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문을 넘어서자마자 나는 눈앞의 풍경에 잠깐 말을 잃었다.
넓은 평원이었다. 저 멀리 하늘까지 닿을 듯한 흰 신전이 서 있었고, 그 앞에 수백 명은 될 법한 무리가 두 편으로 갈려 맞서 있었다. 한쪽은 흰 갑주를 입은 병사들, 반대쪽은 낡은 갑옷과 검은 옷을 뒤섞어 입은 무리였다.
바람이 이상했다. 풀냄새도 흙냄새도 나는데, 그 밑에 뭔가 다른 냄새가 섞여 있었다. 쇠 냄새랑 비슷한데 더 짙고, 좀 역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게 피 냄새였다.
"저기요, 이게 원귀 몇 마리 정리하는 임무예요?"
내 목소리가 좀 떨렸던 것 같은데, 그건 인정하고 싶지 않다.
서다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녀도 이 광경을 예상 못 한 눈치였다.
"···이상하네요. 위면 정보에는 이런 게 없었는데."
"정보가 잘못됐다는 거예요, 지금?"
"아니면 누가 은폐했거나요."
말투는 태연했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걸 보고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 사람도 지금 이 상황을 감당 못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보통 이런 거 자주 있어요? 갑자기 전쟁터로 순간이동?"
"아니요. 처음 봐요."
"처음 봐요라니. 그럼 저희 지금 뭐예요, 임상실험 대상이에요?"
"조용히 하세요. 들키면 큰일 나요."
큰일이 뭔지는 안 알려줬다. 그런데 그 말투에서 이미 반쯤은 큰일이 나 있는 느낌이 들었다.
전장 한복판, 흰 신전 병사들에 둘러싸인 곳에서 한 남자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검은 도포 자락이 바람에 휘날렸고, 그 아래 눈빛은 짐승처럼 형형했다. 검이 움직일 때마다 병사들이 퍽, 퍽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갔다.
"저 사람 뭐예요?"
"몰라요. 위면 원주민인 것 같은데."
"저 정도 실력이면 원주민이 아니라 그냥 재난이죠."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 한 명이 저렇게 많은 병사를 상대로 밀리지 않는 걸 보고 있으니, 이건 인간의 싸움이 아니라 다른 뭔가의 싸움처럼 보였다.
병사들의 창끝이 부딪히는 소리, 갑주가 긁히는 소리, 누군가의 비명이 뒤섞여서 들려왔다. 나는 그 소리들을 하나하나 세고 있었다. 왜 그런 짓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무서워서 딴생각을 하려던 거였을 거다.
남자 뒤로 흰 옷을 입은 여인이 사슬에 묶여 있었다. 여인은 고개를 떨군 채 힘없이 늘어져 있었는데, 남자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그쪽을 힐끗거리는 게 보였다.
"설화야, 조금만 기다려."
남자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절박함이 목소리에 짓눌려 있었다.
그 이름을 듣자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연이 있는 게 뻔했다. 사연 있는 사람들 싸움에는 절대 끼면 안 된다는 게 내 인생 철칙이었는데, 지금 그 철칙을 지킬 수 있을지 좀 걱정이 됐다.
대신전 병사들이 그를 향해 창을 겨눴다.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남자 혼자서 저걸 다 감당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그의 검이 움직일 때마다 병사들이 실제로 쓰러졌다. 압도적인 힘이었다.
"저 사람 이길 것 같아요, 질 것 같아요?"
"글쎄요. 근데 그게 우리한테 왜 중요하죠?"
"그냥 궁금해서요."
"안 궁금해 하셔도 돼요."
서다은의 목소리가 좀 날카로워졌다. 아마 그녀도 속으로는 계속 셈을 하고 있었을 거다. 여기서 뭐가 잘못되면 어떤 식으로 도망칠지, 어느 방향이 안전한지, 그런 것들.
"저희 저거 구경만 하면 돼요?"
"당연하죠, 우리 일이 아니에요."
서다은이 딱 잘라 말했다. 그런데 그 목소리에도 확신이 없었다.
나는 그 대답을 믿고 싶었다. 정말로 믿고 싶었다. 그냥 구경만 하다가 문이 다시 열리면 조용히 넘어가는 것, 그게 제일 좋은 시나리오였다.
'그럴 리가 있냐.'
머릿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 상황에서까지 참견을 하다니, 정말 대단한 놈이다.
'저기 봐라. 저 도포 입은 놈, 딱 봐도 심상찮은 기운이다. 저런 거랑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조용히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으냐?'
"넌 좀 조용히 해줄래."
내가 중얼거리자 서다은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손을 저었다.
그 순간, 남자의 검에서 검은 기운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마치 파도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그 기운이 대신전 병사들을 휩쓸었다.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하늘로 치솟았다.
땅이 흔들렸다. 발밑에서 느껴지는 진동이 뼈까지 전해졌다. 나는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고 한쪽 무릎을 살짝 굽혔다.
"뭐, 뭐예요 저거!"
"몰라요, 저도 처음 봐요!"
우리 둘 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게 이 상황에서 제일 큰 문제였다. 알아야 대처를 하는데, 모르니까 그냥 서서 눈만 크게 뜨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파동의 끝자락이, 우리가 서 있는 쪽으로 밀려왔다.
"엎드려요!"
서다은이 소리쳤지만 늦었다. 검은 기운이 내 몸을 직격했다.
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데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눈앞이 새하얗게 번쩍였다가, 뭔가 뜨거운 게 배 속에서 요동쳤다. 훈련 때 느꼈던 그 감각과 비슷했지만, 몇 배는 더 강렬했다.
배 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는 느낌이 났다. 마치 내 안에 있던 그놈이 그 기운에 반응해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반갑다는 건지 경계한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거 뭐냐.'
머릿속의 목소리도 놀란 기색이었다. 저놈이 놀라는 걸 보니 나는 더 무서워졌다. 저놈도 모르는 게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뭐야, 이거···."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나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코에서 뜨끈한 게 흘렀다. 손을 대보니 코피였다.
손끝에 묻은 피를 보면서 든 생각은 딱 하나였다. 이거 병원비 청구할 데도 없겠구나.
전장의 소음이 순간 멈췄다. 검은 도포의 남자가 검을 늘어뜨린 채 나를 돌아봤다. 그의 눈빛이 이상하게 흔들렸다.
정지된 시간 속에서 나는 그의 눈을 봤다. 짐승 같던 눈빛이 아까와는 좀 달랐다. 뭔가를 알아본 사람의 눈빛이었다.
"···너는."
남자가 뭔가 말하려는 순간, 대신전 쪽에서 누군가 외쳤다.
"저 자다! 이질적인 기운을 지닌 자가 나타났다!"
순식간에 수백 개의 시선이 나에게 쏘아졌다. 흰 갑주의 병사들도, 검은 도포의 남자도, 심지어 사슬에 묶인 여인마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그 많은 눈이 한꺼번에 나를 향하는 순간, 나는 뭔가 아주 잘못된 곳에 발을 들였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이건 원귀 정리가 아니었다. 이건 그냥 다른 세계의 전쟁이었고, 나는 그 전쟁 한복판에 코피를 흘리며 서 있는 이방인이었다.
"서다은 씨, 저거 뭐예요? 왜 다들 나 봐요?"
대답이 없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서다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서다은 씨."
"..."
"저기요, 좀 대답해봐요. 무서우니까."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녀의 시선은 나를 지나쳐 대신전 병사들 쪽으로, 그리고 검은 도포의 남자 쪽으로 빠르게 오갔다. 마치 이 상황에서 도망칠 구멍이 있는지 계산하는 눈빛이었다.
"···망했다."
그녀가 중얼거린 그 한마디가, 지금 이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요약하고 있었다.
주변의 병사들이 창을 고쳐 잡는 소리가 들렸다. 그 창끝이 이번엔 남자가 아니라 나를 향하고 있었다. 도망칠 곳은 등 뒤의 문뿐인데, 그 문이 지금 열려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