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숫자를 다시 확인했다.
1,247.
오타가 아니었다. 화면 모서리에서 작은 점 하나가 깜빡이며 갱신 중임을 알렸다. 신호는 실시간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숫자는 눈을 깜빡이는 사이에도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나는 손목 단말기를 움켜쥔 채로 캠프 외곽 나무 그늘에 몸을 붙였다. 나무껍질이 등을 긁었다. 축축한 흙냄새와 풀 비린내가 코끝에 엉겼다.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혹시 저쪽까지 들리지 않을까 하는 어이없는 걱정마저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말해야 하나. 그러면 내가 몰래 따라온 게 들통난다. 할아버지가 그 얼굴로 나를 쳐다볼 걸 생각하면 벌써부터 속이 뒤틀렸다. 말 안 하면 저 사람들이 위험하다. 저 태블릿에 뜬 숫자가 뭘 의미하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좋은 신호가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둘 다 최악의 선택지였다. 셋째 선택지 같은 건 없었다. 있었으면 벌써 골랐겠지.
"기웅아, 저쪽 스캔 좀 도와줘."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와 다름없는, 낮고 담담한 톤이었다. 그게 오히려 더 무섭게 느껴졌다.
텐트 안 회의 테이블 주변에 사람들이 모였다. 나는 그 틈을 타 조금 더 가까이 붙었다. 나뭇가지 하나가 발밑에서 뚝, 소리를 냈다. 나는 그대로 숨을 멈췄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지하 신호가 계속 늘어나고 있어요. 처음엔 800대였는데 지금은 천이 넘어요."
할머니가 태블릿을 돌려 보였다. 화면 위로 빛나는 점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마치 밤하늘을 뒤집어놓은 것 같았다. 다만 저 점들은 별이 아니라, 뭔가 살아 있는 것들의 흔적이었다.
할아버지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었다. 나는 저 표정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언제나 여유롭게, 심지어 위험한 순간에도 농담을 섞던 사람이었다.
"움직이는 방향은?"
"불규칙해요. 그런데 최근 삼십 분 동안, 캠프 쪽으로 조금씩 모여드는 경향이 보여요."
고연승이 지팡이 겸용 총을 고쳐 잡았다. 손잡이를 쥐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했다.
"직감이 안 좋구먼."
"직감이 아니라 데이터가 안 좋은 거죠."
최지훈이 장비를 재점검하며 대꾸했다. 목소리는 무심했지만, 손은 이미 탄창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 순간, 땅이 울렸다.
쿠구구궁.
낮고 무거운 진동이 발밑을 타고 올라왔다. 나는 나무를 짚었던 손에 힘을 줬다. 껍질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나뭇잎이 흔들렸다. 새들 — 아니, 청람성의 저 초록빛 날개짐승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수십 마리, 아니 수백 마리는 될 법한 무리가 한꺼번에 날아오르며 하늘을 초록빛으로 물들였다. 저것들도 뭔가를 느낀 거다. 짐승들은 늘 사람보다 먼저 안다.
"지진인가?"
기웅이 균형을 잡으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도 평소의 여유가 사라져 있었다.
"지진파형이 아니에요."
할머니가 태블릿을 노려봤다. 화면 위로 파형 그래프가 규칙적으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이건... 발걸음이에요."
정적이 흘렀다. 바람 소리마저 잠깐 멈춘 것 같았다.
"발걸음."
할아버지가 그 말을 되뇌었다. 마치 그 단어가 입안에서 이상한 맛을 내는 것처럼.
"뭔가가 걷고 있다는 거요?"
"규칙적인 진동 간격, 지속적인 진행 방향. 생물의 보행 패턴과 일치해요."
할머니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평생 연구만 해온 사람이 저런 목소리를 내는 걸 처음 봤다. 늘 데이터 앞에서 침착하던 사람이었다. 그 침착함이 흔들리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게 실감 났다.
나는 숨을 죽인 채 나무 사이에 웅크렸다. 심장이 목까지 올라온 느낌이었다. 손끝이 저릴 정도로 단말기를 꽉 쥐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손목 단말기의 숫자가 다시 바뀌었다.
1,589.
계속 늘고 있다. 나는 숫자가 늘어나는 속도를 셈해봤다. 방금까지 342가 늘었다. 몇 분 사이에.
이게 뭐든, 하나둘 모여드는 게 아니라 떼로 몰려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말해야 하나.
또 그 질문으로 돌아왔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뛰어나가서 "숫자가 이만큼이나 늘었어요"라고 말한다면, 할아버지는 분명 먼저 물을 거다. 넌 여기서 뭐 하고 있냐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나는 갖고 있지 않았다.
"전원 무장."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짧고 단호했다.
캠프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웃음기 섞인 대화가 사라지고, 다들 각자 무기를 챙기는 손이 빨라졌다. 텐트 안에서 총기 손질 도구가 부딪치는 소리, 탄창 갈아 끼우는 철커덕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기범, 외곽 경계 서."
"네."
기범의 목소리가 짧게 대답하고 발소리가 멀어졌다. 나는 순간 몸이 굳었다. 외곽 경계라면, 지금 내가 숨어 있는 이 방향으로 올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더 깊이 몸을 숙였다. 나무 그늘이 조금이라도 더 넓어졌으면 싶었다.
"기웅, 함선 발화 준비해놔. 만약을 대비해서."
"알겠습니다."
최지훈과 고연승은 캠프 중앙에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익숙한 손놀림이었다. 삽처럼 생긴 도구로 흙을 파고, 그 위에 금속 막대를 박아 넣고, 케이블을 연결하는 동작이 마치 몇 번이나 연습한 것처럼 매끄러웠다. 이 사람들, 이런 순간을 처음 겪는 게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무섭다는 감정과, 저 안에 끼어들고 싶다는 감정이 동시에 들었다. 우습게도, 저기 서 있는 사람들 틈에 나도 서서 뭐라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그냥 나무 뒤에 숨은, 몰래 따라온 짐짝.
숨어 있는 게 맞는 선택일까.
다시 진동이 울렸다. 이번엔 더 크고, 더 가까웠다.
쿠구구궁.
한 번.
쿠구구궁.
두 번.
발밑의 흙이 잘게 튀는 게 보였다. 나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소리를 내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캠프 뒤편, 거대한 나무들이 늘어선 숲의 경계선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나뭇가지들이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서걱.
서걱.
마치 뭔가 거대한 것이 나무 사이를 헤치고 지나오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규칙적이었다. 마치 누군가 일정한 박자로 숲을 가르며 걸어오는 것 같은.
안개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서서히 형체를 드러냈다.
크다. 사람보다 최소 세 배는 큰 그림자였다. 윤곽만 봐도 어깨 부근의 넓이가 성인 남자 두어 명을 합친 것보다 더 커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또 하나. 또 하나.
숲의 경계선을 따라 그림자들이 줄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안개가 걷힐 때마다 새로운 형체가 하나씩 늘어났다. 처음엔 셋이었던 것이 다섯이 되고, 다섯이 여덟이 되었다.
할아버지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저게 다 하나의 개체군인가."
목소리에 처음으로 확신이 아니라 의문이 섞여 있었다. 저 사람이 저런 목소리를 내는 걸 나는 처음 들었다.
나는 나무 뒤에서 그 광경을 보며, 처음으로 진짜 두려움이라는 게 뭔지 알았다. 지금까지 겪었던 무서움들은 다 가짜였던 것처럼 느껴졌다. 이건 다른 종류의 감정이었다.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없다는 걸 몸으로 먼저 알아차리는 감각.
1,589에서 다시 숫자가 뛰었다.
2,003.
숫자가 뛰는 순간, 나는 저 그림자들의 숫자와 손목 단말기의 숫자가 결국 같은 걸 가리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저 숲 경계선에 서 있는 여덟 개의 그림자는, 시작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