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골목 어귀에 진태준이 나타났을 때, 나는 이미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직감했다.
그의 걸음걸이는 여유로웠다.
서두르지 않는 발걸음, 옷깃을 매만지는 손짓 하나하나가 마치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듯했다.
달빛이 그의 어깨 위로 떨어져 옷자락을 은은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 시간에 여기서 뭐 하나 싶었는데."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재밌는 걸 놓치지 않는 성격인가 보군."
남자들이 뒤로 물러났다.
방금까지 나를 둘러싸고 있던 그들의 표정에 갑작스러운 긴장이 스쳤다.
"진 도련님..."
누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지만, 진태준은 손을 들어 그 말을 끊었다.
"너희는 빠져. 이건 내가 처리한다."
그의 손짓 한 번에 남자들이 순순히 골목 밖으로 사라졌다.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마침내 완전히 사라지자 골목 안에는 오직 세 사람만 남았다.
정적이 흘렀다.
바람이 벽 사이를 스치며 낮은 소리를 냈다.
류아가 내 옆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손이 내 팔을 붙잡았다.
"태호 님, 괜찮으세요?"
목소리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괜찮아."
나는 옆구리를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숨을 쉴 때마다 통증이 옆구리에서 등줄기로 퍼졌다.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지만, 무릎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감출 수는 없었다.
진태준이 나를 훑어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 시선은 마치 물건을 평가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3년 만인가."
그가 천천히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아직도 그 몰골 그대로군. 시간이 지나도 변하는 게 없나 봐."
그의 시선이 류아에게로 옮겨갔다.
류아가 순간 몸을 굳혔다.
"저 계집이 빚을 많이 졌더라고."
진태준이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
"내가 그 빚을 사들였지."
(...빚을 사들였다고?)
순간 이해가 됐다.
류아가 진 빚, 그 자체가 처음부터 나를 압박하기 위한 미끼였던 것이다.
그가 이 골목까지 걸음을 옮긴 이유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는 것도.
"너, 그럼 처음부터..."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눈치가 없진 않네."
진태준이 낮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골목의 좁은 벽 사이에서 이상하게 크게 울렸다.
"조설아 아가씨가 요즘 심심하다더군."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옛 정혼자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다는데, 그냥 궁금해하는 걸로 끝낼 순 없잖아?"
조설아의 이름이 나오자 가슴 한쪽이 서늘하게 조여왔다.
오래 눌러둔 감정이 순간적으로 표면 위로 떠오르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감정을 소모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류아를 등 뒤로 세우고 진태준을 마주 봤다.
발끝에 힘을 주고 자세를 낮췄다.
"그 빚, 얼마지."
"돈으로 해결하려고?"
진태준이 실소를 터뜨렸다.
"하하, 네가 무슨 돈이 있어서."
스릉.
그가 검을 뽑았다.
달빛이 검신에 걸리며 푸르게 번졌다.
그 빛깔이 골목의 어둠과 대비되어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그냥 몸으로 갚는 게 어때."
진태준이 검끝을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오늘은 좀 더 확실하게 새겨줄까 했거든."
나는 목검을 고쳐 잡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손바닥에 밴 땀이 목검의 손잡이를 미끄럽게 만들었다.
(이 몸으로는... 승산이 없어.)
(하지만 물러날 수는 없다.)
류아가 내 등 뒤에서 작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 하나가 지금 이 골목 안에서 내가 지켜야 할 게 무엇인지 다시 한번 일깨워줬다.
진태준이 먼저 움직였다.
발끝이 지면을 박차는 순간, 그의 신형이 흐릿하게 번졌다.
서열 7급의 속도.
이 몸은 그것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눈으로 좇는 것조차 벅찼다.
퍽.
검의 옆면이 어깨를 때렸다.
둔한 통증이 뼈까지 파고들었다.
나는 뒤로 밀려나며 담벼락에 부딪혔다.
등뼈를 타고 올라오는 충격에 숨이 턱 막혔다.
류아가 소리쳤다.
"태호 님!"
그 목소리가 통증보다 먼저 귓속을 파고들었다.
(...일어나야 해.)
나는 손끝으로 흙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손톱 밑으로 차가운 흙이 파고드는 감각이 느껴졌다.
입가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비릿하고 쇳내가 도는 그 맛이 정신을 오히려 또렷하게 만들었다.
진태준이 다시 다가왔다.
발소리가 유난히 여유로웠다.
"왜 자꾸 일어나."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그냥 누워 있으면 편할 텐데."
검이 다시 휘둘러졌다.
나는 목검으로 막아섰다.
쾅.
목검이 절반으로 부러졌다.
부러진 단면이 하얗게 드러났다.
(막을 힘조차... 이 정도인가.)
손목이 저릿하게 울렸다.
부러진 목검 조각이 바닥에 떨어지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손아귀에 남은 것은 짤막한 나무 조각뿐이었다.
진태준의 검끝이 이번엔 내 목을 향해 다가왔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검신에 반사된 달빛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그 빛 안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조설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여기서 끝인가.)
그 순간, 가슴 안쪽에서 그 낯선 맥동이 갑자기 거세게 뛰었다.
쿠웅.
마치 심장이 두 개가 된 것처럼, 몸 안쪽에서 이질적인 힘이 솟구쳤다.
피부 아래로 뜨거운 무언가가 빠르게 번져나가는 감각이었다.
류아가 절박하게 외쳤다.
"태호 님, 안 돼요!!"
검끝이 목젖 바로 앞에서 멈췄다.
아니, 멈춘 게 아니었다.
무언가가 그것을 막고 있었다.
챙.
쇠와 쇠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골목 안에 울렸다.
분명 아무것도 없던 자리였다.
진태준의 표정이 굳었다.
"...뭐야, 이건."
그의 검이 허공에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것처럼,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내 등 뒤에서, 낡은 방 안 벽에 걸려 있던 것과는 다른, 익숙한 검명이 울리고 있었다.
스르릉.
그 소리는 분명 이 골목 안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내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손바닥은 텅 비어 있었고, 부러진 목검 조각만이 발밑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설마.)
골목 저편, 흙바닥 위로 희미한 하얀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 빛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미세하게 일렁였다.
빛이 향하는 방향을 눈으로 좇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 방향은, 내가 방 안 깊숙이 숨겨두었던 그 검이 있는 곳이었다.
아버지의 유품, 백련검.
진태준이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뒤로 반보 물러났다.
그의 얼굴에 걸려 있던 여유로운 웃음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이게 무슨..."
그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흔들림이 느껴졌다.
류아도 그 빛을 보았는지, 숨을 죽인 채 골목 저편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내 팔을 더 세게 붙잡았다.
나는 그 빛의 방향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분명 방 안에 숨겨두었던 검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이 순간, 스스로 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