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누명 쓴 학생회장 약혼녀

4화

룸메이트가 흘린 이름을 붙잡고, 나는 다음 날부터 조사에 들어갔다. 외출 금지라고 해도, 완전히 갇혀 있는 건 아니었다. 기숙사 안에서만이라도 움직일 수 있었다. '감시가 있어도 사람이 완전히 붙어 있는 건 아니잖아.' 감시 임원들이 붙어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었다. 식사 시간, 취침 점호, 그리고 수업 이동 시간. 그 외의 시간에는 다들 자기 할 일을 하느라 바빴다. 나 하나 감시하는 데 학원 전체가 인력을 쏟아부을 만큼 내가 대단한 인물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러게 좀 잘 살지, 이서연.' 자조가 절로 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자조할 시간도 아까웠다. 윤재현. 마도구 공학과의 이름 없는 천재. 입학할 때부터 이론 수업을 전부 면제받았다는 소문이 있는 인물이었다. 말이 없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으며, 자기 방식대로 뭔가를 계속 만들어내는 걸로 유명했다. '그 재능을 가진 애가 왜 소문 하나도 안 나 있지.'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실력이 그 정도면 학원에서 떠받들려야 정상인데, 오히려 조용히 묻혀 있는 느낌이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그의 존재를 눈에 띄지 않게 눌러두고 있는 것처럼. '뭐, 지금 그런 뒷사정까지 캐고 있을 여유는 없고.' "그 사람이 만들었다는 물건이 뭔데?" 나는 룸메이트에게 다시 물었다. "일기장이래. 근데 그냥 일기장이 아니라, 쓴 사람의 진짜 기억이 남는 물건이라던데." "기억이 남는다고?" "그러니까, 거기다 뭘 쓰면 그날 그 사람이 진짜로 겪은 일이랑 기록이 어긋나는지 아닌지가 드러난다는 거야. 마력 감응식이라던가."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거다.' 조작된 일기장에 대응할 방법.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유일한 도구. 심장이 조금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근데 그런 물건이면 학원에서 벌써 난리 났어야 하는데 왜 조용해?" "완성 안 됐대. 아직 시제품 단계고, 실험용으로 몇 개밖에 없다더라." '그럼 지금 확보를 못 하면 아무 소용없다는 거잖아.' 이불을 덮고 누워서도 머릿속으로 계속 계산을 돌렸다. 감시 임원들의 순찰 동선, 실습실 위치, 수업 시간표. 어느 하나라도 어긋나면 곧바로 '이서연이 몰래 돌아다녔다'는 보고가 학생회에 올라갈 거였다. '한 번에 끝내야 해. 두 번 시도할 여유는 없어.' 나는 다음 날 무리를 해서 감시의 눈을 피해 마도구 공학과 실습실로 향했다. 감시 임원의 순찰 시간을 계산해서, 정확히 그 틈에 움직였다. 복도를 걸을 때도 발소리를 최대한 죽였다. 누군가 마주치면 그냥 도서관 가는 길이라고 둘러댈 핑계까지 미리 준비해뒀다. '이 정도 계산은 해야지, 안 그러면 이대로 끝이다.' 마도구 공학과 건물은 다른 곳보다 훨씬 조용했다. 학생 수가 적어서 그런가 싶었는데, 복도를 걷는 내내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로 이 학과 자체가 학원 안에서 존재감 없이 밀려나 있는 느낌이었다. 실습실 문 앞에서, 나는 잠깐 멈춰 섰다. 안에서 뭔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 회로가 아니라니까, 마력 흐름이 반대로..."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대답은 무뚝뚝했다. 문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만으로도 이미 귀찮다는 감정이 다 느껴졌다. "이서연입니다. 잠깐 얘기 나눌 수 있을까요." 한참 침묵이 흐른 뒤, 문이 살짝 열렸다. '설마 무시하고 그냥 안에서 계속 뭐 만들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갈 즈음이었다. 안경을 낀 남학생이 나를 훑어보았다. 헝클어진 머리, 소매가 걷혀 올라간 셔츠, 손가락 마디마디 굳은살. 얼마나 오랫동안 손으로 뭔가를 만지고 다듬었는지 그 굳은살만 봐도 짐작이 갈 정도였다. '이 사람이 윤재현인가.' "용건이 뭐예요." 그가 짧게 물었다. 존댓말이었지만, 말투에는 조금의 존중도 담겨 있지 않았다. 말끝이 딱딱 끊어지는 게, 관심이 없다는 뜻이었다. '존댓말인데 왜 더 차갑게 느껴지지.' "기억을 검증하는 일기장을 만드셨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그거 실제로 작동하나요." 그의 눈빛이 처음으로 미세하게 변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무관심하던 얼굴에 뭔가 스치고 지나갔다. "누가 그런 걸." "확인만 해주시면 됩니다. 존재 여부만이라도." 윤재현은 잠깐 나를 바라보다가, 문을 조금 더 열었다. "들어와요. 오래 못 있어요." 실습실 안은 부품과 도면으로 가득했다. 책상 위엔 정체를 알 수 없는 금속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고, 벽에는 회로도인지 마법식인지 구분이 안 가는 종이들이 어지럽게 붙어 있었다. 방 안 가득한 마력 특유의 서늘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책상 한쪽에, 낡은 가죽 표지의 수첩 하나가 놓여 있었다. 한소라의 조작 일기장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어딘가 다른 느낌이 났다. 표지에 미세하게 빛나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문양이 아주 느린 속도로 숨을 쉬듯 밝기가 변하고 있었다. "이게, 그건가요." "아직 완성품 아니에요. 정확도 팔십 퍼센트 정도." 윤재현이 담백하게 대답했다. 마치 오늘 날씨를 이야기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 "팔십이면 충분합니다." '백 프로가 아니어도 상관없어. 지금 나한텐 아예 없는 거나 마찬가진데.' 그가 나를 잠깐 훑어보더니, 조금 신기하다는 얼굴을 했다. "왜 이걸 찾아요? 학생회 조사받는 그 이서연 아니에요?" '벌써 소문이 다 퍼졌구나.' 마른침을 삼켰다. "제가 그 이서연입니다. 그리고 그 조사가 조작됐습니다." 윤재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경 너머의 눈이 나를 위아래로 다시 훑었다. 마치 사람이 아니라 부품을 감정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다 툭 내뱉었다.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예상은 했지만 막상 들으니 속이 쓰렸다. '그냥 물건 취급이나 하는 애구나.' 하지만 그 순간, 그가 이어 말했다. "근데 이 물건 시험해볼 대상은 필요했어요." 나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조건이 뭔데요." "조건 없어요. 그냥 흥미로워서."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 얘기가, 재밌어요." '재밌다니. 남의 인생이 걸린 문젠데.' 속으로는 욕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겉으로는 표정을 관리했다. 이 사람 비위 거슬려서 좋을 게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이유가 뭐든 상관없었다. 일기장을 손에 넣을 방법이 생긴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럼, 시험은 언제부터 가능한가요." "당장은 안 돼요. 조율 안 끝났어요." 윤재현이 책상 위 수첩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다시 거둬들였다. 조심스러운 손짓이었다. 마치 아기라도 다루는 것처럼. '저게 지금 저 사람한테는 사람보다 더 귀한 물건이겠구나.' "얼마나 걸릴까요." "며칠." 짧은 대답. 더 캐물어봤자 소용없을 것 같았다. 그날 밤, 나는 윤재현에게 며칠 시간을 요청받았다. "조율이 더 필요해요. 며칠만 더 줘요."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겠습니다." "연락은 어떻게 해요, 당신은 감시받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건 나도 몰라.' "제가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윤재현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앉았다. 대화가 끝났다는 뜻이었다. 나는 조용히 문을 닫고 실습실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어딘가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목덜미가 서늘했다. 걸음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눈동자만 슬쩍 옆으로 굴렸다. 돌아보니, 복도 끝에서 낯익은 시녀 하나가 재빨리 몸을 숨기는 게 보였다. 한소라의 개인 시녀였다.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어.'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느낌이었지만, 걸음만은 흐트러지지 않게 애썼다. 내가 윤재현을 만난 걸, 이미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설마, 처음부터 여기까지 다 예상하고 있었던 건가.' 한소라가. 아니, 그 뒤에서 웃고 있을 누군가가. 방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겨우 손에 넣은 희망 하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물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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