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오늘은 죽지 않는다

5화

은화 이백 문을 손에 쥐고 전당포를 나온 나는, 그날부터 남쪽으로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주머니 속 은화는 묵직했다. 손바닥에 올려놓으면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고, 흔들면 짤그락 소리가 났다. 전당포 주인은 이 값이 후한 편이라고 했다. 후하다는 말을 믿을 순 없었지만, 지금 내겐 흥정할 여력도 없었다. 아버지가 쓰던 유품 몇 개, 그리고 손목에 차고 있던 낡은 가죽끈까지 넘기고 받은 값이었다. 그 값을 다 헤아리며 걷다 보니 어느새 집 앞이었다. 짐이라고 할 만한 게 별로 없었다. 갈아입을 옷 두 벌, 아버지가 남긴 그 낡은 책, 그리고 마른 곡식을 조금 챙긴 게 전부였다. 옷은 색이 바랜 무명옷이었고, 곡식은 좁쌀과 수수를 섞어 작은 베주머니에 담았다. 이 정도면 며칠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며칠 뒤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은화는 옷 안쪽에 헝겊으로 꿰맨 주머니에 넣어 몸에 지녔다. 바늘을 쥐고 옷섶을 뜯어 안주머니를 만드는 데 반나절이 걸렸다. 손이 서툴러 몇 번이나 실이 엉켰다. 그래도 끝까지 했다. 이걸 잃어버리면 여정 자체가 끝이었다. 주머니를 다 꿰맨 뒤, 그 안에 은화를 넣고 몇 번이나 흔들어보았다. 소리가 나지 않았다. 됐다. 옷 밖에서 만져도 딱딱한 감촉만 느껴질 뿐,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이 정도면 소매치기의 눈도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성 안 사람들에게 은근슬쩍 남쪽 길에 대해 물어보았다. 시장에서 곡식을 팔던 아주머니, 주막에서 술을 데우던 주인, 우물가에서 물을 긷던 늙은이. 대부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아꼈다. "요즘 그쪽으로 가는 사람이 없어. 안 좋은 소문이 돌아서." "무슨 소문입니까." "거, 사람 터는 무리가 있다더군. 짐 있는 사람 골라서 노린다던데." 주막 주인은 거기서 한 마디를 더 얹었다. "작년 가을에 장사꾼 셋이 그 길로 갔다가 하나도 안 돌아왔다는 얘기도 있어. 뭐, 소문이야 소문이지만." 소문이야 소문이지만, 하고 웃으며 말하는 그 얼굴이 웃는 것 같지 않았다. 우물가 늙은이는 더 노골적으로 말했다. "젊은이, 그 길은 낮에도 그늘이 짙어. 나무가 워낙 우거져서. 사람 숨기기 딱 좋은 곳이지. 나 같으면 안 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속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여기 계속 있으면 굶어 죽는 건 시간 문제였고, 남쪽으로 가면 최소한 살아날 가능성이 있었다. 굶어 죽는 것과 강도를 만나 죽는 것, 둘 중 어느 쪽이 나은지는 따져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냥 걷는 수밖에. 무리를 지어 가자는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이 성에서 남쪽으로 가겠다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다들 북쪽이나 동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었다. 남쪽은 기피 대상이었다. 나만 유독 사정이 급했다. 출발 전날 밤, 나는 다시 그 책을 펼쳤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 책은 손에 익은 무게였다. 표지는 가죽이었는데 오래되어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넘길 때마다 마른 종이 냄새가 났다. 강가의 남자와 여인 이야기가 쓰였던 그 장을 다시 찾아보았다. 여전히 그대로였다. 손끝으로 글자를 짚어보았다. 잉크가 스민 자국이 종이 뒷면까지 배어 있었다. 진짜 글씨였다. 누군가 실제로 쓴 글씨. 다른 장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백지였다. 종이의 결이 다른 것도 아니었다. 그냥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새 책 같은 상태였다. 펜이 있다면 뭔가 적어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그럴 필요가 있나 싶어 그만두었다. 뭘 적어야 할지도 몰랐다. 아버지의 이름을 적을까. 아니면 오늘 날짜를. 그러다 문득 이 책에 내가 뭔가 적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손을 멈추게 했다. 이 책이 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냥 이상한 물건이라고 생각하고 넘기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전당포에서도 이 책만은 받아주지 않았다. 값을 매길 수 없다고 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게 아니라 뭔가 꺼림칙해서 그런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굳이 캐묻지 않았다. 나는 책을 다시 봇짐에 넣고 잠을 청했다. 이번에는 다행히 꿈을 꾸지 않았다. 아침이 되자 나는 마지막으로 집을 둘러보았다. 반쯤 무너진 지붕, 흙바닥, 부모님의 흔적이 남은 마루. 어머니가 앉아 바느질을 하던 자리에는 아직도 실밥이 몇 가닥 떨어져 있었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던 낡은 상 위에는 금 간 자국이 그대로였다. 방 한쪽 벽에는 내 키를 표시해놓은 눈금이 있었다. 언제 그려놓았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눈금이었다. 이곳을 떠난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문을 나서면서 이 방에 다시는 못 들어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미련은 두지 않기로 했다. 여기에 남아 있는 건 죽은 사람들의 기억뿐이었다. 기억은 짐이 되지 않는다. 가지고 다녀도 무겁지 않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봇짐을 짊어지고 마당으로 나서니 아침 공기가 차가웠다. 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고, 멀리서 닭 울음소리가 들렸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아침이었다. 다만 오늘은 이 아침이 마지막이라는 것만 달랐다. 성문으로 향하는 길, 나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집이 멀어질수록 지붕의 형체가 점점 흐려졌다. 다시 이 성에 돌아올 일이 있을까.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일을 자꾸 생각하는 건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발걸음이 무거워질 때마다 뒤를 돌아보는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성문 앞은 예상보다 한산했다. 문지기 몇 명이 지루한 얼굴로 서 있었고, 오가는 사람도 몇 없었다. 성문 옆에 세워진 방문에는 낡은 벽보 몇 장이 붙어 있었다. 세금 고지, 도망친 노비를 찾는다는 방, 그리고 색이 다 바래 글씨를 알아볼 수 없는 오래된 방까지. 나는 그 앞을 지나며 잠깐 걸음을 늦췄다가 다시 걸었다. "어디로 가나." 문지기가 물었다. 창을 든 손이 지루함에 절어 느슨했다. "남쪽으로 갑니다." "혼자?" "네." 문지기는 나를 잠시 훑어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위아래로 훑는 눈길이 짐을 재는 것 같기도 하고, 사람을 재는 것 같기도 했다. "요즘 혼자 다니는 건 위험한데. 무리를 지어 가는 게 나을 걸세." "기다릴 여유가 없어서요." "그 여유 없는 사정이야 다들 있지." 문지기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더 말하지 않고 손을 저으며 나를 통과시켰다. 옆에 있던 다른 문지기가 나를 힐끗 보며 뭐라 낮게 말했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굳이 되묻지 않았다. 좋은 말은 아닐 것 같았다. 성문을 나서는 순간, 등 뒤에서 삐걱, 성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부터는 정말로 나 혼자다. 남쪽으로 가는 길은 좁고 구불구불했다. 양옆으로는 마른 나무들이 늘어서 있었고, 길바닥은 흙과 자갈이 섞여 걷기 불편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자갈이 신발 밑창을 긁는 소리가 났다. 처음 한 시간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성벽이 아직 보였고, 지나가는 나그네도 한둘 있었다. 서로 눈이 마주치면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정도의 인사를 나눴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놓였다. 나는 은화를 지닌 주머니를 옷 속에서 다시 한번 확인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손끝에 딱딱한 감촉이 느껴지면 그제야 숨을 크게 내쉬었다. 아직 있다. 다행이다. 한 시간쯤 걸었을까, 성벽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길가의 나무는 점점 우거졌고, 하늘을 가리는 가지가 늘어날수록 그늘도 짙어졌다. 우물가 늙은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낮에도 그늘이 짙다는 말. 그 말이 지금 이 순간 정확히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길가에 이상한 흔적을 발견했다. 나무 밑동에 새겨진 표시였다. 자연스럽게 생긴 상처가 아니었다. 누군가 일부러 칼로 그은 것 같은, 짧은 사선 두 개. 표시는 깨끗했다. 나무껍질이 완전히 아물지 않은 걸 보면 그린 지 오래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적은 없었다. 새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상하게 조용했다. 바람 소리조차 없었다. 나뭇가지가 흔들리지도 않았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 표시를 다시 살펴보았다. 사선 두 개. 방향을 가리키는 표식일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남긴 신호일까. 짐 있는 사람을 노린다는 말이 다시 머릿속을 스쳤다. 짐 있는 사람을 골라 표시해두는 방법이라면, 이런 식으로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거는 없었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나는 다시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때, 저 앞쪽 숲 사이에서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부스럭. 짐승인가. 아니면 사람인가. 나는 숨을 죽이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봇짐 속의 낡은 책이 문득 무겁게 느껴졌다. 마치 무언가를 예고하고 있는 것처럼. 등에 짊어진 그 무게가 평소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졌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뒷걸음질을 치려다 멈췄다. 도망친다고 해서 안전할 리 없었다. 이미 늦었을지도 몰랐다.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발밑의 자갈이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조금만 움직여도 소리가 날 것 같았다. 숲 사이 그늘 속에서, 뭔가가 천천히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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