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떨어진 곳은 낯선 산기슭이었다.
하늘엔 처음 보는 달이 두 개 떠 있었고, 발밑에는 은빛으로 흔들리는 풀들이 무릎까지 자라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 풀들이 서로 부딪히며 짤랑거리는 소리를 냈는데, 마치 유리 조각을 흔드는 것 같았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성선 셋한테 쫓겨났다. 정확히는 '추방'이라는 표현을 썼다. 백두산에서 얼음 한 조각 주워 먹은 죄로 선계 구경이나 좀 해보려던 건데, 다짜고짜 이세계로 던져버렸다. 억울했지만 억울해할 시간도 안 줬다. 그중 강혁이라는 놈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네놈 같은 잡종이 감히 선계의 기운을 삼켰으니, 그 벌로 하계에서 썩거라.]
예스러운 말투로 사람을 하대하는 게 얼마나 기분 나쁜 일인지, 그때 처음 알았다. 잡종이라니. 태어나서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신선이랍시고 구름 위에 앉아 있던 놈들 입에서 나온 첫마디가 그거였다.
'억울해할 거 없다. 이 정도면 남는 장사 아니냐.'
뱃속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두산에서 먹은 그 얼음, 정확히는 천빙정이라 불리는 것의 목소리였다. 이놈은 내가 삼킨 순간부터 몸속에 들러붙어 살고 있었는데, 성격이 어찌나 능글맞은지 마치 오래 알던 친구처럼 말을 걸어왔다. 오래 알던 친구라기보다는, 세 들어 사는 주제에 집주인 행세를 하는 얹혀사는 놈 같았지만.
"뭐가 남는 장산데. 나는 지금 낯선 행성에 떨어졌다고."
"행성인지는 모르겠고, 세계다. 어쨌든."
"세계면 다행이고. 그래서 뭐가 남는 장사냐고."
'힘을 줬잖느냐. 이 몸이 없었으면 넌 그 성선 놈들 손에 진작 재가 됐을 텐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강혁이 시험 삼아 한 번 손을 휘둘렀을 때, 나는 죽는 줄 알았다. 손끝에서 뭔가 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는 걸 보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런데 몸속에서 뭔가 차가운 게 확 퍼지면서 그 충격을 다 흡수해버렸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더니 순식간에 정신이 돌아왔다. 그게 이 녀석, 천빙정의 힘이었다.
다만 공짜는 아니었다. 이놈은 틈만 나면 내 정신 한쪽을 갉아먹으려 들었다. 위험한 순간마다 힘을 빌려주는 대신, 조금씩 조금씩 나를 잠식하려는 게 느껴졌다. 가끔은 내 생각인지 이놈 생각인지 헷갈릴 때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녀석을 완전히 믿지도, 완전히 무시하지도 못하는 애매한 처지였다. 동업자라고 하기엔 너무 얄밉고, 원수라고 하기엔 목숨을 몇 번 구해준 게 있어서 딱 잘라 미워하기도 힘들었다.
일단 걸었다. 발이 푹푹 빠지는 풀숲을 헤치고 나가는데, 어디선가 짐승 울음소리 같은 게 들려서 심장이 덜컥했다. 다행히 그쪽으로는 가지 않아도 됐다. 산기슭을 벗어나니 흙길이 나왔고, 그 길을 따라 얼마쯤 걷자 마을이 보였다. 초가집 비슷한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고,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다행히 생긴 건 인간이었다. 팔다리 개수도 맞고, 눈도 두 개였다.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됐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좀 서글프지만.
말이 통하는 건 더 다행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건 천빙정이 슬쩍 손을 써준 덕이었다.
'말이라도 통해야 부려먹기 편하지 않겠느냐.'
부려먹는다는 표현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넘어갔다. 지금은 말이 통하는 게 우선이었다.
마을 어귀에서 처음 본 건 요정이었다. 팔뚝만 한 크기에 잠자리 날개를 단 녀석들이 무리 지어 날아다니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것들을 쫓아내려고 빗자루를 휘두르고 있었다. 짹짹거리는 소리를 내며 도망치는 모습이 귀엽다면 귀여웠는데, 정작 사람들 표정은 벌레 쫓듯이 사나웠다. 요정이 이렇게 하급 취급을 받는 세계라니. 판타지 소설에서 요정은 보통 신비롭고 고귀한 존재로 나오는데, 여긴 완전히 딴판이었다.
"저게 요정이라는 겁니까?"
지나가던 노인에게 물었다. 등이 굽고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었는데, 눈빛만은 또렷했다. 노인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혀를 찼다.
"객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지만, 저건 하급 정령이지 요정이 아니오. 먹을 걸 훔쳐가는 잡것들이라 우린 저것들을 파리 취급하지."
파리 취급받는 정령이라니, 여긴 신분제가 생물의 등급까지 나누는구나 싶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이 세계는 마수부터 정령, 인간, 그리고 그 위의 존재들까지 촘촘하게 등급이 매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꼭대기에 4대 가문이라는 게 있다는 것도 그때는 몰랐다. 알았으면 조금은 마음의 준비를 했을 텐데.
노인은 내 행색을 보더니 한마디 덧붙였다.
"객, 여관비는 있소? 없으면 여기서 밤 지새우기 힘들 텐데. 밤엔 저것들보다 더 독한 것들이 돌아다니오."
"더 독한 것들이요?"
"묻지 마시오. 알아서 좋을 거 없소."
말투가 하도 단정적이라 더 캐묻기가 무서웠다. 돈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이 세계 돈이 없었다. 한국 돈이야 지갑에 몇만 원 있었지만 여기서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신사임당 얼굴이 그려진 종이 쪼가리가 여기서도 값어치가 있을 리 없었다.
그 순간 천빙정이 다시 말을 걸었다.
'가슴을 만져보거라.'
"뭐?"
'가슴을 만져보라니까. 뭔가 걸리는 게 있을 게다.'
"이 상황에 그런 소리를 하는 게 정상이냐?"
'잔말 말고 만져보라니까.'
반신반의하며 가슴께를 더듬었더니 정말로 딱딱한 게 만져졌다. 처음엔 벌레라도 붙었나 싶어 소름이 돋았는데, 옷을 풀어보니 작은 보석 하나가 살갗에서 툭 튀어나와 있었다. 파랗고 투명한, 얼음처럼 차가운 보석이었다. 만지는 순간 손끝이 시릴 정도로 냉기가 돌았다.
"이게 뭔데?"
'선옥이다. 이 몸이 네 몸속에서 계속 만들어내는 것이지. 선계의 기운이 응축된 물건이니, 이 세계에서는 값을 매기기 힘들 정도로 귀할 게다.'
"그럼 진작 말을 해줬어야지! 아까부터 여관비 없어서 쫄고 있었잖아!"
'재미없게 왜 진작 알려주느냐. 이런 재미 하나쯤은 있어야지.'
"재미? 지금 내가 노숙할지 말지가 너한텐 재밌는 구경거리냐?"
'그렇다마다. 네 표정이 볼만하니라.'
어이가 없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이 녀석과는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계속 부딪힐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을 뿐이다. 나는 선옥을 손에 쥐고 노인에게 물었다.
"이 보석, 팔 수 있는 곳이 어디 있을까요?"
노인의 눈이 순식간에 커졌다. 지팡이를 짚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보일 정도였다.
"그, 그건... 잠깐, 잠깐만 기다리시오!"
노인은 지팡이를 놓칠 뻔하면서도 황급히 몸을 돌려 뛰어갔다. 나이 든 사람이 그렇게 빨리 뛰는 걸 처음 봤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살짝 불안해졌다. 이렇게까지 놀랄 만한 물건이었나.
그렇게 나는 청명대륙에서의 첫날을 이 보석 하나로 시작하게 됐다. 무한한 힘과 재화를 가진 주인공이라는데, 정작 숙박비 걱정부터 하고 있으니 이게 무슨 코미디인지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 있었다. 이 세계, 겉보기와 다르게 어딘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
노인이 헐레벌떡 뛰어간 곳은 마을 대장간이었다. 풀무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는 곳이었는데, 노인이 들이닥치자 대장장이가 인상을 쓰며 뭐라 하려다가 노인이 내민 보석을 보고 말을 멈췄다. 대장간 주인이 보석을 보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손에 쥐고 있던 망치를 슬며시 내려놓는 모습이, 마치 폭탄을 다루는 사람 같았다.
"이건... 이건 내가 감당할 물건이 아니오."
"그래도 값은 매길 수 있잖소?"
"매길 수가 없다니까! 이런 건 도시에서나 취급하지, 여기서 잘못 만졌다가는 목이 날아갈 물건이오."
목이 날아간다는 말에 나는 슬쩍 뒷걸음질을 쳤다. 대체 이게 뭐길래.
"도시라면 어디 말이오?"
"금석성이지, 어디겠소. 여기서 마차로 이틀 거리요."
그렇게 나는 첫날부터 낯선 세계의 가장 큰 도시, 금석성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타게 됐다. 마차 삯은 물론 선옥에서 떼어낸 값으로 치렀는데, 마부가 선옥 조각을 받아 들고는 손이 떨릴 정도로 좋아하는 걸 보니 그제야 이게 얼마나 값진 물건인지 감이 왔다. 좋아해야 할지 불안해해야 할지 모를 기분이었다.
마차 안에서 천빙정이 다시 소곤거렸다.
'재미있어질 게다. 두고 보거라.'
나는 그 말이 왜 이렇게 불안하게 들리는지, 그날은 알지 못했다. 흔들리는 마차 창밖으로 두 개의 달이 여전히 떠 있었고, 나는 그 낯선 빛을 바라보며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