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이세계의 주먹은 무겁다

2화

돌바닥은 차가웠다. 무릎이 저절로 굽혀졌다. 두 남자가 나를 경기장 가장자리에 세웠다. 주변은 웅성거림으로 가득했다. 눈을 떴을 때부터 여기였다. 방금 전까지 나는 원룸에서 라면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돌바닥 위에 서 있었다. 현실감이 없었다. 현실감이 있어야 하는데, 없었다. 키가 큰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다들 체격이 좋았다. 근육이 갑옷 사이로 드러났다. 그 옆에 서 있는 내 모습이 초라했다. 등산 재킷과 청바지. 어울리지 않았다. 발밑을 내려다봤다. 등산화 밑창이 돌바닥에 붙었다 떨어질 때마다 이상한 소리가 났다. 주변 사람들은 전부 가죽 장화나 철제 부츠를 신고 있었다. 누구도 나 같은 차림이 아니었다. 나만 다른 세계에서 걸어온 것 같았다. 실제로 그랬다. 앞쪽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중년, 각진 얼굴, 냉정한 눈빛. 그의 손에는 두꺼운 서판이 들려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그를 향해 예를 갖췄다. 허리를 숙이고, 시선을 피하고, 목소리를 낮췄다. 그 남자 앞에서는 다들 작아졌다. "박정호 시험관님." 누군가 그렇게 불렀다. 이름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풀렸다. 뜻을 알 수 없는 소리들 사이에서 유독 그 이름만 선명했다. 언어가 통한다는 게 이상했다. 누구도 한국어를 쓰는 것 같지 않은데, 알아들을 수 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박정호가 줄 선 사람들을 훑었다. 한 명씩 이름을 부르고, 앞으로 나오게 했다. 그리고 중앙의 기계 장치 앞에 세웠다. 장치는 원판 하나와 그 뒤로 이어진 관 모양의 구조물로 되어 있었다. 원판을 치면 숫자가 허공에 떠오르는 방식이었다. 어떤 원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결과만 눈에 보였다. "펀칭력 측정." 그가 말했다. "기준은 500킬로그램." "넘기지 못하면 탈락." 짧고 단정한 말투였다. 숫자 하나가 경기장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500. 그 숫자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80킬로그램짜리 몸으로 500킬로그램을 넘긴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가늠이 안 됐다. 가늠이 안 되는데, 가늠해야 했다. 첫 번째 응시자가 나섰다. 어깨가 떡 벌어진 남자였다. 주먹을 쥐고, 숨을 들이쉬고, 있는 힘껏 원판을 쳤다. [312] 숫자가 허공에 떠올랐다. 웅성거림이 커졌다. 탈락자 표시가 그 위에 붙었다. 붉은 글자였다. 남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줄 밖으로 걸어 나갔다. 두 번째 응시자. 체구가 더 컸다. [489] 아쉬움의 탄식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11킬로그램. 그 차이로 인생이 갈리는 것 같았다. 세 번째 응시자. [501] 세 번째 사람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간발의 차이였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살았다는 표정이었다. 살았다는 표정을 짓는 순간이 이렇게 절박할 수 있다는 걸 처음 봤다. 나는 줄 끝에 서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오른손의 금빛 선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이게 힘을 만들어내는 건지, 아니면 아무 의미 없는 장식인지 알 수 없었다.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방법이 없는데, 곧 확인해야 하는 순서가 오고 있었다. 박정호가 나를 발견했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건 뭐지." 그가 물었다. 주변 사람들도 나를 돌아봤다. 시선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등산 재킷의 지퍼, 청바지의 무릎, 등산화의 끈까지 훑는 눈빛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화끈거리는데, 도망갈 곳이 없었다. "낯선 복장." "체구도 왜소해." "저런 게 전사 시험을 본다고?" 수군거림이 사방에서 들렸다. 누군가는 소리 내어 웃었다. 누군가는 팔짱을 낀 채 나를 쳐다봤다. 전부 다 나를 구경거리로 보고 있었다. 박정호가 서판을 확인했다. 서판 위로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뭔가를 찾는 눈치였다. "이름." "이도현입니다." 말이 저절로 나왔다. 언어가 통한다는 게 이상했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여유가 없었다. "소환구역에서 왔다고 기록되어 있군." 박정호가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의 눈빛에는 호기심도, 동정도 없었다. 그냥 데이터를 확인하는 눈빛이었다. "체중이 얼마나 되지." "팔십 킬로그램 정도입니다." 그 말에 몇몇이 웃음을 터뜨렸다. "팔십이라니." "저 팔로 500킬로그램을 넘긴다고?" 비웃음 섞인 목소리들이 이어졌다. 누군가는 옆 사람을 툭 치며 웃었다. 누군가는 대놓고 손가락질을 했다. 귀가 뜨거워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화가 나야 하는데, 나지 않았다. 그저 빨리 이 순간이 지나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박정호는 웃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봤다. "자기 순서까지 기다려라." 그렇게만 말하고 다음 사람에게로 넘어갔다. 나는 줄 끝으로 밀려났다. 숨이 조금 가라앉았다. 가라앉았다고 생각했는데,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낯선 옷이네." 돌아보니 한 여자가 서 있었다. 키가 크고, 검을 등에 메고 있었다. 눈매가 날카로웠다. 검의 손잡이에 새겨진 문양이 낯익지 않았다. 그녀의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오래 훈련한 사람 특유의 곧은 등이었다. "소환구역 출신이라고?" 그녀가 물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다니." 그녀가 피식 웃었다. "자기 사정도 모르나." "모릅니다, 사실." 솔직하게 말했다. 그녀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비웃음이 아니었다. 뭔가 다른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한서린." 그녀가 이름을 밝혔다. "무진 무관 출신." 짧고 자신감 있는 목소리였다. "이도현입니다." "알아, 방금 들었어." 그녀는 더 말을 걸지 않고 앞을 바라봤다. 순서를 기다리는 표정이 진지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그녀도 긴장하고 있었다. 검을 등에 메고 있으면서도, 이 시험 앞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힐끗 봤다. 저 정도 실력자도 떨리는 걸 보니, 이 시험이 만만한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만만하지 않은 시험을, 나는 아무런 준비 없이 마주하고 있었다. 다시 원판을 치는 소리가 울렸다. [298] 탈락. 탈락자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줄에서 빠져나갔다. [445] 탈락. 이번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만 떨궜다. 숫자들이 계속 떨어졌다. 합격자는 드물었다. 한 명씩 앞으로 나갈 때마다 경기장의 분위기가 조금씩 무거워졌다. 탈락과 합격, 그 사이의 경계가 눈앞에서 계속 반복됐다. 누구는 웃었고, 누구는 울었다. 그 감정의 진폭이 고스란히 내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내 앞의 세 사람이 연달아 탈락했다. [334] [290] [401] 전부 500을 넘기지 못했다. 줄이 점점 짧아졌다. 내 순서가 점점 가까워졌다. 박정호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이도현." 심장이 조여들었다. 온몸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비웃음, 의심, 조롱.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한서린이 나를 돌아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오히려 조금 위로가 됐다. 적어도 한 명은 비웃지 않고 있었다. 나는 원판 앞으로 걸어갔다. 발걸음마다 돌바닥이 차갑게 느껴졌다. 등산화 밑창이 다시 이상한 소리를 냈다. 누군가 그 소리에 또 웃었다.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금빛 선이 손가락 마디를 따라 흘렀다. 이게 정말 힘이 될지, 아니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지 알 수 없었다.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 확인해야만 했다. 원판이 눈앞에 있었다. 표면이 매끈했다. 금속인지 돌인지 구분이 안 됐다. 숨을 들이쉬었다. 주먹을 쥐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박정호가 팔짱을 낀 채 나를 지켜봤다. 그의 눈빛에는 여전히 아무런 기대도 없었다. 한서린도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에는 옅은 궁금증이 담겨 있었다. 경기장 전체가 조용해졌다. 숨을 멈췄다. 심장 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로 크게 울렸다. 500이라는 숫자가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넘길 수 있을지, 아니면 저 붉은 탈락자 표시가 나를 덮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주먹을 뒤로 당겼다. 그리고 있는 힘껏, 원판을 향해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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