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다음 날 오후, 나는 서재에서 책을 뒤적이는 척하며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책장은 넘어가지 않았다. 눈은 글자를 훑고 있었지만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몇 번이나 같은 문단을 다시 읽었는지 모른다. 결국 나는 책을 덮었다.
어젯밤 목격한 그림자들이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사람. 저택을 노려보던 손짓. 그리고 아사의 심장이 내뱉은 짧은 경고.
『불길하다』는 말이 이렇게 오래 마음에 남을 줄은 몰랐다.
창밖으로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왔다. 정원의 나무들이 흔들릴 때마다 그림자가 서재 바닥 위로 길게 늘어졌다가 다시 짧아졌다. 그 흔들림 하나에도 신경이 곤두섰다. 웃긴 일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 저택에서 가장 태평한 얼굴을 하고 다니던 사람이었는데.
가슴 안쪽의 구체는 하루 종일 잠잠했다. 그게 오히려 더 신경 쓰였다.
"조용한 게 더 무섭다는 거, 알아?"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대답은 없었다. 아사의 심장은 필요할 때만 말을 거는 성격인 것 같았다. 딱 그런 타이밍에만.
오후 늦게, 하녀장이 서재 문을 두드리며 다과를 내려놓았다. 나는 그녀에게 별생각 없이 물었다.
"오늘 다들 어디 있어?"
"다들 저마다 할 일이 있지요, 도련님." 하녀장이 웃으며 대답했다. "소연이는 뒷마당 창고에 심부름을 보냈습니다. 곧 돌아올 거예요."
원래는 아무렇지 않게 넘겼을 이야기였다. 창고에 심부름 가는 것쯤이야 하루에도 몇 번씩 벌어지는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목덜미가 서늘했다.
나는 다과에 손도 대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세요?" 하녀장이 물었다.
"바람 좀 쐬려고." 나는 대충 둘러댔다.
책을 내려놓고 창고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특종병 시절의 감이라고 해두자. 그런 게 있다면 믿는 게 나았다. 취재하다가 위험한 골목에 들어설 때마다 뒷목이 서늘해지는 순간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도망친 적은 없었고 대신 사고를 당한 적은 몇 번 있었다. 그러니 이 감각을 딱히 자랑스러워할 건 아니었다.
복도를 지나며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정원을 가로지를 때는 이미 거의 뛰고 있었다.
창고 근처에 다다랐을 때, 담벼락 그늘 아래 두 남자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어젯밤 그림자와 같은 체격이었다. 검은 옷, 그리고 얼굴을 반쯤 가린 낡은 모자. 한 명은 소연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소연은 벗어나려 했지만 손아귀가 강했다.
"놔요!" 소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조용히 하면 안 아파." 남자 하나가 낮게 위협했다. "영주한테 전할 말이 있을 뿐이야. 이현성이 다시 각성 의식에 도전한다는 게 사실이냐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들이 나를 찾고 있었다.
"저는 그런 거 몰라요!" 소연이 소리쳤다.
"거짓말하지 마." 다른 남자가 소연의 턱을 손끝으로 밀어 올렸다. "네가 그 방 담당 하인이라는 거 이미 알아. 순순히 말하는 게 좋을 텐데."
나는 그늘 뒤에 몸을 숨긴 채 상황을 지켜보았다. 몸이 굳었다. 나가서 정면으로 부딫히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저들이 무장했는지 아닌지도 확인되지 않았다. 허리춤에 뭔가 매달려 있는 것 같긴 했지만, 그게 단검인지 단순한 도구인지 이 거리에서는 구별이 안 됐다. 그런데 소연의 손이 떨리고 있는 게 보였다.
가슴 안쪽에서 구체가 격렬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나가지 마라.』 아사의 심장이 다급하게 말했다.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상대인지 모른다.』
"그럼 소연은 어떻게 하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정면으로 부딫히지 말고.』
"방법 찾다가 저 애 팔 부러지면 그건 누구 책임인데."
구체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알고 있었다. 지금 이 대화는 시간을 벌기 위한 것도, 답을 구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발이 떨어지지 않는 순간을 넘기기 위한 핑계였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고 옆에 오래된 나무 갈퀴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손잡이가 반쯤 갈라져 있었지만 쓸 만해 보였다. 그걸 집어 들고 큰 소리를 내면 시선을 끌 수 있을 것 같았다. 저택 안쪽에 있는 다른 하인들이 알아채도록.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갈퀴를 던지고, 소리를 지르고, 그 틈에 소연을 빼낸다. 이론적으로는 그럴싸했다. 실전에서는 대부분 이론과 다르게 흘러간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런데 그 순간, 상황이 먼저 움직였다.
소연이 갑자기 몸을 낮추고, 붙잡힌 팔을 비틀어 빼려 했다. 완전히 빠지지는 못했지만, 그 틈에 다른 손으로 근처에 놓인 작은 항아리를 집어 들어 남자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퍽.
항아리가 얼굴에 정확히 맞았다. 사기 조각이 흩어지는 소리가 짧게 났다. 남자가 비틀거리며 손을 놓쳤다. 소연은 곧바로 반대편으로 몸을 던져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다른 남자가 재빨리 팔을 뻗어 소연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어딜 도망가."
소연이 넘어졌다. 무릎이 바닥에 세게 부딫혔다. 낮은 신음이 들렸다.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다.
"거기서 뭐 하는 거야!" 나는 갈퀴를 쥔 채 소리를 지르며 뛰어나갔다. 목소리가 갈라졌지만 그건 상관없었다.
발밑의 자갈이 소리를 냈다. 스슥, 스슥. 뛸 때마다 심장이 귀 옆에서 뛰는 것처럼 크게 들렸다.
두 남자가 동시에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중 한 명의 눈이 커졌다.
"저건…"
"이현성이잖아."
순간 그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경계보다는, 뭔가 확인하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마치 서류에 적힌 얼굴과 실물을 대조하는 사람의 눈빛 같았다. 나는 그 표정이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은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소연한테서 손 떼." 나는 갈퀴를 앞으로 겨눈 채 말했다. 목소리가 낮고 짧게 튀어나왔다. 존댓말은 진작 사라졌다.
남자 하나가 피식 웃었다. "꼬맹이가 겁도 없이."
"꼬맹이라고 부르기엔 나이 차이 얼마 안 날 것 같은데." 나는 대꾸했다. 지금 이런 말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입이 먼저 움직였다. 긴장하면 오히려 말이 많아지는 버릇이 취재 시절부터 있었다.
가슴 안쪽에서 구체가 다시 울렸다. 이번엔 뜨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쓰지 마라.』 아사의 심장이 경고했다. 『아직 준비가 안 됐다.』
"안 쓰려고 노력 중이야."
하지만 소연이 바닥에서 다리를 절며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남자 하나가 다시 그녀 쪽으로 손을 뻗었다. 손끝이 소연의 옷자락에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였다.
생각할 틈이 없었다. 나는 손끝에 힘을 모으는 대신, 갈퀴를 그대로 던지듯 휘둘러 남자의 손목을 후려쳤다.
짝—
예상보다 세게 맞았는지 남자가 손목을 붙잡고 뒤로 물러났다. 낮은 욕설이 들렸다. 나는 그 틈에 소연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손바닥에 소연의 피가 살짝 묻었다.
"뛰어." 나는 짧게 말했다.
소연은 절뚝거리면서도 내 손을 놓지 않고 함께 저택 쪽으로 달렸다. 뒤에서 남자들이 뭔가 소리쳤지만, 저택 안쪽에서 하인들 몇 명이 소란을 듣고 뛰어나오는 소리가 들리자 그들은 더 쫓아오지 않았다.
발소리, 그리고 사람들 부르는 소리가 뒤섞여 들렸다. 누군가 "무슨 일이에요!" 하고 외치는 소리도 있었다. 그 소음이 반가운 건 처음이었다.
담벼락 모퉁이를 돌아설 즈음에야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졌다.
나와 소연은 저택 뒤편 계단 아래 몸을 숨긴 채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폐가 다 타는 것처럼 아팠다. 몇 초간은 말도 나오지 않았다. 소연의 무릎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괜찮아?" 나는 무릎을 살펴보며 물었다.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흙과 자갈이 박혀 있었다.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흙을 떼어내려 하자 소연이 살짝 몸을 움찔했다.
"괜찮아요." 소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눈물이 눈가에 맺혀 있었지만 흐르지는 않았다. 그 대신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도련님, 왜 나오셨어요. 위험했잖아요."
"너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저 그러다 도련님 손목이라도 잡혔으면 어쩌려고 그러셨어요." 소연은 화가 난 것 같은 말투였지만, 눈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제가 알아서 도망칠 수 있었어요."
"항아리 던지고 넘어지는 게 알아서 도망치는 거였어?"
소연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뭔가 말하려다 삼키는 표정이었다.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 사람들, 도련님을 찾고 있었어요." 소연이 낮게 말했다. "각성 의식 얘기를 물었어요."
"들었다."
"누구예요, 저 사람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아직 이름조차 확인되지 않은 자들이었지만, 뭔가 익숙한 냄새가 났다. 웃는 얼굴 두 개가 다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젯밤 담벼락 밖에서 저택을 노려보던 그림자와, 오늘 대낮에 소연의 팔을 붙잡던 손. 체격, 옷차림, 말투까지 비슷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정확했다.
"확실한 건 하나야." 나는 낮게 말했다. "저놈들, 각성 의식이 언제 열리는지, 내가 진짜 도전하는지 궁금해하고 있어. 그게 왜 궁금한지는 몰라도."
"위험한 사람들 같아요." 소연이 무릎을 감싸며 말했다. "제가 본 눈빛이 그랬어요. 뭔가... 우리랑 다른 세상 사람 같은 느낌이었어요."
가슴 안쪽에서 구체가 낮게 진동했다.
『이 일, 그냥 넘어갈 수 없을 거다.』 아사의 심장이 말했다. 『저들이 널 알아본 순간부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얼마나 안 남았는데."
『모른다. 하지만 저런 자들이 대낮에 저택 근처까지 들어와 사람을 붙잡을 정도라면, 조심성이 없거나, 조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다. 둘 중 어느 쪽이든 좋은 신호는 아니다.』
썩 도움이 되는 대답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거짓말은 안 하는 것 같았다. 그게 이 구체의 유일한 장점이라면 장점이었다.
소연이 내 표정을 살피다가, 조용히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작고 차가운 손이었다. 손끝이 아직도 살짝 떨리고 있었다.
"저는 도련님 편이에요." 소연이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무슨 일이 있어도, 라니. 무거운 말이네."
"진심이니까요."
나는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손을 잡은 채로 우리는 한동안 계단 아래 그늘에 앉아 있었다. 정원 쪽에서 하인들이 뭐라고 떠드는 소리가 계속 들렸지만, 아무도 이쪽까지 찾아오지는 않았다. 그게 오히려 이상했다. 소란이 났는데 아무도 확인하러 오지 않는다는 건, 이 저택에서 이런 소란이 그리 낯선 일이 아니라는 뜻일 수도 있었다.
해가 조금씩 기울고 있었다. 소연의 무릎에 대충 천을 감아주고, 우리는 저택 안으로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날 밤, 저택 안은 낮보다 조용했다. 식사 시간에도, 복도를 지날 때도, 누구 하나 오늘 낮의 소란에 대해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하인들끼리 눈빛을 주고받는 게 보였지만, 그 이상은 없었다. 나는 그 침묵이 더 신경 쓰였다. 뭔가를 아는데 말을 안 하는 침묵과, 아무것도 몰라서 조용한 침묵은 분명히 다른 냄새를 풍긴다.
방으로 돌아와 창문을 조금 열었다. 밤바람이 들어왔다. 어제와 같은 담벼락, 같은 그늘. 오늘은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그게 더 께름칙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이 조용함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걸. 저들이 나를 알아본 이상, 다음은 더 크고 위험한 방식으로 다가올 것이었다.
가슴속에서 은빛 구체가 다시 낮게 울렸다. 마치 경고처럼.
『다음번엔.』 아사의 심장이 말했다. 『숨어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안 끝날 거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창문을 닫고, 방 안의 촛불을 하나만 남긴 채 나머지를 꺼트렸다. 어둠 속에서 심장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내 것인지, 가슴속 구체의 것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