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금지된 각성, 나는 살아남았다

1화

회의실 조명이 유난히 하얗다. 백열등도 아닌데 눈이 시릴 정도로 밝았다. 이 방에 들어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할아버지는 조명 밝기까지 계급으로 관리하는 사람 같다.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그 아래서 울렸다. "청람성 탐사대 명단을 발표하겠다." 임은표. 백열두 살. 퇴역 중장이라는 직함은 이제 껍데기지만, 목소리만큼은 여전히 부대를 지휘하던 그 시절 같다. 등을 곧게 세운 자세, 손끝으로 화면을 넘기는 동작 하나하나가 훈련된 군인의 습관이다. 나는 벽 쪽 의자에 앉아 화면을 올려다봤다.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기대인지 불안인지 구분이 안 갔다. 임기웅. 임기범. 정배민. 고연승. 최지훈. 다섯 번 이름이 불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숫자를 셀 때마다 목 안쪽이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내 이름은 없었다. "할아버지." 손을 들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저는요?" 할아버지가 나를 봤다. 그 눈빛에 이미 대답이 담겨 있었다. 오래 알던 사람이라 그런지, 저 표정만 보면 다음에 나올 말을 예상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게 늘 마음에 안 들었다. "넌 안 간다." "왜요." "미진화 상태다. 청람성은 아직 대기 조성도 완전히 확인되지 않았어. 위험 등급이 미확정이다." "그래서 안 데려간다는 거예요? 열여섯 살이면 이제 진화 접종 대상 아니에요?" "접종은 다음 정기 검진에서 한다. 지금은 아니야." 딱 잘라 말한다. 회의는 끝났다는 뜻이다. 나는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이 사람 앞에서는 말을 얹을수록 얹히는 쪽이 나였다. 형들이 나를 힐끔거렸다. 큰형 기웅이 어깨를 툭 쳤다. "막내는 집 지켜. 우리가 재밌는 거 다 보고 올게." 웃으면서 하는 말인데, 나한텐 웃기지가 않았다. "재밌는 거 보러 가는 거 아니잖아. 탐사대잖아." "그게 그거지." 기웅이 눈을 찡긋했다. 저 형은 뭐든 가볍게 넘기는 재주가 있다. 나쁜 뜻은 없다는 걸 알아서 더 짜증이 났다. 둘째형 기범은 아무 말 없이 그냥 지나쳤다. 원래 그런 사람이다. 나한테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관심을 표현하는 방식이 없는 거다. 그것도 알지만, 알아도 서운한 건 서운했다. 나는 회의실을 나왔다. 복도가 길게 뻗어 있었다.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저벅, 저벅. 발소리 사이로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진화 단계. 인간의 신체를 재설계하는 물질, K14. 접종받은 순서대로 단계가 오른다. 할아버지는 11단계, 할머니는 9단계, 형들은 각각 3단계. 나는 0단계다. 그냥 사람. 그냥 열여섯 살. 분한 게 아니다. 무섭지도 않다. 그냥 빼놓인 게 싫었다. 복도 끝에 서서 창밖을 봤다. 격납고 조명이 멀리서 깜빡였다. 저 안에 함선이 있다. 내일 아침이면 저게 하늘로 뜬다. 나만 빼고. 발을 돌렸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외삼촌의 작업실 문을 두드렸다. 정진호. 열아홉. 할머니 쪽 친척이지만 나랑 나이 차가 크지 않아서 그런지 제일 편한 사람이다. 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나를 애 취급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왔냐." 그는 고개도 안 들고 대답했다. 손끝에서 스파크가 튄다. 작업대 위에 반쯤 조립된 슈트 팔뚝이 놓여 있었다. 회로가 노출된 부분에서 파란빛이 규칙적으로 깜빡였다. "삼촌, 나 빼놓고 다 청람성 간대." "알아. 나도 못 가." 그가 픽 웃었다. "진화 1단계는 낄 자리도 없나 봐." "그거 위로야?" "아니, 그냥 사실." 나는 작업대에 걸터앉았다.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찼다. 작업실 특유의 냄새, 금속과 기름이 섞인 냄새가 코끝에 감겼다. "몰래 따라가고 싶어." 말해놓고 나도 놀랐다. 생각만 하던 건데 입 밖으로 나와버렸다. 정진호가 손을 멈췄다. 나를 봤다. 그 순간 작업실 안의 스파크 소리도 잠깐 멈춘 것 같았다. "진심이야?" "진심이야." "걸리면 할아버지가 널 우주 밖으로 던질걸." "안 걸리면 되지." "근거 있는 자신감이냐, 아니면 그냥 화나서 하는 말이냐." "둘 다." 그가 한참 나를 보다가 짧게 웃었다. 어이없다는 웃음이 아니라, 뭔가 결심을 굳히는 사람의 웃음이었다. "솔직히 말해봐. 왜 그렇게까지 가고 싶은데." "몰라. 그냥— 다들 뭘 발견하고 오는데 나는 여기서 그냥 기다리고만 있어야 하는 게 싫어. 형들도 진화 3단계짜리라고 다 대단한 것처럼 구는데, 나는 그냥 숫자 0으로 취급받고." "그게 다야?" "그리고 할아버지가 나를 안 보는 것 같은 게 싫어. 위험하다, 미진화다, 그런 이유 다 대는데 사실은 그냥— 신경 안 쓰는 거잖아." 말하고 나니까 속이 좀 후련했다. 동시에 창피하기도 했다. 정진호는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작업대 아래 서랍을 열었다. 검은 슈트 한 벌과 손목형 단말기를 꺼냈다. "이거 아직 정식 승인 안 난 시제품이야. 열감지 회피, 신호 스텔스, 그리고—" 그가 단말기를 켰다. 화면에 낯선 코드가 흘렀다. "암호 해독 보조 모듈. 네가 좋아할 거 같아서 만들어봤다." [프로토타입 슈트 - 은신 모드 / 해독 보조 모듈 활성화 가능] 짧은 고지문이 손목 화면에 떴다. 나는 숨을 삼켰다. "이거 나 주는 거야?" "빌려주는 거야. 대신 살아서 돌려줘." 농담처럼 던진 말인데,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슈트 사이즈는 맞을 거야. 네 체형 재놓은 거 있었거든." "언제 재놨어?" "그런 건 묻지 말고. 대신 하나만 약속해." "뭔데." "들키면 무조건 내 이름 대지 마. 그냥 네가 훔쳤다고 해." "그게 약속이야?" "응. 나 아직 여기서 할 일 많거든." 나는 웃었다. 웃을 상황이 아닌데도 웃음이 나왔다. "삼촌." "응." "나 왜 이렇게 빼놓기만 하는 걸까. 진화도 안 됐다는 이유로." 정진호가 잠깐 침묵했다. 손끝의 스파크가 완전히 멈췄다. "그거 네가 증명하면 되는 거야. 진화가 아니라 실력으로." 짧은 말이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그는 슈트와 단말기를 내 손에 쥐여주고는 다시 작업대로 몸을 돌렸다. "가서 죽지 마. 그거 하나만 지켜." "안 죽어." "장담하지 마. 장담하는 놈들이 제일 먼저 죽더라." 불길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게 이 사람다웠다. 함선 출항 시각은 다음 날 아침. 화물칸 적재 목록에는 탐사 장비, 보급품, 그리고 예비 슈트 케이스 몇 개가 있었다. 새벽 격납고는 인적이 드물었다. 정비병들이 오가는 틈을 타서 화물칸 쪽으로 몸을 붙였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것 같았다. 슈트를 입자 몸이 서늘해졌다. 은신 모드를 켜자 손목 단말기가 짧게 진동했다. [은신 모드 활성화] 표시가 뜨고 사라졌다. 나는 그 케이스 중 하나에 몸을 접어 넣었다. 숨이 막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케이스 안은 좁고 어두웠다. 등에 닿는 금속 벽이 차가웠다. 숨을 크게 쉬면 소리가 날까 봐 코로만 얕게 숨을 쉬었다. 격납고 스피커에서 출항 안내 방송이 흘렀다. "청람성 탐사대, 승선 인원 최종 확인 바랍니다." 목소리가 케이스 틈을 타고 들어왔다. 나는 몸을 더 웅크렸다. 케이스 틈으로 발소리가 지나갔다. 할아버지의 발소리였다. 저 사람이 이 근처에 있다는 것만으로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발소리가 멈췄다.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몇 초, 아니 몇 분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고 발소리가 다시 움직였다. 멀어졌다. 숨을 내쉬었다. 손끝이 떨렸다. [함선 이륙 준비 - 3분 전] 단말기 화면이 조용히 깜빡였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나는 눈을 감았다. 문 밖에서 격납고 조명이 붉게 바뀌는 게 케이스 틈으로 보였다. 엔진 진동이 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케이스 안까지 그 울림이 전해졌다. 이제 정말 시작이구나. 그리고 그 순간, 단말기 하단에 뜻 모를 신호 하나가 깜빡였다 사라졌다. 청람성 방향에서 온 신호였다. 짧고, 낯설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신호. 무슨 신호인지는, 그때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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