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그로부터 반년이 지났다.
청류성의 겨울은 유난히 매웠다.
방 안에 스며드는 바람을 막으려고, 나는 종이 조각으로 벽 틈을 막는 작업을 매일 반복했다.
낡은 창호지는 손끝만 스쳐도 바스락거리며 부서졌다.
풀 대신 밥알을 짓이겨 붙였더니, 마르고 나면 누렇게 자국이 남았다.
방 안 벽은 그렇게 다닥다닥 붙인 종이 조각들로 얼룩덜룩한 지도처럼 변해 있었다.
"오늘은 그만해도 될 것 같은데." 윤채린이 내 방문 앞에서 말했다.
그녀는 어느새 내 방을 자기 방처럼 드나들고 있었다.
문지방에 걸터앉은 그녀의 발끝이 까딱거렸다.
"조금만 더 하고." 나는 종이를 붙이며 대답했다.
"이 틈 하나만 막으면 오늘 밤은 좀 나을 거야."
윤채린은 방바닥에 앉아 내가 일하는 걸 지켜보다가, 문득 물었다.
"그거, 요즘도 보여?" 그녀가 물었다.
"부호 말이야."
나는 손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가끔." 나는 대답했다.
"요즘은 훈련장 검에서도 보여."
"검에서?" 그녀의 눈이 커졌다.
"어. 오래된 검일수록 선이 더 선명해." 나는 설명했다.
"낡은 병장기 창고 안에 있는 검 하나는, 거의 손잡이 전체가 빛나 보일 정도야."
"손잡이 전체가?" 윤채린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 검, 나도 본 적 있어. 자루에 녹이 잔뜩 슬어서 아무도 안 쓰는 거잖아."
"맞아, 그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나한테는 그게 제일 밝게 보여."
윤채린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 진짜 특별한 거 같아." 그녀가 말했다.
나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특별하다는 말은, 0급 판정을 받은 이후로 처음 들어본 말이었다.
그 말이 가슴 어딘가에 걸려서, 나는 한참 동안 종이 붙이는 손을 멈추고 있었다.
'특별하다니.' 나는 생각했다.
'나한테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이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윤채린에게 어머니 이야기를 꺼냈다.
방 안의 유일한 등잔불이 흔들리며 그림자를 벽에 늘어뜨렸다.
"어머니는 내가 여덕 살 때 돌아가셨어." 나는 나무 상자 위의 수정 구슬을 꺼내 손에 쥐며 말했다.
"이건 어머니가 남긴 유일한 물건이야."
윤채린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구슬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등잔불이 작게 비쳤다.
"만져도 돼?" 그녀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구슬을 손에 올려놓자, 구슬 표면에 희미한 빛이 스쳤다.
나는 그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걸 느꼈다.
다른 사람이 만졌을 때 빛이 반응한 건 처음이었다.
"방금 이거 봤어?" 나는 놀라서 물었다.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커졌다.
"뭘?" 윤채린이 되물었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구슬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 빛이 나에게만 보이는 거라고 짐작하며, 일단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혹시라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가만히 있자. 지금은 그냥, 가만히.'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아버지는 나한테 별로 관심이 없었어."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측정에서 0급이 나왔을 때도, 아버지는 화도 내지 않았어. 그냥 실망한 얼굴로 나를 봤어."
그날 아버지의 표정이 아직도 눈앞에 선명했다.
말 한마디 없이 등을 돌리던 그 모습이.
"그게 더 무서운 거지." 윤채린이 말했다.
"화를 내는 건 그래도 관심이 있다는 거니까."
나는 그녀의 말에 오래 생각에 잠겼다.
등잔불이 한 번 크게 흔들렸다가 다시 잦아들었다.
"나는 계속, 언젠가 아버지가 나를 다시 봐줄 거라고 생각했어." 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성민이 입적된 날, 그 기대를 완전히 접었어."
그날 이후로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 한쪽이 서늘해지곤 했다.
"그래도 넌 살아있잖아." 윤채린이 내 손등 위에 자기 손을 올렸다.
"살아있으면, 아직 뭐든 될 수 있어."
나는 그녀의 손이 얹힌 자리에서 온기가 퍼지는 걸 느꼈다.
작고 마른 손이었는데도, 그 온도만큼은 유난히 따뜻했다.
오랫동안 아무도 나에게 그런 말을 해준 적이 없었다.
"고마워." 나는 짧게 말했다.
더 길게 말하면 목소리가 떨릴 것 같아서, 나는 거기서 말을 멈췄다.
그 순간의 온기는, 이후 3년 동안 내가 견뎌야 했던 모든 밤을 버티게 해준 작은 불씨가 되었다.
며칠 후.
청류성 관리인이 마당에 모든 유배자들을 불러 모았다.
새벽부터 눈이 내려 마당 바닥이 하얗게 덮여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얇은 옷깃을 여미며 관리인 앞에 줄지어 섰다.
"본가에서 소집령이 내려왔다." 관리인이 두루마리를 펴며 말했다.
두루마리 끝에는 붉은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이달 말, 가문 소집 행사가 열린다. 청류성에서도 대표로 몇 명이 참석해야 한다."
웅성거림이 마당에 퍼졌다.
누군가는 낮은 목소리로 "본가?"라고 되묻고, 누군가는 고개를 숙인 채 발끝만 내려다보았다.
반년 만에 처음 듣는 소식이었다.
"윤도현." 관리인이 내 이름을 불렀다.
"너도 명단에 있다."
나는 순간 몸이 굳었다.
발밑의 눈이 신발 안으로 스며드는 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반년 전, 그날 이후로 본가로 돌아가는 건 처음이었다.
"윤채린." 관리인이 다시 이름을 불렀다.
윤채린도 명단에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도 나와 같은 불안이 스쳐 지나갔다.
관리인이 계속 다른 이름들을 불렀지만, 나는 그 목소리가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 나는 생각했다.
'그곳에서, 성민을 다시 만나야 한다.'
눈발이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명단 낭독이 끝난 뒤에도, 나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