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따뜻한 물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는 감각과 함께, 세아는 문득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작은 나무 욕조 안, 김이 뽀얗게 올라오는 물속에서 다섯 살배기 몸이 둥둥 떠오르듯 가벼웠는데, 그 가벼움이 이상하게도 낯설어서 세아는 잠시 멍하니 물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욕조 가장자리에 걸쳐진 작은 손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는데, 곁에서 물을 끼얹어 주던 시녀는 그저 아기씨가 목욕물이 뜨거워 그런 줄로만 알았다.
"미래야, 조금만... 천천히..."
다섯 살배기 목소리로 겨우 내뱉은 그 말에, 손미래는 온도를 살피려 손등을 물에 담그면서도 세아의 낯빛이 이상하게 하얗게 질려가는 걸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온도가 딱 맞는데요, 아기씨." 미래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다시 바가지에 물을 채웠다.
하지만 세아는 지금 물의 온도 따위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는데,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벼락이 관통하듯 낯익은 장면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복을 입은 여고생이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노트북을 켜는 장면, 형광등 불빛 아래 뻑뻑한 눈을 비비며 이어폰을 꽂던 손끝의 감촉, 그리고 좋아하던 여성향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의 타이틀 화면이 뜨는 순간과 그 특유의 배경음악 몇 소절까지도 선명하게 재생되고 있었다.
그 게임 속에서 몇 번이고 다시 플레이했던 캐릭터 하나의 이름이 눈앞에 떠올랐다.
선우세아.
악역 영애.
왕비 자리를 노리다 히로인을 괴롭히고, 결국 광기에 사로잡혀 파멸하는 캐릭터.
그 이름이 지금 자신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는데, 그 자각이 밀려온 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돼.'
세아는, 아니 박소윤은, 물속에서 무릎을 끌어안았다.
손끝이 하얗게 질려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몸이라고 실감하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렸는데, 이 작고 여린 팔다리가 낯설다 못해 남의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자기 팔뚝인데도 꼭 인형의 팔을 붙잡고 있는 기분이었달까, 물속에서 흔들리는 그 조그만 손가락 마디마디가 도무지 제 것 같지가 않았다.
게임 '왕비의 정원'.
대충 훑어봤던 캐릭터 소개창의 문구들이 하나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선우세아 — 청명 왕국 공작가의 외동딸, 아름다운 외모와 뛰어난 재능을 지녔으나 애정에 목말라 뒤틀린 인물, 왕세자 이현의 어린 시절 약혼녀이자 훗날 히로인 강나은을 궁지로 몰아넣는 최종 악역.
공략 루트마다 세아가 죽는 방식도 조금씩 달랐던 것 같은데, 정확히 몇 번째 챕터에서 어떤 대사를 쳤을 때 죽었는지까지는 가물가물했다.
그래도 결말은 대개 셋 중 하나였다.
감옥, 유배, 혹은 죽음.
그 셋 중 어느 것도 딱히 낫다고 할 수 없어서, 세아는 물속에서 조그만 이를 딱딱 부딪혔다.
숨이 턱 막혀왔다.
물이 목까지 차오르는 것 같은 압박감에 손발을 허우적거리자, 그제야 손미래가 화들짝 놀라며 세아의 등을 받쳐주었다.
"아기씨, 왜 그러세요? 어디 아프세요?"
놀란 목소리로 물어오는 그 얼굴을 보면서도, 세아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 사람이 게임 속 조연 인물인지 아닌지조차 가늠이 안 되는 지금, 무슨 말을 어디까지 해야 할지 아무런 계산도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미래... 손미래. 이 이름,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기억이라는 게 이렇게 반쪽만 살아있는 것도 있는 모양이었다.
손미래는 아기씨의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진 것을 느끼고는 서둘러 물기를 닦아내며 안기다시피 욕조 밖으로 꺼내 안았는데, 이토록 갑자기 열이 오르는 아이는 흔치 않았기에 속으로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수건으로 감싸 안은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손바닥에 그대로 전해졌고, 미래는 그 떨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아챈 듯했다.
'감기라도 걸리신 걸까, 아니면... 마력이 폭주하는 건가.'
공작가의 딸이라면 언젠가 마력이 발현할 나이였고, 이 정도 열이라면 그 전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래는 즉시 의원을 부르러 방문을 향해 뛰었다.
복도를 내달리는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들으며, 세아는 홀로 남겨진 순간에도 여전히 머릿속이 뒤죽박죽인 채였다.
혼자 남은 방 안, 침대에 눕혀진 세아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낯선 천장의 나무 무늬가 눈에 들어왔는데, 이상하게도 그 결 하나하나가 또렷하게 보이는 것이, 마치 스크린 속 배경을 클로즈업한 장면 같았다.
'이게 현실이구나.'
손끝으로 침대 시트를 슬쩍 쥐어보았다.
차갑고 매끈한 감촉이 손바닥에 그대로 닿아왔는데, 그 촉감이 너무도 생생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박소윤이었던 열여덟 인생의 기억과, 다섯 살 선우세아의 얕고 짧은 기억이 뒤섞여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소윤 쪽 기억은 학교, 학원, 노트북 화면, 좋아하던 배우의 인터뷰 영상 같은 것들로 채워져 있었고, 세아 쪽 기억은 겨우 다섯 해치 분량이라 그런지 조각조각 끊겨 있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부모의 얼굴 — 서늘한 눈매의 아버지와, 좀처럼 웃지 않는 어머니.
그 두 얼굴을 떠올리는 순간 가슴 한켠이 뻐근하게 조여왔는데, 이것이 다섯 살 세아의 감정인지 열여덟 소윤의 감정인지조차 구분이 안 되었다.
게임 속에서 세아가 그토록 애정을 갈구했던 이유가 바로 이 두 사람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이제야 온전히 이해가 되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게임 설정집 어딘가에 적혀 있던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공작 부부는 자식에게 무관심했으며, 이는 훗날 세아가 극단적인 애정 결핍을 보이는 원인이 된다.'
그 문장을 읽었을 때는 그저 캐릭터 설정의 하나로만 여겼는데, 지금은 그 문장이 자신의 삶 전체를 규정짓는 선고처럼 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 세아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두려움보다 더 선명한 하나의 얼굴이었다.
갈색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서민 출신이지만 밝고 다정한 눈을 가진 소녀.
강나은.
게임의 히로인.
소윤이 그토록 몰입해서 몇 번이고 다시 플레이했던, 자신이 직접 만나고 싶었던 캐릭터.
플레이할 때마다 나은의 대사 하나하나에 심장이 두근거렸던 기억이, 지금 이 순간에도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그 애의 웃는 얼굴, 눈이 접히는 모양, 소윤이 즐겨 골랐던 선택지에 반응하며 짓던 표정까지도.
'만나야 해.'
숨이 아직 거칠었지만, 그 생각만은 이상하게도 또렷했다.
죽음이든 유배든,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든, 적어도 그 소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목덜미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조용히 자리를 잡아갔다.
악역으로 죽든 말든, 일단 그 얼굴을 한 번은 보고 싶다는 생각이 이렇게까지 강렬하게 들 줄은 스스로도 몰랐는데, 그게 조금 어이없기도 했다.
'죽기 전에 최애는 보고 죽어야지.'
이런 상황에도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어이가 없어서, 세아는 뜨거운 이마를 짓누르며 작게 실소했다.
창밖으로 별빛도 없는 밤하늘이 낮게 깔려 있었는데, 세아는 그 캄캄함을 바라보며 앞으로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이 그만큼 아득하다는 것을 예감한 것 같았다.
구름에 가려진 달조차 보이지 않는 하늘은, 마치 이 세계가 자신에게 어떤 힌트도 주지 않겠다는 듯 무심하게 어두웠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어딘가 설레는 것 같기도 해서, 그 마음이 낯설어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파멸할 운명인데 설레다니, 제정신이야?'
스스로에게 던진 물음에도 딱히 답은 나오지 않았다.
복도 저편에서 발소리가 다급하게 가까워지는 게 들렸다.
의원을 부르러 갔던 손미래가 돌아오는 소리인 듯했는데, 그 뒤로 낮고 무거운 발소리 하나가 더 섞여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세아는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의원이 도착하기까지, 그리고 부모가 이 소란을 듣고 방으로 들어서기까지, 세아에게는 아직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당장 저 문이 열리면 마주해야 할 얼굴이, 게임 속에서 그토록 서늘하게만 그려졌던 그 아버지의 얼굴이라는 것을 떠올리자, 다섯 살배기 심장이 다시 쿵쿵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