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잿빛 모래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부서진 돌담과 타버린 장작더미만이 남아 있었다.
하늘은 온통 흙빛이었다. 마치 세상 전부가 재로 뒤덮인 듯, 해조차 흐릿하게 걸려 있었다.
이강은 그 폐허 한가운데 주저앉아 있었다.
작은 몸, 앙상한 팔다리, 흙먼지에 뒤엉킨 머리카락. 겨우 여덟 해를 산 아이의 몸이었다.
'검사대륙이라...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곳이로다.'
속으로는 서른 해를 넘게 살아온 사내의 넋이 들어앉아 있었으나, 겉으로는 배고픔에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어린아이였다.
품 안에는 낡은 검 한 자루가 안겨 있었다. 검신은 짙은 흑색이었고, 손잡이는 이상하게도 따뜻했다. 이름은 '잔'. 죽던 순간 그를 이곳으로 데려온 물건이었다.
차광민의 검이 가슴을 꿰뚫던 그 순간의 감각이, 아직도 등줄기에 얼음처럼 박혀 있었다.
찌르는 감각, 뜨거운 것이 등을 타고 흐르던 느낌, 그리고 서린의 눈동자.
'서린아. 니가 그럴 줄은... 아니, 이제 와서 그 이야기를 곱씹어봐야 무엇하겠느냐.'
이강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중요한 건 원한이 아니었다. 살아남는 것이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돌무더기, 재가 된 나무 기둥, 어딘가 부서진 항아리 조각. 사람의 흔적은 있었으되 사람은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 지경이 되었는가.'
생각해봐야 답이 나올 리 없었다. 지금 이강에게 필요한 것은 정보가 아니라 한 끼 밥이었다.
배에서 소리가 났다. 꾸르륵.
'허, 몸뚱이가 어리니 배고픔도 유난스럽구나.'
웃음이 나올 뻔했으나, 웃을 힘도 없었다. 이강은 검을 품에 안고 그대로 모래바닥에 쓰러졌다.
뺨에 닿는 흙바닥이 차가웠다. 그 차가움조차 감사할 지경이었다.
의식이 가물가물해지는 그 순간, 발소리가 들렸다.
느릿하고, 무겁고, 어딘가 절제된 걸음이었다.
'저건... 사람의 발소리인가.'
이강은 실낱같은 힘을 짜내 고개를 돌려보려 했으나, 목조차 말을 듣지 않았다.
"...아이가?"
낮고 굵은 목소리였다. 이강은 눈을 억지로 뜨려 했으나 시야가 흐렸다. 흐릿한 그림자 하나가 다가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가온 사내는 왼쪽 소매가 텅 비어 있었다.
한쪽 팔이 없는 사내였다.
'팔이... 하나뿐이로군.'
그 사실을 인지하는 와중에도, 계산은 멈추지 않았다. '싸움에서 잃었는가, 아니면 다른 사고인가.'
"...어이, 눈 좀 떠봐라."
사내의 손이 이강의 목덜미를 짚었다. 맥을 확인하는 손길이었다.
'맥을 짚는 방식이... 예사롭지 않구나.'
손끝의 힘, 짚는 위치,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가는 그 리듬. 무공을 익힌 자, 혹은 의술에 능한 자였다.
이강의 정신이 놓이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속마음은 계산을 놓지 않고 있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이강은 낡은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나무 벽 틈으로 아침 햇살이 스며들고, 어딘가에서 감자 삶는 냄새가 났다.
천장은 낮았고, 서까래에는 마른 풀이 걸려 있었다. 방 안 공기에는 흙냄새와 나무 태우는 냄새가 섞여 있었다.
'살았구나.'
안도보다 먼저 든 생각은 냉정한 확인이었다. 이강은 몸을 조금 움직여 보았다. 무겁고, 힘이 없었지만, 죽지는 않았다.
손끝을 꼼지락거려 보았다. 움직였다.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몸뚱이는 온전하군. 다행이라 해야 할지, 우스운 노릇이라 해야 할지.'
여덟 살 아이의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다행인지 우스운 일인지, 이강 스스로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방문이 열리고 그 사내가 들어왔다. 왼팔이 없는, 어제 그 사내였다.
나이는 사십 대 후반쯤 되어 보였고, 얼굴에는 오래된 흉터가 몇 줄 그어져 있었다. 눈빛은 조용했지만, 그 조용함 안에 뭔가 눌러 담은 무게가 느껴졌다.
걸음걸이도 예사롭지 않았다. 팔이 하나 없음에도 균형이 흔들리지 않았다.
"깨어났군."
사내가 짧게 말하며 감자가 든 나무 그릇을 침상 옆에 내려놓았다.
"먹어. 배 속이 비면 뭘 물어도 대답 못 할 테니."
이강은 잠시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이 사람...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
겉으로는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저씨는 누구세요?"
일부러 목소리를 가늘게 냈다. 아이답게, 순진하게.
사내는 잠시 이강을 내려다보았다. 대답이 늦었다.
"박도철이다."
사내가 짧게 답하며 등을 돌렸다.
"...넌 이름이 뭐냐."
"이강이요."
대답은 즉시 나왔다. 전생의 이름을 그대로 쓰는 것에 별다른 거리낌은 없었다. 어차피 이 몸이 이강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왔을 리는 없었으니, 뭐라 불러도 상관없는 노릇이었다.
'이름이야 아무렇게나 붙이면 그만이거늘.'
박도철은 별다른 반응 없이 방을 나갔다. 나가면서 문을 닫는 소리도 유난히 조심스러웠다.
이강은 감자를 집어 들었다. 뜨끈했다. 한 입 베어 물자 김이 확 올라왔다.
'허, 감자 하나가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나.'
서른 해를 넘게 산 넋이 담긴 몸이었지만, 배고픔 앞에서는 별 수 없었다. 이강은 정신없이 감자를 먹어치웠다.
껍질까지 씹어 삼킬 뻔했다. 손가락에 남은 온기, 입 안 가득한 포근한 맛. 전생에는 산해진미를 마다한 적도 있었으나, 지금은 감자 한 알이 그 어떤 잔치음식보다 귀했다.
'몸이 어리니 마음도 따라가는 모양이로다. 우습구나.'
그날 이후, 이강은 박도철의 오두막에 머물게 되었다.
변경의 외딴 곳, 마을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몇 채의 집들이 모인 자리였다. 박도철은 그곳에서 홀로 밭을 갈고 짐승을 잡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밭이랑은 가지런했고, 뒤뜰에는 장작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팔이 하나뿐인 사내가 어찌 이만큼의 살림을 혼자 감당하는지, 이강은 눈여겨보았다.
'저 나무를 팰 때 보니, 힘의 균형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예삿일이 아니야.'
"당분간 여기 있어."
짧은 말이었지만, 이강은 그 말속에 숨은 배려를 읽었다.
'이 사람, 겉으로는 무뚝뚝한데... 속은 다르구나.'
낮 동안 박도철은 별말이 없었다. 밭을 갈고, 우물에서 물을 긷고, 저녁이 되면 화로에 불을 지폈다. 이강이 옆에서 얼쩡거려도 딱히 내치지 않았다.
"불 좀 봐줘."
박도철이 무심하게 던진 말에, 이강은 화로 앞에 쭈그려 앉았다.
'불 보는 것 정도야, 서른 해 넘게 산 몸으로도 못할 리 없지.'
겉으로는 어설프게 나뭇가지를 뒤적이는 척했다. 실은 화력의 세기까지 가늠하며 조절하고 있었으나, 그런 티를 낼 필요는 없었다.
밤이 되어 이강이 잠든 척하고 있을 때, 방문 밖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들렸다.
박도철이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낮에 벗어둔 이강의 검, '잔'이었다.
"...이 검, 예사 물건이 아니로군."
박도철의 중얼거림이 어둠 속에 낮게 퍼졌다.
검신에서 아주 미세한 진동이 일었다. 마치 무언가에 반응하듯.
이강은 눈을 감은 채로 그 소리를 들었다.
'설마... 검이 반응하는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박도철이 그 검의 정체를 알아채기라도 하면, 지금 쌓아둔 위장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제발, 그저 낡은 검으로만 보아주길.'
숨소리 하나도 조심스러워졌다. 심장이 뛰는 소리마저 방 밖으로 새어나갈까, 그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초조했다.
박도철의 손끝이 검신을 훑는 소리가 들렸다. 스르릉, 아주 미미한 마찰음.
'저 손길. 검을 다루어본 자의 손길이야.'
그저 무기를 살피는 손이 아니었다. 검의 균형과 무게, 기운의 흐름까지 짚어보는 손길이었다.
하지만 박도철은 아무 말 없이 검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녀석, 예사 아이가 아니야."
방 밖 발소리가 멀어졌다.
이강은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방 안은 여전히 어두웠고, 벽 틈으로 스며드는 달빛만이 희미하게 바닥을 밝히고 있었다.
'들켰나. 아니, 아직은 아니다. 하지만 저 사내, 눈치가 예사롭지 않구나.'
검을 품에 끌어당기는 손끝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박도철... 대체 어떤 자인지, 앞으로 두고 보아야 할지고.'
여덟 살 아이의 얕은 숨소리를 흉내 내며, 이강은 그렇게 어둠 속에서 다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다음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저자가 눈치를 챈다면, 그전에 내가 먼저 움직여야 할지고.'
바깥에서 밤바람이 오두막 문을 흔들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어둠 속을 가르며 지나갔다. 그 소리에 이강의 눈이 다시 슬쩍 떠졌다.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강은 그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