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다정했던 살인귀

1화

새벽 안개가 계곡을 타고 내려왔다. 청하란 문하의 수련장은 그 안개 속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산 아래에서부터 피어오른 물안개가 마당을 덮었고, 나무들은 그 사이로 검은 그림자만 드러냈다. 서준하는 이미 마당에 나와 목검을 쥐고 있었다. 스승보다 먼저 일어나는 것, 그것이 그가 십삼 년째 지켜온 습관이었다. 동이 트기 전, 아무도 보지 않는 시간에 검을 쥐는 것. 그것만이 그가 스스로에게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해가 뜨기 전에 백 번을 채워야 한다.' 그는 그렇게 되뇌며 검을 내리쳤다. 쉭- 검이 허공을 갈랐다. 아직 검로가 서툴렀지만, 자세만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서른일곱 번째 내려침이었다. 팔뚝이 떨려왔지만 준하는 멈추지 않았다. '백 번이다. 딱 백 번만 채우면 된다.' 쉭- 쉭- 연달아 두 번을 더 내리쳤다. 숨이 가빠졌지만 호흡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려 애썼다. 아버지가 남긴 말이 있었다. '검을 쥔 자는 숨소리 하나로도 상대에게 틈을 보인다.' 준하는 그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오늘도 일찍 일어났구나." 청하란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준하는 검을 멈추고 돌아섰다. 스승은 새벽 안개 사이로 걸어오고 있었다. 물빛 도포 자락이 축축한 공기를 가르며 흔들렸다. 그 걸음걸이에는 소리가 없었다. 신급 명사라 불리는 자의 보법은 늘 그렇게 고요했다. "사부님께서도 일찍 기침하셨군요." 준하가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늙으면 잠이 없어지는 법이다." 청하란이 웃었다. 신급 명사, 당대 최강자 중 한 명이라 불리는 여인의 웃음치고는 소탈했다. 그 웃음에는 위엄이라고는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 스승이라기보다는 이웃집 어른 같은 웃음이었다. 준하는 그 웃음이 좋았다. 스승이 웃을 때만큼은 세상이 평온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평소 청하란은 말수가 적었다. 제자를 가르칠 때조차 필요한 말만 짧게 던지고 끝냈다. 그래서인지 저 웃음 하나가, 준하에게는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와도 같았다. 청하란은 준하의 검을 건네받아 자세를 고쳐주었다. 손끝이 준하의 손목을 감쌌다. 차가운 손이었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갔다. 힘을 빼야 검이 산다." "명심하겠습니다." 준하는 고분고분 답했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힘을 빼면 진다. 아버지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셨다.' 서무천, 그의 아버지는 전설급 강자로 불리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준하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뵌 것은 삼 년 전이었다. 다섯 살 무렵부터 청하란의 수련장에 맡겨진 뒤로, 아버지는 일 년에 두어 번 얼굴을 비추는 것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점점 뜸해졌고, 삼 년 전을 끝으로 발길이 끊겼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짧았다. '강해져라. 약한 자는 지킬 수 없다.' 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 아버지는 등을 돌렸었다. 그 뒷모습이 준하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버님은 잘 지내고 계실까요." 준하가 불쑥 물었다. 청하란의 손이 잠시 멈췄다. 안개 사이로 스승의 표정이 살짝 굳는 것을, 준하는 놓치지 않았다. "...무천은 강한 사람이다. 걱정할 필요 없다." 대답이 짧았다. 준하는 그 짧음 속에 무언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캐묻지 않았다. '사부님께서 숨기시는 것이 있다면, 때가 되면 말씀해주시겠지.' 스승이 하는 말에는 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을 준하는 십삼 년 동안 배워왔다. +++ 수련은 오전 내내 계속되었다. 동문인 몇몇이 마당에 모여들어 함께 검을 겨눴다. 준하보다 어린 아이들이 대부분이었고, 준하는 그들 사이에서 가장 오래 남은 제자였다. 개중에는 이미 문하를 떠난 이들도 있었다. 준하만이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퍽! 막내 제자의 목검이 준하의 어깨를 스쳤다. 얕은 타격이었지만 소리는 컸다. "죄, 죄송합니다 사형!" 막내가 화들짝 놀라며 물러섰다. "괜찮다. 다시 하자." 준하는 담담하게 자세를 고쳐 잡았다. 몇 합을 더 주고받은 뒤, 막내 제자가 목검을 내려놓으며 다가왔다. "준하 사형, 오늘도 사부님께 칭찬받으셨네요." 막내 제자가 웃으며 다가왔다. "칭찬이 아니라 지적을 받은 거다." 준하가 목검을 내려놓으며 답했다. "그래도 사부님이 직접 손을 봐주시는 건 사형뿐이잖아요. 저희는 늘 다른 사형들한테 배우는데." 준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허전했다. '스승의 손길이 아무리 따뜻해도, 그것이 아버지의 것은 아니다.' 다른 동문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난 뒤에도 준하는 마당에 남아 홀로 검을 휘둘렀다. 쉭- 쉭- 땀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 점심 무렵, 진뢰가 계곡으로 들어섰다. 천하 신급 명사 중 하나로 불리는 그는, 청하란과는 오랜 벗이자 동료였다. 준하에게는 삼촌뻘 되는 존재였다. 말을 몰고 온 것이 아니라 도보로 걸어 들어온 것이 특이했다. 평소 진뢰는 늘 말을 타고 다녔다. "준하야, 많이 컸구나." 진뢰가 준하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손길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준하는 살짝 휘청거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진뢰 어르신, 오랜만입니다." "오늘은 그냥 지나가는 길에 들른 것뿐이다." 진뢰가 웃으며 답했지만, 그 웃음 뒤로 어딘가 무거운 기색이 스쳤다. 준하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직은. 진뢰는 청하란을 찾아 안쪽으로 들어갔고, 두 사람은 오랫동안 방문을 닫아둔 채 나오지 않았다. 준하는 그것이 여느 때와 다름없는, 오랜 벗들 사이의 회포라고만 여겼다. 점심상이 차려졌지만 청하란과 진뢰는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도 흔한 일은 아니었다. '무슨 이야기를 저리 길게 나누시는 걸까.' 준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곧 접었다. 스승의 일에 함부로 끼어드는 것은 제자의 도리가 아니었다. +++ 저녁이 되자 청하란은 준하를 따로 불렀다. 방 안에는 등불 하나만이 켜져 있었고, 스승의 얼굴에는 낮보다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오늘은 일찍 쉬거라. 내일은 조금 더 힘든 수련이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사부님." 준하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려다, 문득 멈춰 섰다. "사부님, 진뢰 어르신께서는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청하란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등불의 불꽃이 흔들렸다. "...별일 아니다. 가서 쉬거라." 그 말투에는 준하가 처음 듣는 종류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준하는 더 묻지 않고 방으로 돌아가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유독 흐릿한 밤이었다.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고, 달빛조차 제대로 비치지 않았다. '아버지는 지금쯤 무얼 하고 계실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시렸다. 채워지지 않는 자리가 있었다. 아버지의 자리였다. 여덟 살 때였던가,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검을 봐주었던 것이. 그 후로 아버지의 손길은 기억 속에서만 남아 있었다. 방에 들어온 준하는 이부자리에 누웠지만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천장을 바라보며 진뢰의 표정을 곱씹었다. 웃고 있었지만 웃는 것 같지 않던 그 얼굴을. '단순히 지나가는 길이라 했는데, 왜 그리 오래 사부님과 이야기를 나누신 걸까.' 생각이 꼬리를 물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날 밤, 준하는 잠에 들지 못했다. 창밖으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이 늦은 시각에, 그것도 다급하게 계곡으로 들어오는 발소리였다. 투두둑- 투두둑- 말발굽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었다. 준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로 다가섰다. 어둠 속에서 횃불 몇 개가 흔들리며 계곡 입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이 시각에, 이렇게 다급하게...' 심장이 이유 없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첫 화입니다 목록 다음화 ›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