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견습 집사, 운명을 바꾸겠습니다

1화

황보 공작가의 별채, 늦은 밤이었다. 여섯 살 황보소하는 강윤재의 소매를 두 손으로 움켜쥔 채 놓지 않았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될 만큼 힘을 준 채였다. 촛불 하나만 밝혀진 방 안은 두 아이의 숨소리만이 유일한 소음이었다. "가지 마."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안에 담긴 절박함은 나이에 걸맞지 않았다. 겉으로 보면 우스운 그림이었다. 대현제국 최고 명문가인 황보가의 외동딸이, 거리에서 주워 온 견습 집사 후보 아이 하나를 붙잡고 애원하는 모습. 신분으로 따지면 하늘과 땅 차이였다. 지나가는 하녀가 이 광경을 봤다면 배꼽을 잡고 웃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그림을 뒤집어 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소하는 처형이라는 운명에 묶인 존재였다. 아직은 아무도, 심지어 그녀 자신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지만. 그리고 윤재는, 보잘것없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삶을 붙들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강자와 약자가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놓아주세요, 아가씨." 윤재가 조용히 말했다. 나이는 소하와 같은 여섯 살이었지만 목소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무게가 얹혀 있었다. "싫어." 소하가 고개를 흔들었다. 촛불에 흔들리는 그녀의 은발이 방 안 그림자를 어지럽게 그려냈다. "네가 없어지면 안 돼." 윤재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정확히는,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해하는 순간 자신이 무엇을 짊어져야 하는지도 함께 이해해야 했으니까. *** 일주일 전만 해도 윤재는 이런 방에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제도 뒷골목, 쓰레기와 젖은 종이 냄새가 뒤섞인 그곳에서 그는 사흘째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쓰러져 있었다. 여섯 살 아이가 견딜 수 있는 한계를 이미 넘어선 상태였다. 배는 등가죽에 붙었고, 손끝은 감각조차 희미했다. 그리고 그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가 터졌다. 낯선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대학 강의실, 마법학 개론 시험지, 밤새 붙잡고 있던 게임 화면. 자신이 살았던 다른 삶의 조각들이었다. 사고로 죽었던 순간의 감각까지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자동차 헤드라이트, 브레이크 소리, 그리고 어둠. '이거 내가 알던 세계잖아.' 정신이 아득해지는 와중에도 머릿속 한쪽은 계속해서 정보를 쏟아냈다. 지명, 인물, 사건들이 마치 오랫동안 눌러 놓았던 책장이 한꺼번에 펼쳐지는 것처럼 흘러나왔다. 그는 그 순간 이 세계가 전생에 자신이 수백 시간을 쏟았던 게임 '황금의 왕관' 속 세계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게임의 배경 중 하나가, 지금 자신이 쓰러져 있는 이 골목의 끝에 있는 초록 지붕의 거대한 저택이라는 것도. 황보 공작가였다. '왜 하필 여기지.' 그는 생각했다. 하필이면 그 저택, 하필이면 그 골목, 하필이면 그 시점.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정교하게 맞아 들어갔다. 그 저택 안에 사는 외동딸의 이름까지 떠올랐을 때, 윤재는 정신을 잃었다. *** 정신을 차린 곳은 하인들의 숙소였다. 몸에는 깨끗한 담요가 덮여 있었고, 옆에는 죽이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낯설게 느껴졌다. "살았네." 나이 든 하녀가 무심하게 말했다. 팔짱을 낀 채 그를 내려다보는 눈빛에는 동정도, 냉대도 아닌 애매한 무관심이 담겨 있었다. "공작님 지나가시는 길에 발견돼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넌 그냥 뒷골목 시체 중 하나였을 거야." 윤재는 그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대신 머릿속으로는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황보소하.' 게임 속에서 그 이름이 어떤 의미였는지, 아직 완전히 기억나지는 않았다. 파편적인 이미지들뿐이었다. 사슬. 처형대. 군중의 야유. 그리고 그 중심에 서 있던 은발의 여인. 그것이 자신이 방금 만난 여섯 살 아이의 미래라는 것을, 윤재는 아직 확신하지 못했다. 확신하고 싶지도 않았다. 여섯 살짜리가 죽 그릇 앞에서 세계관의 비극을 곱씹는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정상은 아니었지만. 그런데. 그날 밤, 저택 정원을 산책하던 소하와 마주쳤다. 그녀는 윤재를 보자마자 멈춰 섰고, 한참을 뜯어보더니 불쑥 말했다. "너, 아빠가 주워 온 애구나." "네." 윤재가 짧게 답했다. "이름이 뭐야?" "강윤재입니다." 소하는 그 이름을 몇 번 되뇌더니, 갑자기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손이 작고 따뜻했다. "넌 내 거야." 여섯 살 아이의 억지에 가까운 선언이었지만, 윤재는 그 말이 이상하게 등골을 스쳤다. "저는 물건이 아닙니다, 아가씨." 그가 조심스레 정정했다. "몰라. 그냥 내 거야." 소하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은발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가 반짝였다. 마치 새로 발견한 장난감을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윤재는 그 순간 처음으로 이 아이가 단순한 배경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게임 속 텍스트로만 존재했던 이름이, 지금 눈앞에서 손을 잡고 웃고 있었다. *** 그리고 지금, 별채의 밤. 소하는 여전히 윤재의 소매를 붙잡고 있었다. "가지 마." 그녀가 다시 말했다. 이번엔 눈에 눈물까지 고여 있었다. 입술이 조금씩 떨렸다. 윤재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떠오른 파편적 기억 속 처형대의 여인과, 지금 눈앞에서 울먹이는 아이가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여전히 실감 나지 않았다. 하나는 군중 앞에서 사슬에 묶인 존재였고, 다른 하나는 소매를 붙잡고 매달리는 어린아이였다. 두 이미지가 겹쳐지지 않아서, 윤재는 몇 번이고 눈을 깜박였다. '이 아이가 정말 그렇게 되는 걸까.' 그 의문이 앞으로 그가 겪을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제가 왜 없어진다고 생각하세요?" 윤재가 물었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속으로는 나름대로 흔들리고 있었다. "몰라." 소하가 고개를 숙였다. "그냥. 다들 없어져. 유모도 없어지고, 오빠도 없어지고."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너도 없어질 것 같아서." 그 말에 윤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섯 살 아이가 벌써 상실을 학습했다는 사실이, 어쩐지 게임 속 텍스트보다 더 무겁게 다가왔다. "안 갈게요." 윤재가 결국 말했다. 그 말이 진심인지, 단순한 아이 달래기인지는 그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소하는 그 한마디에 울음을 뚝 그쳤다. 그리고 씩 웃었다. 처형대에 설 운명을 지닌 아이의 웃음이라기엔 너무나 순진한 것이었다. "약속." 소하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윤재는 잠시 그 작은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게임 속 지식과 지금 눈앞의 현실이 자꾸만 어긋났다. 이 손가락 하나에 얼마나 무거운 약속을 걸어야 하는지,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그가 마지못해 손가락을 걸었을 때, 창밖에서 낮게 부는 밤바람이 촛불을 흔들었다. 그림자가 방 안을 한 번 크게 일렁이고 지나갔다. 마치 앞으로 다가올 일들을 예고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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