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그날 밤, 집에 돌아오자마자 부엌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신발도 제대로 벗지 않고 곧장 부엌으로 걸어갔다.
불도 켜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도 그 자리를 알고 있었다.
청동 솥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부뚜막 위, 어제 뒀던 그 자리 그대로.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을 텐데, 괜히 안심이 됐다.
낮에 있었던 일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박태식.
그 인간의 얼굴이 눈앞에 자꾸 떠올랐다.
비웃음 섞인 표정,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는 눈빛.
"너 같은 놈이 뭘 할 수 있는데."
그 말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힘, 배경, 이름.
그런 것들이 없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는 세상.
어제는 진월희였다.
아무 말도 못 하고 물러섰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아서였다.
6년이었다.
6년 동안 그렇게 밀려나고, 물러서고, 참아왔다.
'나는 뭘로 버텨야 하나.'
부엌 바닥에 그대로 앉았다.
차가운 타일 바닥이 엉덩이를 통해 몸으로 스며들었다.
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 낡고 볼품없는 물건이 지금 내 처지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색이 다 벗겨지고, 여기저기 찌그러지고,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고물.
어디 창고 구석에서 먼지만 뒤집어쓰다가 여기까지 흘러온 것.
나랑 다를 게 없었다.
손을 뻗어 표면을 만졌다.
찌릿.
다시 그 감각이었다.
어제보다 더 뚜렷했다.
어제는 잠깐이었다.
스치듯 지나가는 정전기 같은 느낌.
그래서 신경 쓰지 않고 넘겼다.
이번엔 손을 떼지 않았다.
숨을 죽이고 그대로 버텼다.
둥, 둥.
뭔가 미세하게 울렸다.
소리라기보다는 진동이었다.
손바닥을 통해 팔로, 팔에서 가슴으로 번지는 이상한 파동.
심장이 빨리 뛰었다.
땀이 손에 배었다.
'이거 진짜 움직이고 있다.'
솥 안쪽을 들여다봤다.
비어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오래된 청동 냄비, 밑바닥엔 얕게 녹이 슬어 있었다.
그런데 표면에 새겨진 문양이 아까보다 조금 더 짙게 보이는 것 같았다.
착각인가.
다시 눈을 비비고 봤다.
문양은 그대로였다.
동그란 원 안에 알 수 없는 기하학적 무늬가 얽혀 있었다.
처음 이 솥을 봤을 때는 그냥 장식인 줄 알았다.
지금 보니 뭔가 규칙이 있는 것 같았다.
문자 같기도 하고, 짐승의 형상 같기도 했다.
둥, 둥, 둥.
진동이 점점 규칙적으로 변했다.
마치 심장 박동 같았다.
박자가 있었다.
일정한 리듬으로 반복됐다.
누군가 그 안에서 숨을 쉬고 있는 것처럼.
나는 솥에서 손을 떼려 했다.
하지만 뗄 수 없었다.
손바닥이 표면에 붙어버린 것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뭐야, 이거.'
당황해서 다른 팔로 손목을 잡아당겨봤다.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움직이는데 힘이 안 실렸다.
근육이 명령을 듣지 않는 느낌.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관자놀이를 타고 턱까지.
숨소리가 스스로도 들릴 만큼 커졌다.
그 순간, 창밖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먼 곳에서 울리는 경보음.
영수 연구소 쪽 방향이었다.
평소라면 신경도 안 썼을 소리였다.
그 동네에서는 한 달에 한 번은 뭔가 터지고, 뭔가 울린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상한 실험을 한다는 얘기, 정부랑 뭔가 연관이 있다는 얘기.
전부 흘려들었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금, 이 진동과 그 사이렌이 겹쳐지는 순간, 뭔가 이상한 예감이 스쳤다.
'설마.'
우연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몸이 먼저 알고 있는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솥의 진동이 점점 강해졌다.
둥, 둥, 둥, 둥.
손끝에서 시작된 저릿함이 이제는 팔 전체를 뒤덮었다.
어깨까지, 목덜미까지 그 감각이 기어 올라왔다.
눈앞이 순간 캄캄해졌다.
어두웠다.
아주 어두운 화면 같은 게 눈앞에 펼쳐졌다.
마치 뭔가 오래된 기억을 보는 것처럼.
검은 배경 속, 희미한 역광.
빛이 어디서 새어 들어오는지도 알 수 없는데, 그 빛을 등지고 누군가의 그림자가 서 있었다.
형체는 흐릿했지만,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는 것 같았다.
길쭉하고, 반짝이는 것.
칼인지, 막대인지, 구분이 안 됐다.
소리는 거의 없었다.
다만 멀리서 발소리 같은 게 아주 작게 울렸다.
철벅, 철벅.
젖은 바닥을 걷는 소리 같았다.
'이게 뭐지.'
그림자가 조금씩 움직였다.
가까워지는 건지, 멀어지는 건지도 구분이 안 갔다.
시야가 흔들렸다.
마치 물속에서 보는 풍경처럼 모든 게 일그러져 보였다.
그리고 멈췄다.
눈앞이 다시 밝아졌다.
부엌이었다.
솥이 있었다.
손이 여전히 표면에 붙어 있었다.
숨을 몰아쉬었다.
방금 그건 뭐였을까.
꿈인가, 환상인가.
아니면 정말로 뭔가를 본 건가.
생각할 틈도 없었다.
진동은 계속되고 있었다.
오히려 아까보다 더 세졌다.
둥, 둥, 둥, 둥, 둥.
솥 표면의 문양이 이제는 확실하게 빛나고 있었다.
은은한 청록색 빛.
골동품이라기엔 절대 있을 수 없는 현상이었다.
빛은 문양의 선을 따라 흘렀다.
마치 핏줄 속을 흐르는 무언가처럼, 규칙적으로 점멸하며 퍼져나갔다.
심장이 목까지 올라온 것처럼 뛰었다.
숨이 가빠졌다.
'이거 위험한 물건이다.'
당장이라도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요란하게 울렸다.
그런데 몸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손을 떼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이 감각이 뭔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6년간 아무 힘도 없이 버텨온 시간들.
오늘 낮 박태식 앞에서 무력하게 밀려났던 순간.
어제 진월희 앞에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물러섰던 순간.
그 모든 무력함이, 지금 이 손끝의 진동과 겹쳐졌다.
이상한 확신 같은 게 들었다.
근거는 없었다.
그냥, 이게 나한테 온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만약 이게, 뭔가 특별한 물건이라면.'
만약 이게 정말로 특별한 물건이라면.
그동안 아무도 관심 없던 이 고물이, 사실은 아무나 만질 수 없는 물건이라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는 순간, 솥에서 빛이 한 번 크게 번쩍였다.
번쩍.
부엌 전체가 순간 청록색으로 물들었다.
벽에 걸린 냄비들, 싱크대, 창문까지 전부 그 빛에 잠겼다.
눈이 부셔서 순간 앞이 안 보였다.
그리고 어디선가, 낮고 무거운 울음소리가 들렸다.
짐승의 것인지, 사람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소리였다.
으어어어어-
바닥까지 울리는, 뼈에 스며드는 듯한 저음이었다.
피부에 소름이 쫙 돋았다.
솥 안에서.
분명히, 솥 안에서 울려 나온 소리였다.
아까까지 텅 비어 있던 그 안에서.
아무것도 없다고 확인했던 그 안에서.
나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손을 뗄 수도, 도망칠 수도 없었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눈만 크게 뜬 채로, 솥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청록색 빛이 점점 더 강해지며 솥 전체를 휘감기 시작했다.
빛의 소용돌이가 솥 위로 회전하듯 피어올랐다.
그 안에서 뭔가가 형체를 갖추려 하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뭔가... 나오려고 한다.'
그 생각이 든 순간, 빛이 폭발적으로 부풀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