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오늘은 죽지 않는다

4화

낡은 저고리 안으로 바람이 스며들었다. 발끝이 시렸다. 며칠째 신발 안쪽이 젖어 있는 채로 마르지 않았다. 전당포 앞에 서서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간판에는 '덕흥전당'이라는 네 글자가 낡은 금박으로 새겨져 있었다. 금박은 반쯤 벗겨져 있었고, 그 아래로 나무결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문 앞에서 서성이는 동안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힐끔거렸다. 봇짐 하나 멘 채 서 있는 열여덟 살 사내아이. 딱 부랑자로 보일 만한 몰골이었다. 알고 있다. 들어가야 한다. 여기서 물러나면 답이 없다. 끼익. 문을 밀자 오래된 나무 냄새와 먹 냄새가 섞여 코를 찔렀다. 안은 어둑했다. 진열장 위에 놓인 자기그릇, 은장식이 된 노리개, 낡은 서화들이 유리 너머로 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죄다 남의 절박함이 만들어낸 물건들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계산대 뒤에 서 있던 점원이 나를 발견하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뭐요." 목소리에 이미 짜증이 섞여 있었다. 눈은 나를 훑는 데 반 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에 이미 판단을 마친 얼굴이었다. "돈을 좀 빌리려고 왔습니다." 나는 최대한 격식을 갖춰 말했다. 상대가 나를 무시할 이유를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었다. 말투 하나로 사람을 다르게 보는 세상이라는 걸, 이 몇 달 동안 지겹게 배웠다. 점원은 내 행색을 다시 한번 훑었다. 낡은 저고리, 헤진 신발, 손에는 봇짐 하나.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마치 계산대에 벌레가 올라온 것을 본 사람 같은 얼굴이었다. "저당물이 뭔데." "이겁니다." 나는 봇짐에서 아버지의 유품인 낡은 책을 꺼내려다, 멈칫했다. 그 책은 아직 손에서 놓고 싶지 않았다. 손끝이 봇짐 안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이건 마지막에 꺼낼 것이다. 정말로 마지막에. 대신 호미를 꺼내 계산대 위에 올렸다. 쨍. 쇠붙이가 나무판 위에 부딪히며 낮은 소리를 냈다. 점원이 그것을 힐끗 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이런 걸 가지고 뭘 빌리겠다는 거요. 녹슨 호미 하나로 은화를 바라시나." 호미는 아버지가 밭일할 때 쓰던 것이었다. 날이 이미 반쯤 닳아 있었고, 손잡이는 오래 써서 반질반질했다. 값어치를 따지자면 점원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그것 말고 내놓을 만한 게 별로 없었다. "얼마라도 좋습니다. 조금이라도 필요해서요." "필요하면 일을 하시든가." 점원의 말투가 점점 날카로워졌다. 그는 나를 아예 사람 취급하지 않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팔짱을 낀 채 계산대에 삐딱하게 몸을 기대고, 마치 나를 밀어내는 게 이 가게의 유일한 업무인 것처럼 굴었다. "이런 거지꼴로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여긴 근본 있는 물건이나 다루는 곳이야. 자네 같은 부류는 문턱도 못 넘는 게 정상인데, 오늘 운 좋게 문은 넘었네." 속으로는 저 낯짝을 한 번 후려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여기서 쫓겨나면 정말로 끝이다. 다음 전당포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안다 해도 이 몰골로 걸어갈 기운이 남았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부탁드립니다. 정말로 급한 사정이 있어서." "급한 사정이야 다들 있지. 여기 오는 놈들이 다 그 소리를 해. 얼른 나가." 점원이 손을 휘저으며 나를 문 쪽으로 몰아세우려 했다. 손끝이 내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물러설 곳도 없었다. 그 순간, 안쪽 방에서 걸음소리가 들렸다. 쿵. 쿵. 무거운 걸음이었다. 발걸음마다 마룻바닥이 살짝 울렸다. "거기서 뭐 하는 게냐." 걸어 나온 사람은 배가 두 사람은 앉을 수 있을 만큼 넉넉한 중년의 남자였다. 비단으로 지은 두루마기가 그의 몸을 감싸고 있었고, 얼굴은 기름기가 흘러 번들거렸다. 손가락마다 옥으로 만든 반지가 하나씩 끼워져 있었는데, 그 손이 움직일 때마다 은은하게 부딪는 소리가 났다. 눈빛만은 의외로 날카로웠다. 몸집과 눈빛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주인어른, 이 거지 놈이 자꾸 뭘 저당 잡으려고 해서요." 점원이 얼른 자세를 낮추며 말했다. 방금까지 나를 몰아세우던 기세는 어디 갔는지, 목소리에 아부가 잔뜩 섞여 있었다. 사람이 이렇게 빨리 태도를 바꿀 수 있다는 걸 다시 확인했다.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볼 때마다 새삼스럽다. 주인이라 불린 남자는 나를 잠시 훑어보았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봤다. 여기서 눈을 내리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이미 아무것도 아닌 처지이긴 했지만, 적어도 그렇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뭘 잡히려는 겐가." 주인이 물었다. 목소리는 무겁지만, 점원과는 다르게 조롱기가 없었다. 사업하는 사람의 목소리, 라고 해야 할까. 사람을 값어치로만 재는 것 같으면서도, 최소한 조롱할 시간은 아깝다고 여기는 듯한 태도였다. "이 호미밖에는 가진 게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잠시 멈췄다가, 결국 봇짐에서 그 낡은 책을 꺼내 들었다. 손이 떨리는 걸 애써 감추며 내밀었다.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던 물건. 이걸 저당 잡히는 게 옳은 일인지, 지금도 확신은 없다. "이것도 있습니다." 주인이 손을 뻗어 그 책을 받아들었다. 그는 표지를 살피고, 몇 장을 넘겨보았다. 넘기는 손길이 생각보다 조심스러웠다. 텅 빈 페이지들뿐이었다. 글자 한 줄 없는 종이 위에서 그의 눈이 잠시 멈췄다. 그의 표정에서 아무 변화도 읽히지 않았다. 책장 넘기는 소리만 방 안을 채웠다. 사삭. 사삭. 점원은 그 옆에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나는 숨을 죽인 채 주인의 얼굴을 지켜봤다. 저 표정에서 뭐라도 읽어내려고 했지만, 기름기 도는 얼굴은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이건 값어치가 없네." 주인이 책을 돌려주며 말했다. 그런데 나를 보는 눈빛이 이상하게 부드러워져 있었다. 방금까지의 사무적인 눈빛과는 뭔가 달랐다. 뭘 본 걸까, 저 텅 빈 페이지에서. "자네, 이름이 뭔가." "이도현입니다." "몇 살인가." "열여덟입니다." 주인은 잠시 나를 훑어보다가, 점원에게 눈짓을 했다. 짧은 눈짓이었는데, 점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은화 이백 문 내어주게." 점원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주인어른, 저당물도 없는데…" "내가 이자로 받겠네. 됐으니 내어주게." 이자로 받겠다는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저 텅 빈 책이 무슨 값어치가 있다는 건지도. 다만 지금 당장은 그걸 물어볼 처지가 아니었다.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은화 이백 문. 그 정도면 남쪽까지 가는 여정에 밥값과 숙박비를 충분히 댈 수 있는 금액이었다. 몇 달 동안 굶주림과 추위를 오가며 걸어온 길이었다. 그 끝에서 이런 행운을 만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이건 예상치 못한 행운이었다. 점원이 마지못해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뒤 작은 자루를 들고 나왔다. 자루 안에서 은화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찰랑. 찰랑. 그 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어…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주인은 손을 저으며 웃었다. 웃는 얼굴도 기름기가 흘렀지만, 적어도 그 웃음에는 조롱이 섞여 있지 않았다. "감사할 것 없네. 이건 빌려주는 거지, 주는 게 아니니까. 석 달 안에 갑절로 갚으러 오게." 갑절이라니. 이자가 백 문이라는 소리였다. 살벌한 조건이었지만, 지금은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석 달 뒤에 살아서 이 자리에 다시 서 있을 수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처지였으니, 이자를 따지는 게 사치스러운 고민이었다. "반드시 갚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석 달 뒤의 내가 지금의 나보다 나은 처지에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장담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물러가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자루를 품 안에 단단히 품고 돌아섰다.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 등 뒤에서 점원의 시선이 여전히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아마 저 은화 이백 문이 아까워서 견딜 수 없다는 눈빛일 것이다. 신경 쓸 겨를 없다. 그런데 문을 나서기 직전, 그가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 돈이면 한성을 뜰 수도 있겠구먼. 요즘 성문 밖이 흉흉하다던데, 뜰 거면 서둘러 뜨는 게 낫네." 나는 그 말에 걸음을 멈췄다가, 다시 걸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성문 밖이 흉흉하다는 말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 건지, 그가 나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 건지,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물을 틈도 주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나서자 다시 찬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끼이익.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나는 자루를 품에 안은 채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은화 이백 문. 이걸로 며칠은 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방금 그 남자가 던진 말이 자꾸 귓가에 남았다. 성문 밖이 흉흉하다. 뜰 거면 서둘러야 한다. 뜰 거면 서둘러야 한다. 나는 그 말을 곱씹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덕흥전당의 낡은 간판이 점점 멀어졌다. 앞으로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그때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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