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금석성은 생각보다 컸다.
성벽만 봐도 그랬다. 내가 살던 세계 기준으로 치면 중소도시 하나는 통째로 감쌀 만한 높이였는데, 그 안에 시장이 몇 개나 있었다. 마차 바퀴 소리와 사람들 목소리가 뒤섞여 정신이 없었다. 노점상들은 저마다 소리를 질러대며 손님을 끌었고, 그 틈을 비집고 다니는 아이들은 소매치기인지 심부름꾼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잽쌌다.
'번화하구나.'
'그러네요.'
'좋은 일이다. 사람이 많다는 건 돈이 많다는 뜻이니.'
속으로 대답하는 목소리가 능글맞았다. 나는 굳이 대꾸하지 않고 노인이 챙겨준 소개장을 다시 확인했다. 종이에는 낡은 글씨로 상점 이름과 위치가 적혀 있었다.
찾아간 곳은 보석 상점이었다. 간판도 없이 작은 유리창 하나만 달려 있어서 두 번이나 지나쳤다가 겨우 발견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좁은 실내에 온갖 원석과 세공품이 진열대마다 빽빽했고, 그 가운데 앉아 있던 주인은 첫눈에도 눈치가 빠른 사람처럼 보였다.
조만호. 소개장에 적힌 이름과 같았다.
"허어, 이거 참..."
그는 내가 내놓은 선옥을 등불 아래 비춰보며 몇 번이나 침을 삼켰다. 손끝이 살짝 떨리는 게 보였다. 저 정도로 티가 나면 흥정에서 밀릴 사람은 아닌데, 이건 그만큼 물건이 좋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건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묻지 마시고 값이나 부르시죠."
내 말투가 좀 딱딱했나 싶었지만 딱히 부드럽게 굴 이유도 없었다. 이 세계에 온 지 며칠 안 됐고, 상대는 뜨내기 손님한테 굳이 잘해줄 필요가 없는 장사꾼이었으니까.
그가 나를 흘겨보더니 계산기 대신 나무 주판을 두드렸다. 딱, 딱,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저게 대체 어떤 계산법인지는 몰라도 표정만 보면 상당히 복잡한 셈을 하는 모양이었다.
"삼백만 금화."
"그게 얼마나 큰돈인데요?"
"이 도시 저택 열 채 값이오, 손님."
속으로 웃음이 났다. 몸에서 이런 게 계속 나온다는 걸 알면 이 상인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지만, 굳이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나조차 그게 정확히 무슨 원리인지 몰랐다. 천빙정이 몸속에서 뭘 하는지, 왜 가끔 이런 결정체가 튀어나오는지, 물어볼 대상이 딱 하나 있긴 했지만 그 목소리는 대체로 즐겁게 굴다가 정작 중요한 대목에서는 뭉개듯 넘어가는 버릇이 있었다.
'물어볼 필요 없다. 알아도 좋을 게 없느니라.'
'그런 게 어딨어.'
'있느니라.'
더 물어봐야 대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아서 그만뒀다. 나는 삼백만 금화를 받고 그날로 도시에서 제법 좋은 숙소를 잡을 수 있었다. 방에 침대와 욕조가 따로 있고, 창밖으로 시장 골목이 내려다보이는, 이전 여관과는 비교도 안 되는 곳이었다.
'그리 좋아할 것 없다. 여기서도 돈은 결국 돈이니.'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으면 충분해."
'과연 그럴까.'
그 말투가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뭔가 알면서 안 알려주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는 다음 날에야 알게 됐다.
*
아침에 숙소를 나와 시장 구경이나 할 생각이었다. 도시 구조가 익숙해지면 여러모로 편할 것 같았고, 마침 날씨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숙소 근처 골목을 지나다가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었다.
좁은 뒷길에서 남녀 둘이 뭔가에 쫓기고 있었다. 남자는 십대 후반쯤으로 보였는데 검을 들고 있었고, 여자는 검은 망토를 두른 채 뒤에서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둘 다 숨이 거칠었다.
둘을 쫓는 건 팔뚝 두 개짜리 개처럼 생긴 짐승이었다. 몸집이 나만 한 크기였는데, 등에 억센 털이 곤두서 있고 입에서는 거품 같은 침이 흘렀다.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저건 뭡니까?"
지나가던 상인에게 물었다. 상인은 대답 대신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뒤도 안 돌아보고 뛰는 걸 보니 어지간히 겁을 먹은 모양이었다. 요란한 소리에 골목이 텅 비어갔지만 나는 굳이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위험하다는 감이 별로 안 왔다. 천빙정 덕분에 어지간한 짐승쯤은 알아서 걸러지는 감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눈앞의 저 짐승도 딱 그 정도였다. 시끄럽긴 한데 위협적이진 않은, 그런 느낌.
'별거 아니로다.'
'그럴 줄 알았어.'
남자가 짐승을 상대로 검을 휘둘렀지만 밀리는 기색이었다. 발놀림은 나쁘지 않았는데 짐승의 몸놀림이 워낙 날렵해서 검이 자꾸 헛돌았다. 여자가 손을 뻗자 지팡이 끝에서 냉기가 뿜어져 나와 짐승의 다리를 얼려버렸다. 순식간에 발목까지 얼음이 차오르자 짐승이 발버둥 치며 그대로 쓰러졌다.
"도윤아, 지금이야!"
남자가 검을 내리치자 짐승은 그대로 절명했다. 퍼억, 짧고 둔한 소리가 나더니 골목이 조용해졌다. 둘은 숨을 몰아쉬며 서로를 살폈다. 서로 다친 데가 없는지 확인하는 손짓이 익숙해 보였다.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때 남자, 도윤이라 불린 청년이 나를 발견하고 경계하는 눈빛을 보냈다.
"거기 누구시오? 구경만 할 거면 꺼지시오."
건방진 말투였지만 나이가 어려 보이니 그냥 넘겼다. 어차피 목숨 걸고 싸운 직후에 나긋나긋한 말투가 나올 리도 없었고.
"구경한 게 죄는 아니잖습니까. 그보다 저거, 뭐였는지 궁금해서."
여자가 망토를 걸치며 대신 답했다. 지팡이를 다시 등에 매는 손짓이 절도가 있었다.
"들개형 마수요. 별거 아닌 놈이지만 성 안까지 들어온 건 이상한 일이오."
목소리가 차분했다. 나이는 나와 비슷하거나 조금 어려 보였는데, 어딘가 신중한 분위기가 있었다. 도윤이 누나라고 부른 걸 보면 남매 사이인 것 같았다.
"이런 걸 처리하고 돈 받는 일도 있습니까?"
내 질문에 도윤이라는 청년이 피식 웃었다. 검을 검집에 넣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돈이 궁하신가 보오. 뭐, 있긴 하지. 의뢰소에 가면 되오."
삼백만 금화가 있었지만 그게 계속 나오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확히는, 나올지 안 나올지도 몰랐고, 만약 필요할 때 안 나오면 낭패였다. 몸속에 뭐가 들어있어서 가끔 보석을 만들어낸다는 게, 정기적인 수입원이 될 거라고 믿을 만큼 나는 낙천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 세계에서도 벌어먹고 살 방법을 하나쯤은 마련해둬야겠다고 생각했다.
*
의뢰소는 성 중앙에 있었다. 커다란 건물 벽면에 종이가 빼곡하게 붙어 있었는데, 대부분 마수 처치나 물건 운반 같은 것들이었다. 종이마다 보상 금액과 위험도가 적혀 있고, 그 아래 작은 글씨로 세부 조건이 붙어 있었다.
읽어보니 이 세계 사람들은 위험도를 숫자나 색으로 표기하지 않고 그냥 낮음, 보통, 높음, 이렇게 세 단계로만 구분하는 모양이었다. 단순한 게 편했다.
그중 눈에 들어온 건 이거였다.
[독각광사 처치. 보상 오만 금화. 위험도 낮음.]
독각광사가 뭔지도 몰랐지만, 위험도가 낮다고 써 있으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그 옆에 아까 만났던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여자가 종이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거밖에 없나..."
"오만 금화라니, 이걸로는 이번 달 생활비도 안 나와요, 누님."
도윤이 팔짱을 끼고 다른 종이들을 훑었지만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벽에 붙은 다른 의뢰들은 보상이 더 짜거나, 위험도가 너무 높아서 둘만으로는 무리인 것들뿐이었다.
남매인 모양이었다. 나는 슬쩍 다가갔다.
"같이 가시죠. 저도 이거 하려던 참인데."
둘이 동시에 나를 쳐다봤다. 여자 쪽 눈빛이 특히 날카로웠다. 아까 골목에서 본 냉정한 눈빛 그대로였다.
"낯선 사람이랑 위험한 일을 같이 할 이유가 없소."
"위험도 낮다고 써 있잖습니까. 그리고 보상은 어차피 나눠도 되고요."
"...보상을 나눈다고?"
도윤이 눈을 반짝였다. 방금까지 시무룩했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지는 게 보였다. 이 조그만 게 셈은 빨랐다.
"삼등분하면 일인당 만육천 금화가 넘습니다. 혼자 하는 것보단 셈이 낫지 않습니까?"
누나 쪽이 조금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이 마치 물건 감정하듯 꼼꼼했다. 아마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하는 눈치였는데, 딱히 검이나 지팡이를 들고 있지 않은 내가 미심쩍었을 것이다.
"당신, 뭘 쓰시오? 검은 안 보이고..."
"그냥 몸으로 합니다."
"...몸으로?"
여자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뭔가 더 물으려는 것 같았지만 결국 관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대신 위험해지면 알아서 빠지시오. 우리가 책임 못 지오."
"걱정 마세요."
그때는 정말로 걱정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위험도 낮음, 이라는 글자를 믿었으니까. 오만 금화짜리 의뢰에 목숨 걸 일은 없을 거라고,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했다.
'낮음이라...'
속에서 목소리가 뭔가 말하려다 말고 킬킬거렸다. 그 웃음소리가 묘하게 신경을 긁었지만 물어봐도 대답이 없을 게 뻔해서 그냥 넘겼다.
그게 얼마나 순진한 판단이었는지는, 다음 날 숲에 들어서고 나서야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