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혼돈을 품은 후계자

4화

며칠 뒤, 나는 저택 뒤편 숲으로 향했다. 낮에는 사람들의 눈이 있으니, 밤이 아니면 안 되는 일이었다. 아사의 심장이 세운 규칙을 지키자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나는 등불 하나 없이 어둠 속을 걸었다. 발밑에서 낙엽 밟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바스락. 바스락. 특종병 시절 야간 훈련의 감각이 이럴 때 도움이 됐다. 다행이다. 몸은 어려도 감각은 남아 있었다. 그때는 완전군장 메고 산길을 탔지만 지금은 잠옷 위에 겉옷 하나 걸친 게 전부였다. 격세지감이라면 격세지감이었다. 저택 담벼락을 넘을 때는 잠깐 숨을 죽였다. 경비병들의 순찰 간격은 이미 사흘 전부터 파악해 둔 상태였다. 이 시간대에는 동쪽 문 쪽에 몰려 있으니, 서쪽 숲 방향은 비어 있다. 계산대로였다. 숲 한가운데, 오래된 고목 앞에 자리를 잡았다. 나무 둥치는 두 사람이 팔을 벌려도 다 감싸지 못할 만큼 굵었고, 뿌리는 땅 위로 뱀처럼 솟아 있었다. 앉기에는 그럭저럭 편한 자리였다. 나는 눈을 감고 가슴에 손을 얹었다. "다시 나와봐." 『불렀느냐.』 구체가 낮게 진동하며 응답했다. 가슴 안쪽에서 느껴지는 진동은 매번 미묘하게 달랐다. 오늘은 조금 무거운 쪽이었다. "힘을 써보고 싶은데,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 『혼돈 공법은 억지로 끌어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목소리가 말했다. 『조건이 있다.』 "조건?" 『감정이다. 특정한 감정 상태에서만 힘이 미약하게 발현된다.』 나는 미간을 좁혔다. "어떤 감정인데?" 『직접 찾아라. 나도 정확히는 모른다. 매번 다른 사람에게서 다르게 발현되니까.』 "그건 무책임한 대답 아닌가." 『책임질 마음이 있었으면 애초에 심장을 잃지 않았겠지.』 말은 안 되는데 반박도 안 됐다. 이 구체는 가끔 이런 식으로 말장난으로 상황을 넘겼다. 죽은 존재답게 산 사람 눈치를 안 봤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눈을 감고 지난 며칠간의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각성 실패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화가 났었다. 그 말을 뱉은 사람의 표정까지 선명하게 기억났다. 아버지와의 대화에서, 위험을 알면서도 결심했을 때는 긴장이 있었다. 손바닥에 땀이 났던 것도 기억난다. 소연이 걱정하는 얼굴을 보였을 때는—뭔가 다른 감정이 있었다. 그건 이름을 붙이기가 애매했다. 일단 화부터 시도해보자. 제일 명확한 감정이었으니까. 나는 유민호와 장서혁의 웃는 얼굴을 떠올렸다. 독을 먹이며 웃던 그 순간을. 잔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웃으며 권하던 그 얼굴들. 마지막까지 내가 아무것도 몰랐다고 믿었던 그 눈빛. 가슴 안쪽이 울렸다. 이전보다 훨씬 크게. 손끝에서 뭔가 스며 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손가락 사이로 은은한 회색빛 기운이 실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짧고, 미약했지만, 분명한 반응이었다. 회색빛은 마치 연기처럼 손가락 사이를 타고 올라가다가, 몇 초 지나지 않아 흩어졌다. "됐다." 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분노다.』 아사의 심장이 말했다. 『네게는 분노가 발동 조건 중 하나인 모양이다.』 "다른 것도 되나?" 『시도해보아라.』 나는 여러 감정을 차례로 떠올려보았다. 두려움 먼저. 유민호와 장서혁이 문을 두드리는 상상을 해봤지만, 손끝은 조용했다. 다음은 슬픔. 이건 감정 자체를 억지로 끌어내기가 더 어려웠다. 죽음이라는 게 실제로 겪어보면 슬프다기보다는 황당한 쪽에 가까웠으니까. 반응 없음. 기쁨도 시도해봤다. 이건 애초에 요즘 느껴본 적이 별로 없어서 재료가 부족했다. 역시 반응 없음. 그런데 소연의 얼굴을 떠올렸을 때—정확히는 소연이 걱정스레 나를 쳐다보던 눈빛을 떠올렸을 때, 다시 손끝에서 미약한 기운이 새어 나왔다. 이번에도 회색빛이었지만, 조금 더 옅은 색이었다. 『보호하려는 마음도 하나의 조건인 듯하다.』 구체가 흥미로운 듯 말했다. 『분노와 보호. 흔한 조합이지만 나쁘지 않다.』 "흔한 조합이라니, 다른 사람들도 이런 식으로 시작하나?" 『대부분 그렇다. 지키고 싶은 것과 부수고 싶은 것. 결국 인간이 힘을 원하는 이유는 그 둘 중 하나다.』 제법 철학적인 소리였다. 심장 조각이 이렇게 말하니 묘하게 웃겼다. "이걸로 뭘 할 수 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못한다. 발현량이 너무 적다. 훈련이 필요하다.』 "얼마나 훈련해야 되는데?" 『그건 나도 모른다. 사람마다 다르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느냐.』 나는 고목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 회색빛 기운이 사라진 자리에는 손끝이 살짝 저린 감각만 남았다. 마치 손을 오래 눌러 감각이 없어졌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럼 매일 밤 여기 나와서 하면 되는 건가." 『네가 감당할 만큼만. 무리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 "역효과라니, 어떤 식으로." 『몸이 감당 못할 기운을 억지로 뽑아내면, 그만큼 몸이 축난다. 지금 네 나이의 육체로는 한계가 뻔하다.』 무섭게 말하지만 결국 요약하면 무리하지 말라는 거였다. 알겠다고 답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이후, 나는 며칠에 걸쳐 밤마다 숲으로 나갔다. 매번 조금씩 더 오래, 조금씩 더 강하게 기운을 끌어낼 수 있었다. 회색빛은 조금씩 짙어졌고, 손끝이 저린 감각은 점점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감정 하나를 떠올리는 데도 시간이 걸렸는데, 나중에는 눈을 감고 숨 한 번 들이켜는 사이에 회색빛이 새어 나올 정도로 익숙해졌다. 셋째 날에는 회색빛이 손끝을 넘어 손목까지 타고 올라왔다. 넷째 날에는 그 빛이 잠깐이지만 실 모양이 아니라 작은 소용돌이 형태로 뭉쳤다가 흩어졌다. 다섯째 날에는— 『거기까지.』 아사의 심장이 말을 끊었다. 『오늘은 여기서 멈춰라. 안색이 안 좋다.』 거울이 없어서 몰랐는데, 손을 들어 얼굴을 만져보니 확실히 열이 있었다. 몸이 뜨거운 게 아니라 이상하게 서늘한 열이었다. 이런 식으로 몸이 반응하는 걸 보니 구체의 경고가 괜히 나온 말이 아니었다는 걸 알겠다. 낮에는 평소처럼 서재에서 공부하고, 가신들과 짧은 인사를 나누고, 소연과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눴다. 서재에서는 글자를 읽는 척하며 실은 어젯밤 손끝에서 새어 나온 빛의 색을 곱씹었고, 가신들과 인사할 때는 그들의 표정 뒤에 숨은 의도를 가늠했다. 밤에는 숲으로 나가 은밀히 단련을 이어갔다. 이중생활이라면 이중생활이었지만, 특종병 시절에도 이보다 힘든 위장 임무를 여러 번 해봤다. 그때는 적진 한복판에서 신분을 숨기고 몇 달을 버틴 적도 있었다. 그때 비하면 이건 오히려 편했다. "도련님, 요즘 밤마다 어디 가세요?" 소연이 어느 날 아침 조심스럽게 물었다. 밥을 뜨던 숟가락이 멈췄다. 망했다. 들켰나. "산책이다."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답했다.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았기를 바랐다. "밤에 혼자 산책이요?" 소연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팔짱을 낀 채로 나를 위아래로 훑는 그 눈빛이, 어릴 때부터 봐 온 사람답게 여전히 예리했다. "위험해요. 요즘 저택 밖에 이상한 사람들이 돌아다닌다는 소문도 있는데." "이상한 사람들?" 나는 그 부분에 걸렸다. "네. 정문 근처에서 낯선 남자들을 봤다는 얘기가 있어요. 하인들 사이에서 말이 좀 돌아요. 순찰하던 분이 봤다던가." "몇 명이나." "둘, 아니면 셋이라고 들었어요. 왜요, 뭐 아세요?" "아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알 리가 없었다. 이 시점에는.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유민호와 장서혁이 나를 죽인 건 미래의 일이었다. 지금은 아직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어야 했다. 두 사람의 계략이 실행되기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이 시점에 벌써 낯선 사람들이 저택 근처를 맴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예정보다 빠르게 판이 짜이고 있는 건가, 아니면 전혀 다른 위협인가. "조심해라." 나는 소연에게 말했다. "밤에 혼자 다니지 말고." "도련님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요." 소연이 팔짱을 끼며 눙쳤다. "밤마다 산책 나가시는 분이 누구한테 조심하라고 하시는 거예요." "내 산책이랑 네가 밤에 혼자 심부름 다니는 거랑 같니." "똑같은 밤이잖아요." "난 뭐가 나와도 상대할 수 있고, 넌 아니잖아." 소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픽 웃었다. "그건 또 무슨 자신감이래요." 나는 대답 대신 짧게 웃었다. 소연도 따라 웃었다. 이런 순간이 나쁘지 않았다. 열 몇 살짜리 몸에 갇혀 밤마다 몰래 힘을 끌어내는 처지에, 이런 아무렇지 않은 대화가 오히려 숨 쉴 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날 밤, 숲으로 나가는 길에 나는 저택 담벼락 너머로 낯선 그림자 두 개를 목격했다. 정문 쪽이 아니라, 하인들이 드나드는 뒷문 근처였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심장이 조용히 뛰었다. 아니, 정확히는 가슴 안쪽의 구체가 먼저 반응했다. 그림자들은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주고받고 있었다. 거리가 멀어 정확한 말은 들리지 않았다.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가 목소리를 자꾸 씹어 삼켰다. 다만 한 사람이 손짓으로 저택 쪽을 가리켰고, 다른 한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체격으로 보아 둘 다 성인 남성이었다. 옷차림은 평범한 하인 복장을 흉내 냈지만, 걸음걸이가 너무 곧았다. 하인들은 저렇게 걷지 않는다. 몸에 뭔가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균형이 어색했다. 무기를 숨긴 사람의 걸음이라면 익숙했다. 특종병 시절 수도 없이 본 걸음걸이였으니까. 가슴속의 구체가 갑자기 무겁게 울렸다. 『불길하다.』 아사의 심장이 낮게 말했다. 『저들을 조심해야 한다.』 "뭔지 알아?" 『모른다. 하지만 저 기운은—』 구체가 잠깐 말을 끌었다. 『인간의 것이 아닌 무언가와 닿아 있다. 냄새가 다르다.』 "냄새라니." 『네가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아니다. 설명해도 이해 못 할 것이다.』 친절하지 않은 대답이었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나는 대답 없이 그림자들이 사라진 방향을 노려보았다. 아직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협이 저택 담벼락 바로 밖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림자들은 몇 마디를 더 주고받은 뒤, 어둠 속으로 조용히 사라졌다. 발소리조차 남기지 않았다. 훈련된 자들이거나, 아니면 사람이 아닐 수도 있었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숲으로 향하려던 발걸음을 저택 쪽으로 돌렸다. 오늘 밤 훈련은 미뤄야 할 것 같았다. 저 그림자들이 무엇을 노리고 왔는지, 어디까지 이미 파악했는지, 지금으로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게 가장 불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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