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의원이 다녀간 지 이틀이 지나도록 세아는 좀처럼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는데, 열은 이미 가라앉았지만 머릿속에 새롭게 자리 잡은 기억들을 정리하느라 그럴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천장을 보고 누워 있으면 낯선 단어들이 물처럼 흘러들어왔다. 공작가의 가계도, 왕궁의 규율, 시녀들의 서열,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몸의 주인이었던 아이가 나중에 겪게 될 파국까지. 그 모든 것이 마치 누군가 억지로 밀어 넣은 서랍처럼 뒤죽박죽으로 쌓여 있었고, 세아는 그 서랍을 하나씩 열어 정리하는 동안 몇 번이나 숨이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선우도현 공작, 한서은 공작부인.'
게임 설정집 한 귀퉁이에 적혀 있던 문장 몇 줄이 전부였던 두 사람의 이름을, 이제는 직접 얼굴을 마주하며 확인해야 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소윤이었을 때 그 게임을 몇 번이나 클리어했던가. 세아 루트를 볼 때마다 답답해서 화면을 끄고 싶었던 기억이, 이제는 자신의 미래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낯설었다.
손미래가 방문을 열며 낮은 목소리로 알렸다.
"아기씨, 공작님과 부인께서 오셨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세아의 심장이 갈비뼈 안쪽에서 튀어 오르는 것 같았는데, 이 몸이 원래 다섯 살배기의 심장이라는 걸 감안하면 그 진동이 유난히 크게 느껴지는 것도 당연했다. 손끝이 이불깃을 움켜쥐었고, 그 작은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변하는 것이 스스로도 느껴질 정도였다.
'괜찮아. 그냥... 얼굴만 보는 거야.'
그렇게 되뇌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목덜미로 서늘한 기운이 스치는 것 같았고, 코끝에는 방 안 가득한 약초 냄새와 함께 어딘가에서 풍겨오는 낯선 향— 아마도 두 사람이 걸치고 있을 값비싼 옷감의 냄새일 것이었다 — 이 뒤섞여 들어왔다.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방으로 들어섰다.
선우도현은 짙은 남색 제복 위로 검은 망토를 걸치고 있었는데, 훈련된 자세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그 걸음걸이만으로도 방 안의 공기가 다르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발소리마저도 절제되어 있어서, 마치 오래도록 군에서 몸을 다스려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종류의 정적이 그를 감싸고 있는 듯했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으며, 얼굴에는 표정이라 할 만한 것이 거의 없었는데, 그 무표정이 게임 속 삽화에서 봤던 그대로여서 세아는 순간 숨을 삼켰다. 화면 속에서는 그저 그림이었던 얼굴이 이렇게 실물로, 살아 움직이는 근육과 핏기 있는 피부로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스크린 밖으로 걸어 나온 배우를 마주한 것처럼.
'저 사람이... 나를 파멸하게 만드는 아버지구나.'
그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선우도현의 시선은 딸의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가, 별다른 감정의 파동 없이 방 안을 한 바퀴 훑었다. 침대 옆의 약병, 창가에 놓인 화분, 그리고 다시 딸에게로. 그 시선의 궤적이 마치 순찰을 도는 것 같아서, 세아는 자신이 검문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한서은은 그 뒤를 따라 들어오며 조용히 침대 곁으로 다가왔는데, 화려한 드레스보다 더 눈에 들어오는 건 그녀의 표정이었다. 치맛자락이 스치는 소리마저 조심스러워서, 마치 소리를 내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한 사람처럼 걸음을 옮겼다.
아름다운 얼굴이었지만 그 위에 걸린 미소는 마치 잘 만들어진 도자기 인형의 그것처럼 매끈하고 차가워서, 진짜 감정이 담겨 있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눈매는 부드럽게 휘어 있었지만 그 안쪽, 눈동자 깊은 곳에는 아무런 온도도 느껴지지 않았다.
"몸은 좀 어떠니."
그 말투마저도 사무적으로 들려서, 세아는 대답을 하려다 목이 메는 것을 느꼈다. 다섯 살짜리 아이의 몸으로도 이런 종류의 서걱거림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괜찮... 습니다."
겨우 내뱉은 그 대답에, 한서은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는데, 그 시선이 마치 이곳에 머물 이유가 없다는 듯 담담해 보여서 세아는 속으로 마음이 서걱거리는 것을 느꼈다. 창밖으로는 겨울 하늘이 낮게 깔려 있었고, 그 무채색 하늘을 바라보는 한서은의 옆얼굴이 유독 정적으로 보였다.
선우도현은 침대 발치에 서서 딸을 잠시 내려다보았을 뿐, 별다른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의 손끝에는 오래된 굳은살이 박여 있었는데, 그것이 검을 쥔 손이라는 걸 세아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저 의원에게서 들었을 법한 병세를 재차 확인하려는 듯 짧게 물었다.
"열은 다 내렸소?"
그 물음이 미래를 향한 것인지 세아를 향한 것인지 애매해서, 미래가 대신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어제부터는 괜찮으십니다."
"그렇소."
짧은 대답 뒤에 다시 정적이 이어졌다. 세아는 그 정적이 낯설지 않았다. 게임 속에서도 이 부부는 대화가 짧았다. 서로를 마주 보는 시간보다 서류를 마주 보는 시간이 더 많았던, 그런 부부였다.
세아는 그 짧은 대화가 오가는 동안 침대에 누운 채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는데, 이상하게도 게임 속에서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세트장 안에 놓인 소품처럼, 이 방 전체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몸에서 풍기는 은은한 향, 벽에 걸린 초상화, 침대 위로 떨어지는 창빛까지도 모두가 누군가 정성껏 배치한 무대 장치처럼 보였다.
부모라는 존재가 이토록 멀게 느껴질 수 있다는 걸, 소윤이었을 때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소윤의 부모는 잔소리가 많았지만 적어도 문 앞에서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온기를 느낄 수 있었는데, 이곳의 온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한서은은 잠시 딸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무언가 말을 하려다 삼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애가... 낯빛이 왜 이렇게 어른스러워 보이지.'
순간 스친 그 생각을 그녀는 애써 지워버렸는데, 다섯 살짜리 아이의 얼굴에서 그런 인상을 받았다는 게 스스로도 이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딸의 이마를 짚어볼까 하다가, 이내 그 손을 다시 옷자락 아래로 거두어들였다. 그 작은 동작 하나가 세아의 눈에는 아쉬움으로 보였지만, 정작 한서은 자신은 그저 예의를 지킨 것뿐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선우도현 역시 딸의 눈빛에서 뭔가 걸리는 것을 느꼈지만, 그는 그런 위화감을 오래 붙잡고 있을 만큼 시간이 여유롭지 않았다. 오늘 오후에도 처리해야 할 군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딸의 병세를 살피러 온 이 짧은 시간조차 그에게는 일정을 쪼개어 낸 결과였다.
"오늘은 쉬시오."
그 한마디를 끝으로 그는 몸을 돌려 방을 나섰고, 한서은도 잠시 머뭇거리다 그 뒤를 따랐다. 문이 닫히기 직전, 한서은의 시선이 다시 한번 세아를 향했던 것 같았는데, 그것이 걱정인지 그저 습관적인 확인인지는 세아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두 사람이 나간 뒤, 방 안에는 다시 세아와 미래만이 남았는데, 세아는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이상한 허탈함을 느꼈다. 방금까지 팽팽했던 공기가 그제야 느슨해지는 것이 느껴졌고, 참았던 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게임에서 본 그대로다.'
서늘한 눈, 감정을 감춘 미소, 그리고 그 사이에 흐르는 냉랭한 공기까지. 이 집이 게임 스토리 속에서처럼 붕괴할 가족이라는 예감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왕비가 되겠다고, 사랑받고 싶다고 그토록 애타게 매달렸던 게임 속 세아의 마음이, 이제야 조금씩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그 갈망이 얼마나 컸을지, 이 냉기 속에서 다섯 살부터 자라났다면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미래는 이불을 다시 덧씌워 주며 물었다.
"아기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세아는 그 질문에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미래의 손이 이불깃을 여며주는 그 짧은 온기가, 방금 전 부모에게서는 느끼지 못했던 종류의 것이라는 사실이 문득 서글프게 다가왔다.
'저 두 사람을 그냥 이대로 두면... 나도 저 결말로 갈 텐데.'
어떻게든 이 집의 냉기를 걷어내야 한다는 생각이, 그날 밤 세아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목표로 굳어지고 있었다. 문제는 다섯 살배기의 몸으로 그 냉기를 어떻게 걷어낼 수 있을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창밖의 눈이 소리 없이 창틀에 쌓여가는 것을 보며, 세아는 그 하얗고 차가운 것이 꼭 이 집의 온도 같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