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전직 요원, 신목의 검을 들다

1화

새벽 공기가 차가웠다. 나는 별채 마루에 걸터앉아 마당을 내려다봤다. 낡은 기와 틈으로 이슬이 스며 있었고, 마른 감나무 가지 하나가 바람에 흔들렸다. (오늘도 다르지 않은 하루가 시작되는군.) 10년째였다. 강씨 가문의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불렀다. 폐인. 말도 제대로 못하고, 검 한 자루 들 힘도 없는 껍데기.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이 몸 안에 다른 자가 들어와 있다는 것을. 정민준. 국정원 특수요원이었던 나. 국보 하나를 되찾으러 갔던 그 밤, 매복에 걸려 숨이 끊어졌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차가운 총구, 어둠 속에서 터진 총성, 그리고 가슴을 관통하는 통증. 그 마지막 순간의 감각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몸 어딘가에 새겨져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나는 이 몸 안에 있었다. 열 살 어린 몸, 이미 폐인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로. 처음엔 믿을 수 없었다. 말을 하려 해도 입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손끝 하나 까딱하는 데도 온몸의 힘을 짜내야 했다. 그때의 절망감이 지금도 생생했다. 하지만 시간은 흘렀고, 나는 이 몸에, 이 삶에 적응했다. 그리고 조용히, 아주 조용히 준비를 해왔다. "태호 님, 일어나셨어요?" 류아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렸다.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삐걱, 낡은 마루가 소리를 냈다. 류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에는 죽 한 그릇이 들려 있었다. "오늘은 좀 이르게 준비했어요. 어제 남은 곡물로..." 그녀는 말을 흐리며 죽그릇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작은 손이 그릇을 잡을 때마다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그 손끝을 봤다.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밖에서 얼마나 일을 하고 다니는 건지.) "너는 먹었어?" "저는... 이따가요." 대답이 빨랐다. 늘 그런 식이었다. 나는 죽그릇을 내려다봤다. 김이 옅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곡물이 부족한지 죽은 유난히 묽었다. (이걸 나눠 먹자고 하면 또 거절하겠지.) 그럼에도 나는 숟가락으로 죽을 반쯤 떠서 그녀 쪽으로 밀었다. "됐어요. 태호 님이나 드세요." 류아는 손을 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익숙한 거절이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 끝에 살짝 떨림이 있었다. 류아는 열아홉이었다. 내가 이 가문에서 완전히 버림받았을 때, 유일하게 스스로 따라나선 사람. 다른 시종들은 모두 떠났지만 그녀만 남았다. 이유를 물은 적은 있었다. 대답은 없었다. 그저 웃기만 했다. 그 웃음이 어딘가 애처롭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지금은 조금 알 것 같기도 했다. 죽을 먹는 동안 창밖에서 마당쇠들의 대화가 흘러들어왔다. "그 폐인 도련님, 오늘도 저기 있나 보네." "쯔쯔, 저런 걸 아직도 가문 이름 아래 두는 게 신기하다니까." "먹이는 밥값도 안 나오는 놈을 왜 저리 끼고 도는지."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숟가락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말들은 이미 10년째 들어온 것이었다. (감정을 소모할 이유가 없지.) 류아의 얼굴이 살짝 굳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창밖을 향해 뭐라 한마디 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가, 결국 다시 다물었다. 그 작은 몸짓 하나에도 나는 마음이 쓰였다. (저 녀석은 늘 나 대신 화를 내는군.) 그때 류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태호 님, 그... 들으셨어요? 진태준 도련님이 다시 이쪽으로 온다는 소문이요." 숟가락을 든 손이 멈췄다. 진태준. 진씨 가문의 3남. 서열 7급의 무인. 나를 몇 년 동안 노리개처럼 다뤘던 자. 마지막으로 그와 마주쳤던 날, 갈비뼈가 세 대 부러졌었다. (그날의 통증은... 이 몸이 기억하고 있어.) 그날 그자의 발끝이 옆구리를 밟아왔던 감각이,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흙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던 그 순간. 그때의 나는 정민준의 기억이 완전히 자리 잡기 전이라, 오롯이 이 육신의 고통만을 견뎌내야 했다. "왜 다시 온다는 거지?" "모르겠어요. 그냥... 요즘 여명성 안에 뒤숭숭한 소문이 돌아서요. 조설아 아가씨 쪽도..." 그녀는 그 이름을 꺼내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조설아. 전 혼약자. 내가 폐인으로 낙인찍히자마자 일방적으로 파혼을 선언한 여자.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이 가슴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그건 이 몸의 반응인지, 아니면 정민준의 감정이 스며든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파혼 선언을 하던 날, 그녀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부친의 옆에 서서 짧은 몇 마디를 남기고 돌아섰을 뿐이었다. 그날 이후로 그녀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서늘함이 가슴을 스쳤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원망보다는, 이 육신에 남아 있던 오래된 상처 같은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괜찮아. 신경 안 써." 나는 짧게 대답하며 숟가락을 다시 들었다. 류아는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방 안에는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창밖 마당쇠들의 웃음소리도 어느새 멀어져 있었다. 식사를 마친 뒤 나는 마당으로 나와 낡은 목검을 들었다. 10년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훈련. 남들 눈에는 그저 미친 짓처럼 보였을 그 반복.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 몸 어딘가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처음 이 목검을 들었을 때는 팔 한 번 제대로 뻗지도 못했다. 열 살 어린 육신은 근육이라 할 것도 없이 가늘고 약했다. 하지만 매일 아침, 매일 밤, 나는 이 검을 놓지 않았다. 정민준으로 살았던 기억 속의 검술을 하나씩 되짚으며, 이 몸에 맞는 방식으로 다시 새겨넣었다. 남들이 보기엔 헛짓처럼 보이는 반복 동작이었겠지만, 그 안에는 10년치의 계산과 인내가 쌓여 있었다. 목검을 휘두르는 순간, 손끝에서 낯선 떨림이 지나갔다. (...뭐지, 이건.) 찌릿, 팔뚝을 타고 올라오는 감각이 있었다. 마치 몸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반응하는 느낌. 나는 손을 멈추고 팔을 내려다봤다. 아무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느꼈다. 아주 미약한, 낯선 파문 같은 것을. 나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발끝에 힘을 주고, 목검의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호흡을 가라앉히고 다시 한번 검을 내리쳤다. 쐐액.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마당에 낮게 울렸다. 그 순간, 아까와 같은 떨림이 다시 손끝에서 시작됐다. 이번엔 조금 더 선명했다. 찌릿, 하고 팔뚝을 타고 올라오는 감각이 어깨까지 퍼졌다. (이건... 단순한 근육 반응이 아니야.) 정민준으로 살아온 세월 동안, 수없이 많은 부상과 훈련을 겪었다. 그 몸이 기억하는 감각과는 분명히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류아가 마당 끝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걱정과 의아함이 함께 섞여 있었다. "태호 님, 오늘도 무리하지 마세요." "...알겠어." 나는 목검을 다시 들었다. 그리고 다시 휘둘렀다. 그 낯선 감각은 여전히 몸 안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마치 씨앗 하나가 땅속에서 아주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있는 것처럼. 몇 번의 휘두름이 더 이어졌다. 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류아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말은 없었지만, 그 시선 안에는 걱정 이상의 무언가가 담겨 있는 듯했다. 나는 그녀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녀는 그제야 옅게 웃으며 몸을 돌려 부엌 쪽으로 향했다. 정적이 흘렀다. 마당 위로 스며드는 오후의 햇빛이 유난히 붉었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든 바람이 목덜미를 스쳤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바람이었지만, 그 결이 어딘가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익숙한 풍경 속에 작은 균열이 하나 생긴 것처럼. (...이건 시작일 뿐이야.) 나는 그 감각의 근원을 아직 알지 못했다. 하지만 무언가가 깨어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 예감은, 며칠 뒤 진태준이 여명성 시장 골목에 다시 나타나는 순간 현실이 될 참이었다.
첫 화입니다 목록 다음화 ›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