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혈월 아래 저문 사랑

1화

혼인식을 사흘 앞둔 밤이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사흘 뒤면 열여섯 평생 처음으로 남의 아내, 아니, 서연의 짝이 되는 몸이 되는 건데 잠이 오면 그게 더 이상한 거였다. '이 나이에 혼인이라니.' 물론 세 살 때부터 정해진 일이었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는 약속이었다. 그래도 사흘 앞두고 잠이 잘 온다는 건 좀 무신경한 인간이나 가능한 일이었고, 나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무신경한 인간은 아니었다. 그래서 정원을 걸었다. 밤바람이 서늘했다. 발밑에서 자갈 부딪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고, 나는 몇 번이나 걸음을 늦췄다가 다시 빨리 걸었다. 마음이 붕 떠 있었다. 그러다 서연의 처소 쪽에서 흔들리는 불빛을 봤다. '이 시간에 안 자고 뭐 하나.' 시각을 가늠해보니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서연은 낮에 활을 배우고 저녁엔 예법 수업을 듣는 사람이었다. 잠들지 않고 버틸 체력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서연은 대진황제 서태윤의 딸이었다. 나이는 나와 같은 열여섯. 세 살 때 어른들끼리 정한 혼약으로 나와 짝이 됐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그 약속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솔직히 세 살 때 뭘 알았겠나. 그냥 어른들이 그러라니까 그런 줄 알고 살아온 거지. 그런데 크면서 보니까 서연은 그냥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성격도 곧고 활도 잘 쏘고 말도 조리 있게 하는, 어디 내놔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랑 혼인한다는 게 솔직히 운이 좋았다는 생각을 나는 자주 했다. 창호지에 비친 그림자가 이상하게 흔들렸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처음엔 그냥 서연이 뒤척이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계속 들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싫어…… 하지 마……." 서연의 목소리였다. 잠꼬대치고는 너무 또렷했다. '악몽인가.' 원래 나 같으면 이럴 때 그냥 지나쳤을 거다. 남의 방에, 그것도 여자 혼자 자는 방에 함부로 들어가는 건 예법에도 어긋나고 말이 나오면 서연 쪽만 곤란해질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목소리가 너무 절박했다. 저건 그냥 잠꼬대가 아니었다. 나는 예를 갖출 새도 없이 문을 두드렸다. "서연아. 나야, 하율이야." 대답이 없었다. "서연아." 역시 대답이 없었다. 두 번, 세 번. 이쯤에서는 이미 예법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결국 문을 열었다. 방 안은 등불 하나만 켜져 있어서 어두웠다. 그 불빛 아래 서연이 이불을 움켜쥔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마에 흐른 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려 베개를 적시고 있었다. 눈을 뜬 채였다. 그런데 그 눈이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뭔가 다른 걸 보는 눈이었다. 초점이 나를, 아니 이 방 자체를 지나쳐서 어딘가 먼 곳, 어쩌면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곳을 응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게 뭐야.' 등골이 서늘해졌다. 나는 서연에게 다가가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서연아." 내가 부르자 그제야 초점이 돌아왔다. 눈동자가 몇 번 깜빡이더니, 방 안을 훑고, 마지막으로 나를 봤다. "……하율?"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방금 십 리를 뛰어온 사람처럼. "괜찮아? 무슨 꿈을 꿨어." 서연은 대답 대신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 손을 보다가, 서연이 손을 몇 번이나 뒤집어보는 걸 지켜봤다. 마치 손에 뭐가 묻어 있나 확인하는 사람처럼. "피 냄새가 났어." "뭐?" "내 손에서, 다른 사람들 피 냄새가 났어. 근데 그게…… 내가 흘리게 한 거였어." '뭔 소리야, 무섭게.' 말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나는 겉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 서연의 손을 잡았다. 손이 차가웠다. 이 밤에 저 정도로 손이 차가울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악몽이야. 사흘만 지나면 다 잊어버릴 거야." 내가 그렇게 말하는데도 서연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나는 조금 더 힘줘서 손을 감쌌다. "세 번째야." 서연이 낮게 말했다. "세 번째?" "같은 꿈을 벌써 세 번째 꿔." 나는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서연의 손을 더 세게 쥐었다. 등 뒤로 서늘한 게 지나갔다. 마혼월. 그 단어가 머릿속에서 저절로 떠올랐다. 이 세계에는 열두 해마다 한 번, 달이 핏빛으로 물드는 밤이 온다는 전설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걸 마혼월이라 불렀고, 실제로 그날 밤 사고나 재난이 유독 잦았다는 기록도 있었다. 마을 어른들 말로는 짐승들이 밤새 울부짖고 개들이 집을 뛰쳐나가고, 심지어 잘 자던 아이들이 갑자기 열병을 앓았다는 얘기까지 전해졌다. 다만 그건 옛날 얘기였다. 요즘 세상에 그런 걸 진짜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나도 그런 사람이었다. 어릴 때 유모가 들려주던 옛날이야기 취급으로 넘겼고, 크면서는 아예 잊고 살았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단어가 왜 이렇게 선명하게 떠오르는지 나조차 이해가 안 갔다. 혼인식이 바로 그 마혼월 날짜에 맞춰져 있다는 걸 안 건 얼마 전이었다. 관상감에서 날짜를 정할 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건지, 아니면 알고도 무시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 날짜가 하필이면 열두 해에 한 번 오는 그 밤이었다. 아버지는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오히려 좋은 날이라고 했다. "길일 중의 길일이다. 온 나라가 지켜보는 밤에 혼인을 올리는 거야." 그때는 그냥 아버지 말이 맞겠지 생각했다. 아버지가 뭘 모르고 하는 말은 아닐 테니까. 그런데 지금, 서연의 저 눈빛을 보고 있자니 그 확신이 조금씩 흔들렸다. "내가 지켜줄게." 말이 먼저 나가고 나서야 스스로도 조금 놀랐다. '지켜준다니, 뭘 지켜준다는 건지도 모르면서.'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했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냥 서연의 얼굴이 너무 불안해 보여서, 뭐라도 말을 해줘야 할 것 같아서 나온 말이었다. 그런데 뱉고 나니까 이상하게 진심이 됐다. 진짜로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은 이상한 자신감이 들었다. 하지만 서연의 손을 잡은 손을 놓지는 않았다. 놓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꿈에서, 네가 죽었어." 서연이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내가 널 죽였어, 하율."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웃었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안 그러면 이 분위기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랐으니까. "그런 꿈은 그냥 개꿈이야."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창밖의 달을 올려다봤다. 아직은 평범한 은빛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밤하늘에 걸린 달은 그냥 평범한 보름달, 딱 그 정도였다. 사흘 뒤에도 그럴 거라고, 나는 별 근거 없이 믿었다. '제발 그래야 하는데.' 서연은 그제야 조금 안심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눈을 감기 전, 나를 한 번 더 쳐다보긴 했는데, 그 눈빛에 여전히 뭔가 남아있는 걸 나는 못 본 척했다. 못 본 척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새벽이 올 때까지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불을 다시 덮어주고, 손을 잡은 채로 옆에 앉아 있었다. 시녀들이 알면 큰 소란이 날 일이었지만, 그 시간엔 아무도 그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새벽 공기가 창호지를 스며들어오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조용한 시간이었다. 서연의 숨소리가 점점 안정을 찾아가는 걸 들으면서, 나는 계속 창밖을 봤다. 창밖의 달이 이상하게 붉어 보인다는 느낌이 자꾸 들었지만, 그건 그저 내 눈이 지친 탓이라고 생각했다. 밤을 새우면 눈이 침침해지고 색이 이상하게 보이는 건 흔한 일이었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날 밤, 나는 몰랐다. 서연의 꿈이 예지였다는 걸. 그리고 그 예지가 아주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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