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패검회 사자가 산문을 다녀간 뒤로 허현담의 얼굴에는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그늘이 드리워졌으니, 그는 낮에는 여느 때처럼 문도들을 가르치며 태연한 낯빛을 지어 보였으나, 밤이 이슥해지면 홀로 서재에 앉아 등불 하나만을 벗 삼아 옛 서찰들을 꺼내 뒤적이곤 했다. 서찰은 하나같이 누렇게 바스라져 손끝에 닿을 때마다 부스러기가 떨어져 나갔는데, 그중 한 장에는 백 년 전 봉인되었다는 어떤 존재의 이름이 먹빛도 희미하게 남아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그의 밤잠을 앗아가는 진짜 이유였다. 그는 그 이름을 손끝으로 짚어보다가 이내 서찰을 접어 서랍 깊숙이 밀어 넣고는, 창밖으로 스며드는 달빛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그러나 그는 그 불안의 그림자를 제자들 앞에서는 결코 드러내지 않았고, 다만 마음속으로 무언가를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에, 예정보다 이르게 황서아를 정식으로 약초 정리소의 조수 자리에 앉히기로 결정을 내렸다.
"오늘부터 그대는 약선문의 객원 조수요." 허현담이 담담한 어조로 건넨 그 한마디에, 황서아는 자신이 산길에서 구조된 지 채 두 달도 되지 않아 이만한 자리를 얻게 되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아 잠시 말을 잇지 못한 채 눈만 크게 뜨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이 옷자락을 슬며시 움켜쥐었는데, 그것이 놀라움과 기쁨이 동시에 밀려든 탓이었다. 정식 제자는 아니었으나, 산문 안에서 신분과 숙식을 보장받으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는 실로 큰 신분 상승이었으니, 이제 더 이상 남의 눈치를 보며 헛간 구석에서 몸을 뉘일 필요가 없어진 것이었다. 황서아는 고개를 깊이 숙여 감사를 표했고, 그 순간 그녀의 뒷목에 흐르던 식은땀마저 봄바람에 서서히 마르는 듯했다.
서도현은 그 소식을 듣고 겉으로는 심드렁하게 "밥값이나 축내지 마시오"라고 던졌으나, 곁눈질로 슬쩍 비치는 미소는 감추지 못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돌아서면서도 걸음이 평소보다 가벼웠는데, 그것을 눈치챈 것은 오직 곁을 지나던 서다은뿐이었다. 서다은은 오라버니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웃음을 흘렸으나, 서도현은 그 웃음소리를 못 들은 척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봄이 깊어가며 산문 뒤편 연못가에 연산홍이 하나둘 피어나기 시작했는데, 아직 절반은 붉은 봉오리를 다 펼치지 못한 채 머뭇거리고 있었으니, 황서아와 서도현 사이에 오가는 마음 역시 그 꽃처럼 다 피어나지 못한 채 조심스레 머물러 있었다. 두 사람은 이따금 저녁 산책길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며 말없이 걷기도 했는데, 연못 위로 스치는 바람이 두 사람의 옷깃을 동시에 흔들 때마다 서로의 시선이 잠깐 마주쳤다가 이내 각자의 발끝으로 떨어지곤 했다. 정작 마음속 깊은 이야기는 서로 꺼내지 못한 채, "오늘 약재를 몇 근이나 손질했느냐" 같은 겉도는 대화만을 주고받을 뿐이었으니, 봄밤의 개구리 울음소리만이 그 어색한 침묵의 틈을 메워주었다.
그러던 어느 밤, 서다은이 급히 서도현을 찾아와 낯빛이 하얗게 질린 채 말을 더듬었다. 그녀의 손끝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고, 숨이 채 고르지 못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자꾸 끊어졌다. "오라버니, 산문 밖에... 이상한 사람들이 있어요. 검은 옷을 입고, 아무 말도 없이 산문 쪽을 계속 바라보고만 있어요." 서도현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곧장 창밖을 살폈으나, 이미 그 검은 그림자들은 어둠 속으로 흩어져 사라진 뒤였고, 다만 산문 앞 흙바닥에 낯선 발자국 몇 개만이 어지럽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는 등불을 들고 밖으로 나가 발자국의 깊이와 방향을 살폈는데, 발자국은 하나같이 크고 힘이 실려 있었으며, 흙 위에 남은 흔적으로 보아 그들이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허현담은 그 소식을 전해 듣고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낮게 중얼거렸다. "벌써 시작된 것인가."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서도현도, 황서아도 알지 못했으나, 문주의 얼굴에 스친 그 짧은 두려움만은 두 사람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았다. 허현담은 서찰이 담긴 서랍 쪽으로 무심코 시선을 던졌다가, 이내 그 눈길을 거두며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그의 뒷모습에는 평소와 다른 무거움이 배어 있었다.
산 능선 위로 낮게 깔린 구름 사이에서, 그날 밤 유난히 붉은빛을 띤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 달빛이 산문의 흙바닥에 남은 발자국을 붉게 물들였으니, 마치 무언가가 이미 그 자리에 핏빛 예언을 새겨 놓은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