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찾았다, 그 냄새.]
혈랑왕의 이빨이 코앞까지 닥친 순간, 나는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막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거밖에 할 게 없었다.
솔직히 그 순간 머릿속에 스친 생각은 거창한 각오 같은 게 아니었다. '아, 이번 생은 여기까지인가' 하는 허무한 계산이었다. 청림촌 위약금은 어쩌고, 저 은화 세 냥은 누구 손에 들어가나, 그런 잡생각들이 순서 없이 지나갔다. 죽기 직전에도 사람은 참 쓸데없는 걸 생각한다.
쩌엉-.
검과 이빨이 맞부딪히는 대신, 뭔가 다른 것이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검은 그림자였다. 사람 형체였다.
바람이 먼저 왔다. 살갗이 벗겨질 듯한 냉기가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고, 그 뒤를 따라 묵직한 기운이 공간을 눌렀다. 숨이 턱 막혔다. 위협적인 존재가 하나 더 늘어난 건데도 이상하게 압박감이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퍼억.
혈랑왕의 몸이 통째로 옆으로 튕겨 나가떨어졌다. 나무 두 그루를 부러뜨리고서야 멈췄다. 부러진 나무 밑동에서 하얀 속살이 드러났고, 그 위로 잎사귀가 눈처럼 흩날렸다.
"뭐, 뭐야-"
임건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도 눈앞의 뒷모습을 보고 말이 안 나왔다.
강무헌이었다.
두 달 전 그 뒷모습 그대로였다. 옷자락 하나 바뀐 게 없는데도 뭔가 더 날카로워진 느낌이 들었다. 사람이 어떻게 등만 보이고도 저렇게 위압적일 수 있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오, 오셨어요?"
목소리가 반가움보다는 어이없음에 더 기울어 있었다. 두 달째 소식도 없이 사라졌던 사람이 이런 순간에 나타나는 건, 반갑기도 하고 좀 짜증나기도 했다. 연락 한 번 없다가 죽기 직전에 짜잔 나타나는 거, 이거 완전 드라마 남주 클리셰 아닌가. 그것도 나쁜 쪽으로.
강무헌은 대답 없이 검을 겨눈 채 혈랑왕 쪽만 보고 있었다. 놈이 다시 일어나 몸을 털었다. 온몸에서 흙과 나뭇조각이 떨어져 내렸다. 붉은 눈이 이번엔 강무헌을 향했다.
[네놈은···.]
혈랑왕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방금까지 나를 씹어먹을 듯 노려보던 그 위풍당당한 짐승이, 강무헌 하나 등장했다고 저렇게 목소리가 갈라지는 게 신기했다. 대체 이 남자 정체가 뭔가 싶었다. 아니, 그건 이미 여러 번 궁금해했던 문제였고, 그때마다 답을 못 들었다.
[그 냄새, 그 검기···. 알겠다. 물러나마.]
놈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등을 돌려 바람처럼 사라졌다. 붙잡을 새도 없었다. 뭔가 압도적으로 밀리는 판세에서 알아서 후퇴하는 모습이었다.
산등성이를 타고 멀어지는 발소리가 점점 희미해졌다. 그러다 완전히 사라졌다. 방금까지 심장을 조여오던 그 살기도 함께 걷혔다.
남은 건 정적과 부러진 나무 두 그루, 그리고 어안이 벙벙한 세 사람뿐이었다.
"살아있었네요."
내가 겨우 뱉은 말이었다. 다리에서 힘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억지로 버티고 서 있었지만 무릎 안쪽이 후들거렸다. 강무헌이 나를 돌아봤다.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그 눈에 뭔가 다른 게 스쳐 지나갔다. 안도인지 다른 무엇인지 구분이 안 됐다.
"살아 있으라고 했지."
"살아있잖아요."
"위험한 원정이었다는 것 정도는 알아야지."
"그거야 사후에 알았죠. 몰랐으면 안 왔겠어요?"
말이 좀 뾰족하게 나갔다. 두 달을 소식도 없이 사라졌던 사람한테 이런 소리 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그때는 그냥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죽다 살아난 사람 특유의 신경질이었다.
임건우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검을 거뒀다. 손이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강무헌 님, 어떻게 아시고···"
강무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나를 붙잡고 몸 상태를 훑었다. 손끝이 내 손목에 닿는 순간, 뭔가 서늘한 기운이 흘러들어 왔다. 검원기 흐름이 순간적으로 안정되는 느낌이었다.
손끝이 스칠 때마다 몸속에서 요동치던 기운이 하나씩 자리를 찾아가는 게 느껴졌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남한테 내 안을 이렇게 낱낱이 들여다보이는 게 편할 리 없는데도, 이번엔 그냥 가만히 있었다. 반박할 기운도 없었다.
"검원기가 흔들리고 있다."
"방금 죽을 뻔했으니까요."
"아니, 그전부터다. 두 달 만에 이 정도 진전은···."
말을 끝맺지 않고 강무헌이 나를 응시했다. 그 시선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마치 뭔가를 확인하려는, 혹은 확신하는 눈빛이었다.
침묵이 길어졌다. 임건우는 눈치껏 나무 저편으로 자리를 옮겨 짐을 살피는 척했다. 나는 그 시선을 견디다 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
"영감님이 뭔가 안 걸요?"
무심코 튀어나온 말에 강무헌의 눈썹이 처음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부르나."
"네?"
"됐다. 나중에 얘기하자."
또 저 화법이었다. 중요한 걸 뒤로 미루는 화법. 이 남자는 늘 이런 식이었다. 딱 결정적인 순간에 문을 열어놓고는, 정작 그 안으로 들어가려 하면 슬쩍 닫아버리는 식.
다만 이번엔 조금 다른 게 있었다. 강무헌이 도와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지만, 이렇게 대가 없이 넘어가는 것도 이상했다. 평소라면 뭔가 조건이든 대가든 슬쩍 끼워넣었을 텐데, 오늘은 그냥 훌쩍 나타나 목숨 하나 구해주고 말없이 서 있기만 했다. 뭔가 빚이 하나 더 쌓인 느낌이었다. 이자까지 붙어서.
'저 인간, 뭔가 감추는 게 있다.'
영감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건 알고 있었잖아요."
'이번엔 좀 다르다. 저놈이 저렇게 서두르는 건 처음 본다.'
영감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능글맞은 여유가 없었다. 뭔가 진짜로 신경 쓰이는 게 있다는 뜻이었다. 그 점이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영감이 저렇게 정색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으니까.
"뭘 안다는 건데요? 좀 알려주면 안 돼요?"
'모른다. 냄새만 맡을 뿐이지.'
"냄새요."
'저놈 몸에서 나는 냄새가··· 예전에 한 번 맡아본 적 있는 것 같은데, 기억이 흐릿하다.'
도움이 안 되는 정보였지만, 그거라도 있는 게 나았다. 강무헌은 그런 대화가 오가는 줄도 모른 채 다시 짐을 챙기고 있었다.
강무헌은 다시 짐을 챙기며 낡은 목갑에서 뭔가를 꺼냈다. 죽간의 조각이었다. 비어있던 후반부의 일부인 듯했다. 겉면에 새겨진 글자들은 흐릿했지만, 예전에 봤던 것과 필체가 비슷했다.
"이거로 뒷부분 실마리는 잡을 수 있을 거다."
"그럼 완전한 건 아니고요?"
"완전한 건 위험하다."
"왜요?"
강무헌은 대답 대신 조각을 내 손에 쥐여줬다. 서늘한 감촉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죽간이라기엔 이상하게 무거웠다. 종이 한 장 무게가 아니었다.
"검원기가 통제 안 되면 죽는다. 천천히 익혀라."
"그럼 통제되면요?"
"그때 얘기하자."
역시나였다. 이 남자는 위험한 부분에 대해서만 유독 성실하게 경고하고, 정작 궁금한 뒷부분에 대해서는 늘 저 소리였다. 나중에 얘기하자, 그때 얘기하자. 나중이 대체 언젠데.
그 말을 끝으로 강무헌은 다시 산길 저편으로 사라졌다. 이번에도 언제 돌아올지 말이 없었다. 뒷모습이 나무 사이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저 서서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임건우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저기, 저 사람이 그 강무헌 님이라고요? 소문으로만 듣던?"
"뭐 소문이 도는데요?"
"그, 청림촌 이북 산맥 지나갈 때 혼자서 요괴 대장을 셋이나 잡았다는···"
"그거 믿어요?"
"방금 눈으로 봤잖아요! 혈랑왕이 도망가는 걸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도 방금 눈으로 보고도 안 믿기는 판이었으니까.
*
청림촌으로 돌아가는 길, 임건우는 계속 뒤를 돌아보며 뭔가 중얼거렸다. 위약금이니 선금이니 하는 소리였다. 아마 이번 원정 실패로 계약이 틀어질까 봐 노심초사하는 모양이었다.
"의뢰주한테는 뭐라고 보고하죠? 혈랑왕이 나타났다가 그냥 갔다고 하면 믿겠어요?"
"믿든 안 믿든 사실인데요."
"그러니까요, 사실이 문제라니까요. 강무헌 님이 나타나서 쫓아냈다고 하면 다들 헛소리한다고 할 거예요."
"진짜인데 헛소리로 몰리는 거, 그거 은근 자주 있는 일이잖아요."
임건우는 그 말에 딱히 반박을 못 했다. 그는 계속 뭔가를 손가락으로 세며 걷다가, 결국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손에 쥔 죽간 조각을 만지작거리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강무헌이 그렇게 급하게 나타난 이유, 혈랑왕이 나를 지목한 이유, 그리고 산 저편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그 서늘한 시선.
생각할수록 앞뒤가 안 맞았다. 혈랑왕은 애초에 왜 나를 노렸을까. 그냥 아무나 눈에 걸리면 잡아먹는 놈이 아니었다. 놈의 붉은 눈이 나를 정확히 겨누고 있었다는 게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강무헌의 그 냄새 운운하던 말. 영감도 흐릿하게만 기억한다는 그 냄새가, 대체 뭐길래.
마을 어귀에 들어서기 직전, 나는 분명히 느꼈다. 누군가가 나무 위에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 방금 혈랑왕이 물러날 때 느꼈던 그 압박과는 다른 종류의 시선이었다. 좀 더 조용하고, 좀 더 오래 지켜본 것 같은 느낌.
돌아봤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임건우는 눈치도 못 채고 여전히 위약금 얘기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 혼자만 느낀 시선인가 싶어서 영감에게 물어봤지만, 영감도 이번엔 대답이 없었다.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불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