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오늘은 죽지 않는다

2화

다음 날 아침, 나는 눈을 뜨자마자 봇짐을 뒤져 그 책을 다시 꺼냈다. 밝은 데서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거다. 창호지 틈으로 들어오는 빛이 희미했지만, 그래도 어젯밤 방구석보다는 나았다. 펼쳐보니 역시 텅 비어 있었다. 종이 냄새만 났다. 어제 본 건 정말 헛것이었나 보다. 나는 피식 웃었다. 배고픔이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구나, 정도로 생각을 정리했다. 별일 아니다. 책을 다시 접어 봇짐에 넣으면서 손끝이 종이 표면을 한 번 더 쓸었다. 이상하게 매끈한 느낌이 남아 있었다. 그냥 오래된 책이라 그런가 보다, 그렇게 넘겼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 순간부터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계속 들러붙었다는 거다. 여기를 떠야 한다. 논리적인 이유는 없었다. 그냥 확신 같은 게 들었다. 한성에 계속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근거 없는 불안이었다. 나는 그 생각을 애써 밀어냈다. 근거 없는 불안에 휘둘려서 좋을 게 없다는 건 이미 여러 번 겪어봤다. 배가 고프면 온갖 잡생각이 다 든다. 그런 거다. 하지만 곱씹을수록 그 생각이 틀린 것 같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 보니 골목은 여전히 조용했다. 아니, 조용한 게 아니라 소리가 사라진 거였다. 예전 같으면 이 시간에 아이들 뛰어다니는 소리, 아침밥 짓는 냄새, 개 짖는 소리가 뒤섞여 있어야 했다. 지금은 그런 게 없었다. 문 닫힌 집들, 마당에 웃자란 풀, 인기척 없는 우물가. 우물 옆을 지나가다 옆집 문이 열려 있는 걸 봤다. 안을 들여다보진 않았다. 굳이 볼 필요 없었다. 며칠 전 새벽에 그 집 노인이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아무도 그의 죽음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장례랄 것도 없었다. 누군가 와서 조용히 시신을 치워 갔을 뿐이다. 그런 곳이었다. 시장 쪽으로 걸어가 봤다. 딱히 뭘 사려는 건 아니었다. 그냥 사람 사는 소리가 그리웠던 건지도 모른다. 좌판은 절반도 남지 않았고, 남은 좌판에도 팔 물건이 몇 개 없었다. 좀 상한 무 몇 뿌리, 말라붙은 나물 한 줌, 그게 전부인 좌판도 있었다. "세곡 걷으러 또 온답디다." 누군가 지나가며 하는 말이 귀에 꽂혔다. "이번엔 씨앗까지 걷어간다던데." "씨앗을 걷으면 내년엔 뭘 심으라고." 대꾸하는 목소리에 웃음기 같은 게 섞여 있었는데, 웃는 게 아니라 웃을 수밖에 없어서 나오는 소리 같았다. 나도 알고 있는 감정이었다. 웃긴 게 아니라 웃어야 견딜 수 있는 상황이라는 거. 관군은 세곡을 걷는다는 명목으로 남은 곡식마저 쓸어갔고, 굶어 죽는 사람이 매일같이 늘어났다. 나 역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시장 한 귀퉁이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봤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눈길만 한 번 주고 그냥 지나쳤다. 나도 그랬다. 이젠 그런 풍경이 놀랍지도 않았다. 그게 더 무서운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익숙해지는 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그 생각이 들었다. 한성은 더 이상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었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이모가 산다는 마을이 있다고 들었다. 어릴 때 딱 한 번 가본 곳이었다. 기억은 희미했다. 나무가 많고, 물이 맑았고, 이모가 밥을 한 그릇 더 퍼주었던 것 정도. 거기까지 가면 최소한 밥은 먹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안고 산 게 벌써 몇 달째였다. 문제는 늘 같았다. 돈이 없다는 것. 성문을 나서서 남쪽으로 가는 길은 사흘 정도 걸린다고 했다. 그 길에 산짐승이 나온다는 소문도 있고, 요즘은 산짐승보다 더 무서운 게 나온다는 말도 돌았다. 사람을 터는 무리라고 했다. 위험하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그 위험이 지금 여기 앉아서 굶어 죽는 것보다는 나아 보였다. 그래도 가야 한다. 여기 계속 있으면 죽는다. 떠나면 죽을지도 모른다. 그럼 어느 쪽이 나은가.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적어도 떠나는 쪽에는 살아날 확률이 있었다. 돈을 구할 방법을 생각해봐야 했다. 팔 수 있는 건 다 팔았다. 방을 둘러봐도 남은 게 없었다. 이불도, 그릇도, 옷가지도, 하나둘씩 다 시장에 내놓았다. 남은 건 저 낡은 책 한 권과, 아버지가 쓰던 호미 정도였다. 호미는 손잡이가 반쯤 갈라져 있었고, 날은 무뎌질 만큼 무뎌져 있었다. 그걸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래도 뭐라도 들고 가야 했다. 빈손으로 전당포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낫겠지. 전당포. 덕흥전당(德興錢莊)이라는 곳이 성 안에서 그나마 인심이 좋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시장에서 만난 아주머니가 지나가듯 알려준 정보였다. 물론 소문일 뿐이고, 전당포치고 인심 좋은 곳이 있을 리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사람 목숨 담보로 이자 뜯어먹는 데가 인심이 좋으면 그게 이상한 거지.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가려낼 여지가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일부러 덕흥전당 쪽으로 돌아 걸어봤다. 큰 대문에 낡은 현판이 걸려 있었고, 안에서 뭔가를 흥정하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오늘은 들어가지 않았다. 내일 아침에, 정신을 차리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지금 이 몸 상태로 흥정을 했다간 제값도 못 받을 게 뻔했다. 결심을 굳히고 그날은 이른 잠을 청했다. 몸이 지쳐 있어서인지 눈을 감자마자 깊이 빠져들었다. 꿈속에서 나는 강가에 서 있었다. 물살이 유난히 거센 강이었다. 회색빛 물이 소용돌이치며 흘렀고, 물 위로 튀는 물방울마저 무겁게 느껴졌다. 그 물속에서 한 남자가 허우적대고 있었다. 낯선 얼굴이었다. 나이는 나보다 조금 더 든 것 같았고, 옷차림은 흔한 농부의 것이었다. 소매가 물에 젖어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살려줘! 누구든 좀 도와줘!" 남자의 목소리가 물살 사이로 끊어질 듯 이어졌다. 나는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발이 땅에 박힌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려 해도 목에서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강 건너편에 여인 하나가 서 있었다. 그 여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물속의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이 없었다. 슬픔도, 두려움도, 아무것도 읽히지 않았다.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게 오히려 더 소름 끼쳤다. 물속의 남자가 마지막으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이 허공을 움켜쥐었다.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듯한, 하지만 이미 잡을 게 없다는 걸 아는 몸짓이었다. 그리고 물속으로 완전히 잠겼다. 물결이 그 위를 덮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강물은 다시 조용히 흘렀다. 강 건너편의 여인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시선은 이제 물속이 아니라, 나를 향해 있었다. 나는 그 순간 꿈에서 깨어났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 있었다. 방 안은 아직 어두웠고, 봇짐 속 책은 아까 넣어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숨을 몰아쉬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냥 꿈이다.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그 여인의 눈빛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다. 나를 보던 그 무표정한 얼굴이. 봇짐 쪽으로 손을 뻗었다. 책을 다시 꺼내 펼쳐볼까 하다가, 손이 멈췄다. 만약 이번에도 텅 비어 있지 않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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