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3화. 시험장의 그늘
향시 날짜는 보름 뒤로 정해졌다.
등록 마감이 사흘 남았다는 말에 동수와 나는 그날로 관아를 찾았다.
새벽부터 서둘렀다. 동이 트기도 전에 짐을 챙기고 길을 나섰다. 관아까지는 걸어서 한 시진 거리였다.
동수가 앞장서서 걸었다. 나는 그 뒤를 따랐다.
몸이 무거웠다. 아직 온전히 회복되지 않은 몸이었다. 그러나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관아 앞은 이미 사람으로 가득했다.
붓을 든 서생들, 아들을 배웅하는 부모들, 등록부를 놓고 다투는 소리들.
누군가는 붓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누군가는 옷매를 고치며 초조한 얼굴로 순서를 기다렸다. 늙은 아버지 하나는 아들의 등을 두드리며 낮게 무언가를 되뇌고 있었다.
그 틈으로 밀려드는 열기가 있었다. 기대와 불안이 섞인 냄새였다.
나는 그 틈에서 이름을 적어냈다.
조이현. 열여섯. 몰락한 조가의 후손.
붓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먹물이 종이 위로 스며드는 순간, 숨을 삼켰다.
호적을 확인하던 관리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시선이 종이 위 이름에서 내 얼굴로, 다시 이름으로 오갔다.
"조가라 하면… 그 조가 말이오?"
목소리에 의아함이 섞여 있었다. 오래된 이름을 다시 마주한 자의 표정이었다.
"예."
짧게 답했다.
관리는 더 묻지 않았다. 그저 도장을 찍었다.
붉은 인주가 종이 위에 눌려 찍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동수도 같은 절차를 밟았다.
박동수. 열여섯. 조가의 시종.
관리가 잠시 붓을 멈췄다.
붓끝이 종이 위에서 머뭇거렸다.
"시종이 응시하는 경우는 드문데."
관리의 눈이 동수를 위아래로 훑었다. 의심과 놀라움이 섞인 눈이었다.
"규정에 금지 조항은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동수가 답했다. 목소리가 떨렸지만 말은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 옆에서 동수의 손을 보았다. 주먹을 쥐고 있었다. 손등에 힘줄이 섰다.
관리는 결국 도장을 찍었다.
두 개의 이름이 향시 응시자 명부에 나란히 올랐다.
명부에서 두 이름이 나란히 적힌 것을 보는 순간, 가슴이 뜨거워졌다.
전생에서는 이름을 남기는 것이 당연했다. 이번에는 이름을 남기는 것부터 싸움이었다.
관아를 나서며 동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 정말로 도장을 찍어줄지 몰랐습니다."
"규정을 지키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
"이유가 없어도 사람들은 이유를 만들어내지 않습니까."
동수의 말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맞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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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당일, 향시장은 새벽부터 인파로 붐볐다.
큰 마당에 줄지어 놓인 책상들, 붉은 깃발이 꽂힌 시험관의 자리, 그리고 그 사이를 오가는 감시관들.
책상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응시자들은 그 번호를 확인하며 자리를 찾아 헤맸다.
공기가 차가웠다. 새벽 서리가 아직 마당 구석에 남아 있었다.
나는 몸을 낮추고 그 안으로 들어섰다.
숨이 찼다. 걸음이 무거웠다.
가슴 한쪽이 답답했다. 오랜만에 걷는 먼 길이었고, 아직 회복되지 않은 몸이었다.
동수가 곁에서 나를 부축했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괜찮지 않았다. 그러나 말했다.
전생에서는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몸이 늘 온전했다. 이번에는 매 걸음이 시험이었다.
마당 한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길을 비켜라!"
요란한 목소리였다.
사람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마치 물살이 갈라지듯이.
비단옷을 걸친 소년이 걸어오고 있었다. 뒤로는 하인 셋이 따르고 있었다.
옷자락이 걸을 때마다 화려하게 흔들렸다. 값을 매길 수 없는 비단이었다.
진태욱이었다.
나이는 열아홉, 이번이 네 번째 응시라 들었다. 눈빛에 오만함이 가득했다.
그의 걸음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마치 그 마당 전체가 자신의 것이라는 듯한 걸음이었다.
그의 시선이 나에게 닿았다.
시선이 멈췄다. 눈이 가늘어졌다.
"어이, 조이현."
낮은 목소리에 조롱이 섞여 있었다.
"조가의 마지막 남은 씨앗이 향시를 보러 왔단 말이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붓을 만지던 손들이 멈추고, 걸음을 옮기던 발들이 멈췄다. 모두의 눈이 우리 쪽으로 향했다.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숨을 한 번 삼켰다. 등줄기가 서늘했다.
"이름을 아시니 반갑습니다."
담담히 말했다.
진태욱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반가워? 네놈 가문이 우리 가문에 진 빚이 얼마인 줄 아느냐."
"압니다."
"그런데도 여기 서 있어?"
목소리가 커졌다. 하인들의 눈에도 비웃음이 어렸다.
"시험장에 빚을 심사하는 규정은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장내가 조용해졌다.
바람 한 줄기가 마당을 지나갔다.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진태욱의 얼굴이 붉어졌다.
목덜미까지 붉게 달아올랐다. 손이 허리춤을 향해 움직이다 멈췄다.
"이놈이…"
"진 공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가벼운 걸음,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였다.
돌아보니 열넷 정도의 소년이 서 있었다. 옷차림은 단정했으나 웃음이 방자했다.
눈매가 유독 밝았다. 웃고 있어도 무언가를 재는 눈이었다.
"시험 시작 전에 다투다 감시관 눈에 들면 자네만 손해일세."
풍중루였다.
나는 그를 처음 보았지만, 이미 이름은 들어 알고 있었다.
열넷의 신동, 수재라 불리는 아이.
그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저 소문이라 여겼다. 실제로 마주하니 소문 이상의 무게가 있었다.
진태욱이 그를 노려보았다.
"네가 낄 일이 아니다."
"낄 일이 맞지. 나도 이 시험장에서 조용히 붓을 놀리고 싶으니까."
풍중루가 하품을 하듯 말했다.
말투에 긴장이 없었다. 마치 이런 일에 익숙한 듯한 태도였다.
진태욱은 이를 갈았다. 그러나 물러섰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듯 걸음을 물렸다.
"오늘은 넘어가주지. 시험장 안에서는."
그가 나를 노려보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눈에 살기가 서렸다.
"시험이 끝나면 각오해라."
그는 걸음을 옮겨 사라졌다.
하인들이 그 뒤를 따랐다. 옷자락이 다시 화려하게 흔들리며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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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중루가 나를 돌아보았다.
"이름이 뭔가?"
"조이현입니다."
"조이현이라… 조가의 후손이라고 했지. 몰락한 명문 말이야."
그의 눈에 흥미가 어렸다.
눈동자가 반짝였다. 흥미를 감추지 않는 얼굴이었다.
"몰락한 가문의 자제가 진태욱한테 저렇게 또박또박 말을 받아치는 건 처음 봤네."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게 어려운 거야."
풍중루가 웃었다. 웃음에 그늘이 없었다.
주변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웃음이었다.
"보통은 사실을 말하는 게 두려워서 입을 다물지. 자네는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더군."
"두렵지 않았다고는 못 하겠습니다."
"그런데도 말했다는 거잖아."
그 말에 나는 답하지 않았다.
"나는 풍중루다. 자네 이름 기억해두지."
그는 손을 들어 인사하고는 다른 응시자들 쪽으로 걸어갔다.
걸음이 가벼웠다. 마치 방금 있었던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태도였다.
멀리서 또 다른 소년이 걸어오고 있었다.
반듯한 자세, 흐트러짐 없는 걸음, 차가운 눈빛.
걸음마다 절도가 있었다. 마치 정해진 법도를 따르듯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교거정이었다.
그는 나를 스쳐 지나가며 짧게 시선을 던졌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시선은 짧았지만 얕지 않았다.
다만 그 눈빛이 오래 남았다.
무언가를 가늠하는 눈이었다.
마치 저울 위에 나를 올려놓고 무게를 재는 듯한 눈이었다. 나는 그 눈을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동수가 내 곁에 다가와 낮게 물었다.
"형님, 저 두 분이 그 유명한…"
목소리에 긴장이 섞여 있었다.
"그래."
"풍중루와 교거정. 나이는 어리지만 이미 서원 수재라 불린다고 들었습니다."
동수의 눈이 그들의 뒷모습을 좇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에서는 신동이라는 말이 우습게 들렸다. 이번에는 그 말의 무게를 다시 느꼈다.
전생의 나는 그런 이름들을 가볍게 넘겼다. 스스로가 그 이상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의 나는 그 이름들을 마주할 때마다 등이 서늘해졌다.
북소리가 울렸다.
낮고 무거운 소리였다. 마당 전체를 울리는 소리였다.
시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응시자들이 하나둘 자리로 이동했다.
붓통을 챙기고, 벼루를 안고, 저마다의 번호를 찾아 흩어졌다.
동수가 내 어깨를 짧게 두드렸다.
"형님, 힘내십시오."
"너도."
우리는 각자의 자리를 향해 갈라졌다.
나는 옥패를 품 안에서 한 번 더 만져보았다.
차가웠다. 그리고 이상하게,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평소와 달랐다. 마치 그 안에서 무언가가 숨을 쉬는 듯한 떨림이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그때는 알지 못했다.
자리에 앉아 붓을 꺼내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옥패의 냉기가 옷 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감시관이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오고 있었다. 시험지가 곧 나눠질 참이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옥패를 다시 품 깊이 밀어 넣었다.
무엇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아직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