이 바닥에 닿는 소리마저 신경 쓰였다. 발끝으로 걷다시피 하며 숨을 죽였다. 실습실 문을 두드리자, 윤재현이 조금은 지친 얼굴로 나를 맞았다. 눈 밑이 거뭇했고, 손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잉크 냄새가 배어 있었다. "조금 늦었네요." "미안해요. 순찰 때문에." 윤재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닫았다. 실습실 안은 여느 때처럼 서늘했고, 책상 위에는 낯익은 도구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며칠 동안 여기서 뭘 했는지 짐작이 갔다. 그가 책상 위 일기장을 나에게 내밀었다. 표지의 문양이 이제는 더 뚜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희미하게 어른거리던 게, 지금은 확실한 선으로 보였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은은하게 숨을 쉬는 것 같았다. "이게 완성된 거예요?" "완성이라기보다는... 실전에서 쓸 수 있을 정도." 윤재현이 담담하게 말했다. 말투는 무심했지만, 눈빛에는 확신이 있었다. "이걸 펼치고, 진위를 확인하고 싶은 기록을 대면 자동으로 반응해요. 진짜 기억이면 파랗게, 조작된 기억이면 붉게." "그렇게 간단하게요?" "간단한 게 아니라, 그렇게 만드느라 며칠을 못 잤어요." '아, 그러시겠지.' 눈 밑 다크서클을 보면 딱 답이 나오는데 굳이 말로 확인시켜주는구나. 나는 일기장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손끝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마치 안에 뭔가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표지가 손바닥에 닿는 순간 옅은 열기가 스며들었다. '이거면 된다.' "이걸로 그 조작 일기장을 검증하면 되는 건가요." "이론상은 그렇죠. 근데." 윤재현이 말을 멈췄다. "근데 뭐요." "그 조작 일기장, 아직 확보 못 했잖아요." 순간 말이 막혔다. '그렇지. 나한테는 진짜 조작 일기장이 없다.' 검증할 도구는 생겼지만, 검증할 대상이 여전히 학생회 손에, 아니 정확히는 강도현의 손에 있었다. 도구만 있고 재료가 없으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요리는 다 배웠는데 냉장고가 텅 빈 꼴이었다. "방법이 있어요?" 나는 조급하게 물었다.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스스로도 느껴질 정도였다. 윤재현은 팔짱을 끼고 잠깐 생각하는 얼굴을 했다. 그 몇 초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학생회 처분 발표하는 날, 그 일기장 다시 공개할 확률이 높아요. 증거로 쓸 거니까." "그때 검증하자는 거예요?" "네. 그 자리에서, 전교생 다 보는 앞에서요." '대담하네.' 전교생 앞에서 조작 일기장을 까발린다고? 잘 되면 영웅, 잘못되면 나 혼자 미친 사람 취급받고 끝나는 판이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일기장을 몰래 훔쳐낼 방법도, 강도현을 개인적으로 설득할 여지도 이미 사라진 뒤였다. 훔쳐내려다 걸리면 그 자리에서 퇴학이고, 설득하려다 걸리면 그건 더 볼 것도 없었다. "발표는 언제인데요." "내일 오후. 대강당."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마른침이 목구멍에 걸렸다. '준비할 시간이 하루도 안 되잖아.' 머릿속이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내일 오후까지 뭘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 옷은 뭘 입어야 할까 하는 생각까지 스쳤다가, '지금 그게 문제냐' 하고 스스로 뒤통수를 쳤다. "그 자리에 저 데려가 줄 수 있어요?" "내가요? 왜." "검증은 저 혼자 할 수 없잖아요. 이거 다룰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한데." 윤재현이 잠깐 나를 바라보다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들고 나가는 순간, 나도 학생회한테 찍혀요." "알아요. 그래도 부탁할게요." 그가 나를 계속 응시했다. 잠깐이지만 그 눈빛 속에 여러 가지 계산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위험, 손해, 그리고 아마도 나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까지. "이거 실패하면 어떻게 될지 알죠." "알아요. 그래도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어차피 저는 끝이에요." 그는 대답 대신 일기장을 다시 가져가 표지를 몇 번 매만졌다. 손끝으로 문양을 따라 그리듯 쓸어내리는 모습이, 마치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내일 대강당 뒷문에서 봐요. 발표 시작 십 분 전." "뒷문이요?" "정문으로 들어가면 눈에 띄니까." '그건 그렇지.' 이 판에서 눈에 띄는 게 제일 위험한 짓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실습실을 나섰다. 복도를 걸으며, 손끝이 떨리는 걸 느꼈다. 아까부터 이어진 떨림이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손 전체로 번져 있었다. '내일이면 끝난다. 아니면 완전히 끝나든가.' 중간은 없었다. 이 상황에 중간이 있을 리가.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다시 그 시선이 느껴졌다. 이번엔 숨지도 않았다. 한소라의 시녀가, 복도 저편에서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마치 이미 결과를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그저 스쳐 지나가듯 눈을 마주쳤다가 떼었다. '저 표정 뭐야.' 등줄기로 서늘한 게 흘렀다. 단순한 감시라면 저런 표정을 지을 필요가 없었다. 감시하는 사람은 대개 무표정하거나, 아니면 조금 긴장한 얼굴을 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저건,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여유였다. 방으로 돌아와 창밖을 바라보며, 나는 내일의 대강당을 떠올렸다. 사람들로 가득 찬 강당, 단상 위에 선 강도현, 그리고 손에 든 일기장 하나. 검증 일기장은 손에 넣었다. 하지만 저쪽이 뭔가를 이미 알고 있는 듯한 저 미소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설마 저쪽도 뭔가 준비해둔 게 있는 건가.' 머릿속으로 온갖 가능성이 스쳤다. 발표 순서를 갑자기 바꾼다든가, 일기장 자체를 아예 공개하지 않는다든가, 아니면 나를 그 자리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다든가. 어느 쪽이든 좋은 그림은 아니었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끌어당겼다. 몸은 피곤한데 정신은 점점 더 또렷해졌다. 눈을 감아도 자꾸 그 미소가 떠올랐다. 밤이 깊도록, 나는 잠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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