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다정했던 살인귀

2화

말발굽 소리는 수련장 앞마당에서 멈췄다.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다. 이런 시간에 손님이 찾아올 일은 없었다. 준하는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말은 거품을 물고 있었다. 오래 달려온 말이라는 뜻이었다. 말에서 내린 사내는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무림맹 소속임을 알리는 깃발이 그의 등에 매여 있었다. 옷자락은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고, 신발은 한쪽이 벗겨져 있었다. 그만큼 급하게 달려왔다는 뜻이었다. "청하란 대협을 뵙고자 왔습니다!" 사내의 목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목이 마르고 지쳐서 나오는 소리였다. 청하란이 문을 열고 나섰다. 도포도 갖추지 못한 채였다. 자고 있다가 나온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그녀의 눈빛은 이미 날카롭게 서 있었다. "이 시각에 무슨 일이냐." "서무천 대협께서... 서무천 대협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순간 마당이 정적에 잠겼다. 바람 소리조차 멈춘 듯했다. 준하는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방금 들은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한 번 더 되뇌어도 뜻이 바뀌지 않았다. "자세히 말하라." 청하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북방 흑풍곡 인근에서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습니다." 사내는 말을 마치고서도 시선을 바닥에 두었다. 차마 청하란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이었다. 준하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벽을 짚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주저앉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아버지라면 그렇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천은 강한 사람이다.' 낮에 사부님이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불과 반나절 전에 들은 말이었다. 그 말이 지금 이 순간, 얼마나 공허하게 들리는지. 방문 밖으로 나가려는데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준하는 억지로 발을 뗐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자식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청하란이 준하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도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준하야..." "가겠습니다." 준하가 말을 끊었다.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습니다." 청하란은 잠시 준하를 바라보았다. 만류할 말을 고르는 눈치였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해라. 밤을 새워 달려야 할 것이다." "예." 준하의 대답은 짧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랬다. +++ 흑풍곡까지는 사흘 길이었다. 청하란과 진뢰가 동행했다. 셋은 밤낮없이 말을 달렸다. 첫날 밤, 준하는 말 위에서 몇 번이나 균형을 잃었다. 잠을 이루지 못한 탓이었다. 눈을 감으면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고, 눈을 뜨면 그 얼굴이 훼손된 시신으로 바뀌어 보였다. 진뢰가 옆에서 말없이 준하의 고삐를 잡아주었다. 위로의 말은 없었다. 다만 그의 손길에서 준하는 작은 온기를 느꼈다. 둘째 날, 청하란이 잠깐 쉬는 틈에 준하에게 물었다. "먹었느냐." "...괜찮습니다." "먹어야 한다. 몸이 상하면 아버지를 볼 힘도 없어진다." 준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손에 든 육포를 씹는 시늉만 했다.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준하는 그 사흘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말 위에서 흔들리며 그는 계속 같은 생각만 되풀이했다. '착오일 것이다. 아버지는 전설급 강자다. 그런 분이 이렇게 쉽게 돌아가실 리 없다.' 그 생각은 사흘 내내 조금씩 힘을 잃어갔다. 처음에는 확신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스스로에게 하는 위로가 되어갔다. '제발, 착오이길.' 그러나 흑풍곡에 도착한 순간, 그 기대는 산산조각 났다. 멀리서부터 무림맹 인사들의 깃발이 보였다. 그 숫자가 예상보다 많았다. 단순한 실종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시신은 임시로 마련된 천막 안에 안치되어 있었다. 무림맹 인사 몇몇이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무심했다. 서무천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아는 자들의 얼굴이 아니었다. "들어가시겠소?" 무림맹 조사관이 물었다. 그의 어조에는 사무적인 무심함만이 담겨 있었다. 청하란이 먼저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녀조차 감당하기 힘든 광경이라는 뜻이었다. 준하는 천막 앞에서 잠시 멈췄다. 발이 떼어지지 않았다. 심장이 유난히 크게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봐야 한다. 아버지의 마지막을 눈에 담아야 한다.' 그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시신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얼굴은 무언가에 짓뭉개진 듯했고, 몸통에는 검붉은 자국이 격자무늬처럼 새겨져 있었다. 단순한 외상이 아니었다. 마치 안에서부터 무언가가 뜯어져 나간 것 같은 상흔이었다. 준하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눈앞의 광경이 현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몇 번이고 눈을 감았다 떠보았지만 시신은 그대로였다. 한참 만에야 그는 시신의 손목에 남은 흉터를 확인했다. 어릴 적 아버지가 자신을 구하다 얻었다던 그 흉터였다. 틀림없었다. 이것은 아버지의 시신이었다. 그 흉터를 처음 봤을 때, 아버지는 웃으며 말했었다. "별거 아니다. 널 구한 값으로는 싸지." 그 말을 들으며 어린 준하는 아버지의 손목을 붙잡고 울었었다. 지금은 그때와 달리 눈물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눈물이 흘렀다. 처음에는 참을 수 없이 흘렀지만, 곧 점차 말라서 더는 흐르지 않았다. 몸이 눈물조차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지쳐 있었다. 청하란이 옆에서 준하의 어깨를 짚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순간에는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흠, 서무천 정도 되는 자가 이런 몰골이라니." 천막 밖에서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딱이구먼." 다른 목소리가 낄낄거리며 맞장구쳤다. "그러게. 전설이라 불리던 자도 이렇게 끝나는군." 준하의 몸이 움찔했다. 그들은 준하가 안에 있다는 것을 몰랐던 걸까. 아니, 알면서도 개의치 않는 것이었다. 무림맹 조사관들에게 서무천의 죽음은 그저 흥미로운 소문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이렇게 돌아가셨는데, 저들에게는 그저 웃음거리인가.' 주먹을 쥔 손끝이 하얗게 변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준하는 천막 밖으로 나섰다.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지만, 표정만은 애써 담담했다. 그 담담함이 얼마나 큰 인내로 만들어진 것인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다. "조사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준하가 조사관에게 물었다. "응? 아, 자네가 서무천의 아들인가." 조사관이 준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 시선에는 존중이라곤 없었다. "아직 애송이로군. 걱정 말게. 우리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애송이라는 말이 준하의 귓가에 오래 남았다. 아버지를 잃은 자식 앞에서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것 자체가, 이들이 서무천의 죽음을 얼마나 가볍게 여기는지 보여주는 것이었다.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 범인은 밝혀졌습니까." "허허, 성미도 급하구나. 이런 일은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조사관의 웃음에는 준하의 물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준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려는 손짓까지 했다. 준하가 한 발 물러서지 않았다면 그 손이 어깨에 닿았을 것이다. "시신의 상흔을 보셨습니까. 사람의 손으로 낸 상처가 아니었습니다." "그것도 조사 중이라 하지 않았나. 젊은 사람이 답답하게 왜 그러나." 조사관의 말투에는 짜증마저 섞여 있었다. 이 자리가 얼마나 귀찮은지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청하란이 천막에서 나오며 그 대화를 들었다. 그녀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이 일, 제대로 조사하지 않으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청하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그 안에 실린 무게가 조사관의 얼굴빛을 바꿔놓았다. "청하란 대협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참고는 하겠습니다만..." 조사관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그 웃음 뒤에 숨은 표정은 여전히 심드렁했다. 형식적인 대답일 뿐, 진심으로 사건을 파헤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준하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이를 악물었다. 스승의 이름 석 자에도 저들은 건성으로 답할 뿐이었다. '저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제대로 밝힐 생각이 없다.' 무림맹이라는 이름이 준하에게는 더 이상 신뢰의 대상이 아니었다. 정의를 수호한다는 그 거대한 조직이, 정작 한 사람의 억울한 죽음 앞에서는 이토록 무기력하고 무책임했다. 그 순간 준하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갈라지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멀리서 밤바람이 불어왔다. 천막의 천이 흔들리는 소리가, 마치 무언가를 경고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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