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이건욱의 질문에 서하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결국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현장에는 없었어요. 마차도, 시신도 확인했지만 여인은 보이지 않았고요."
그 대답에 이건욱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는데, 상처의 통증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납치됐다는 뜻이군." 이건욱이 낮게 내뱉으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상처 부위에서 다시 피가 배어 나오는 것을 느끼고는 신음을 삼키며 도로 자리에 눕고 말았다.
"움직이면 안 돼요." 서하가 그의 어깨를 눌러 눕히며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몸부터 회복해야 뭐라도 할 수 있죠."
서하의 손바닥이 이건욱의 어깨를 짓누르는 동안, 그 아래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고, 그 긴장은 이내 힘없이 풀려나갔다.
이건욱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이를 악물었고, 그 눈빛 속에서 서하는 낯선 종류의 절박함을 읽어냈다.
그것은 죽음의 문턱에서 보였던 담담함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흔들림이었는데, 마치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을 놓쳐버린 사람의 눈빛 같았다.
"그녀는......" 이건욱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내가 지켜야 할 사람이었다."
"어떤 관계인데요."
그 물음에 이건욱은 잠시 침묵했고, 서하는 굳이 대답을 재촉하지 않은 채 그가 다시 눈을 감을 때까지 조용히 곁을 지켰다.
천막 안으로 스며드는 저녁 빛이 이건욱의 창백한 얼굴 위로 비껴 내려앉았고, 그 빛 속에서 그의 감긴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서하는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저 사람에게도 저렇게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었구나.'
그 생각이 서하의 가슴 어딘가를 묘하게 건드렸는데, 왜 그런 감정이 드는 것인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
사흘이 지나자, 이건욱의 열은 완전히 가라앉았고, 상처도 조금씩 아물어가기 시작했다.
서하는 여전히 순찰 임무를 병행하면서도 틈틈이 천막으로 돌아와 그의 상태를 살폈는데, 그 일과가 이제는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신기했다.
매일 아침 상처 부위에 약초를 갈아 만든 연고를 바르고, 붕대를 새로 감으며 이건욱의 체온을 손끝으로 확인하는 일이, 처음에는 임무의 연장선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저 습관처럼 자연스러워졌던 것이다.
"오늘은 좀 걸어보고 싶은데." 이건욱이 벽에 손을 짚고 몸을 일으키며 말하자, 서하가 눈살을 좁히며 다가섰다.
"아직 무리예요."
"이대로 계속 누워만 있으면, 근육이 다 굳어버릴 거다." 이건욱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는데, 그 여유로운 태도가 며칠 전 죽음의 문턱에 서 있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서하는 팔짱을 끼고 그를 내려다보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밀었다.
"딱 열 걸음만이에요. 그 이상은 안 돼요."
"열 걸음이라니, 나를 어린아이 다루듯 하는군." 이건욱이 낮게 웃으며 서하의 손을 잡았고, 그 손이 자신의 팔뚝을 감싸는 순간 서하는 그의 손바닥에서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미열을 느꼈다.
서하는 결국 그의 팔을 부축해 천막 밖으로 몇 걸음 함께 걸었고, 사막의 저녁 바람이 두 사람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낮 동안 뜨겁게 달아올랐던 모래가 밤을 향해 서서히 식어가는 시간이었고, 지평선 너머로 붉게 물든 해가 서서히 가라앉으며 하늘의 색을 주황에서 보라로 바꾸어가고 있었다.
멀리서 부족의 아이들이 낙타를 몰고 물가로 돌아오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 평화로운 풍경이 이건욱에게는 낯설게만 느껴지는 듯, 그의 시선이 오래도록 그쪽에 머물렀다.
"이런 풍경은 오랜만이군." 이건욱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제국의 성벽 안에서는 저런 것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제국은 그렇게 삭막한가요?"
"높은 곳일수록, 아래를 내려다볼 시간이 없지." 이건욱이 짧게 답하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 냉기는 이건욱의 갑주 없는 얇은 옷차림에는 다소 매서웠는지, 그가 살짝 몸을 떨었다.
"춥죠." 서하가 자신의 낡은 망토를 벗어 그의 어깨에 걸쳐주자, 이건욱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안 추운가."
"저는 이 정도 추위엔 익숙해요." 서하가 담담히 대답했지만, 사실 팔뚝에는 이미 소름이 돋아 있었다.
사막의 밤은 낮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그 급격한 온도의 낙차가 마치 두 사람의 관계처럼 아슬아슬하게 느껴졌다.
이건욱은 그 사실을 눈치챘는지, 망토를 다시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려 했다.
"됐어요." 서하가 손을 저으며 물러섰지만, 이건욱은 고집스럽게 망토 자락을 그녀의 어깨 위에 다시 얹었다.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 추위에 떠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그럼 반씩 나눠 덮어요." 서하가 결국 타협안을 내놓으며 망토의 반쪽을 그의 어깨에, 반쪽을 자신의 어깨에 걸쳤고, 그 짧은 거리 안에서 두 사람의 팔이 자연스럽게 맞닿았다.
두 사람의 손끝이 망토 자락 위에서 잠깐 스쳤는데, 그 순간 서하는 손끝을 타고 오르는 낯선 온기에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이건욱의 손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 안쪽 어딘가에서는 분명한 생기가 느껴졌고, 그것이 서하의 마음 한구석을 이상하게 어지럽혔다.
'왜 이런 온기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걸까.'
그 물음이 서하의 머릿속을 잠시 맴돌았지만, 답을 찾기도 전에 이건욱의 목소리가 그 생각을 흩어놓았다.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못 했군." 이건욱이 나직이 말했다. "당신이 아니었으면 나는 이미 저 협곡의 모래 밑에 묻혀 있었을 거다."
"규율을 어긴 거예요, 사실은." 서하가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당신을 구한 게 아니라, 제 호기심을 못 이긴 거죠."
"호기심이라." 이건욱이 서하의 옆얼굴을 응시하며 되물었다. "그렇다면 그 호기심에 감사해야겠군."
"부족의 법도에 따르면, 낯선 자를 발견하면 즉시 원로에게 알려야 해요. 제가 당신을 먼저 천막으로 데려온 건, 명백히 어긴 거죠."
"그런데도 그렇게 했다는 건, 단순한 호기심만은 아니었을 텐데." 이건욱의 말에 서하는 순간 말을 잃었고, 그 침묵이 스스로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살았다." 이건욱이 짧게 잘라 말하며, 그 서늘한 눈매 안에 옅은 웃음기를 담았다.
"어떤 이유든, 나는 이 목숨의 절반은 이제 당신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으니까."
그 말에 서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어깨에 걸쳐진 망토 자락을 여미었는데, 심장 어딘가가 이상하게 조여드는 느낌이 들었다.
'절반의 목숨이라니, 그 말이 무슨 무게를 가지는지 저 사람은 알고 하는 말일까.'
서하는 그 문장을 몇 번이고 마음속에서 곱씹으며, 이건욱의 옆얼굴을 슬쩍 훔쳐보았는데, 그의 시선은 이미 다시 지평선 너머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고, 그 정적 속에서 서하는 그가 말했던 '지켜야 할 사람'에 대해 다시 물어볼 타이밍을 재고 있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 멀리 부족 경계 쪽에서 낯선 파수꾼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서하! 원로님께서 급히 찾으신다! 경계 밖에서...... 제국 깃발을 든 자들이 발견됐다!"
그 외침이 사막의 저녁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지는 순간, 서하의 어깨에 닿아 있던 이건욱의 손이 순식간에 굳어버렸고, 그의 얼굴에서 조금 전까지의 여유로운 기색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제국 깃발이라니......" 이건욱이 낮게 중얼거리며 몸을 돌려 경계 쪽을 응시했는데, 그 눈빛 속에서 서하는 이제껏 본 적 없는 서늘한 경계심을 읽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