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딸랑, 카페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서야 이지은이 먼저 도착해 있다는 걸 알았다. 창가 자리에 앉은 그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잔을 손끝으로 빙빙 돌리고 있었는데, 얼음이 다 녹아 잔 표면에 물방울이 줄줄 흐르는 걸 보고 나는 이미 늦었다는 걸 직감했다. 얼마나 오래 기다린 걸까. 잔 밑에 깔린 냅킨은 물기를 머금어 흐물흐물해져 있었고, 그 위로 그녀가 무의식중에 손톱으로 그어놓은 자국들이 어지럽게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자국의 개수를 세어보다가 그만두었다. 세어봤자 의미 없는 짓이었다.
"미안, 차가 좀 막혀서." 나는 맞은편에 앉으며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꺼냈지만, 그녀는 대답 없이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그녀의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갔고, 나는 그 무표정한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목이 조금씩 말라오는 걸 느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와 바지에 슬쩍 문질렀다.
"할 말 있어서 보자고 했어." 그녀가 입을 열었을 때 나는 이미 속으로 몇 가지 가능성을 지워나가고 있었다. 결혼 얘기일까, 아니면 이사 문제일까, 그것도 아니면 부모님 건강 문제일까. 머릿속으로 대답까지 미리 준비해두었는데, 전부 아니었다. "우리 그만하자." 그 다섯 글자가 귓속을 파고드는 순간 심장이 갓 잡은 활어처럼 펄떡였고, 나는 금붕어처럼 입술만 뻐끔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손끝이 저릿저릿해지면서 테이블 위에 올려둔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유는……" 겨우 물었더니, 그녀는 잔을 만지던 손을 멈추고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화도 아니고 원망도 아닌, 그저 지친 기색만이 담겨 있었다. "민준아, 넌 5년 동안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어. 회사도 그대로고, 집도 그대로고, 나한테 하는 말도 그대로야."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처음엔 그게 안정감이라고 생각했어. 근데 이젠 그게 그냥 멈춰있는 거라는 걸 알겠어."
그 말이 사실이라 반박할 수도 없었다. 회사에서는 이번 주 안에 구조조정 명단이 발표될 거라는 소문이 돌았고, 나는 그 명단에 내 이름이 있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팀장이 나를 부르지 않고 다른 후배들만 회의실로 따로 불러 이야기를 나누던 게 벌써 며칠째였다. 발전이 없는 인간, 정체된 인간. 그녀의 말이 그대로 내 이력서 평가란에 적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 문을 밀고 나가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딸랑, 종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 소리가 이번엔 유난히 서글프게 들렸다.
카페를 나설 때 하늘은 이상하게 맑았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랬는데, 그 파란색이 오히려 서늘하게 느껴졌다. 나는 정처 없이 여의도 쪽으로 걸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구두 굽이 보도블록에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고, 그 소리에 맞춰 머릿속에서는 이지은의 마지막 말이 계속 재생됐다. 멈춰있는 거야, 멈춰있는 거야. 회사 동기인 김도현에게 전화를 걸자 그는 대뜬 목소리로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나는 방금 헤어졌다는 말을 하는데도 웃음이 났다. "야, 너 목소리가 왜 그렇게 태연해." 도현이 말했다. "태연한 게 아니라 그냥, 멍한 거야." 나는 대답했다. 실제로 그랬다. 슬픔이나 분노보다 먼저 찾아온 건 뭔가 텅 빈 듯한 감각이었다. 마치 몸속에 있던 뭔가가 순식간에 빠져나간 것처럼, 걸음을 옮기는데도 발밑이 허공을 딛는 것 같았다.
우리는 63빌딩 앞 광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도현이 편의점에서 사 온 캔맥주를 하나 건네줬고, 나는 그걸 손에 쥔 채 벤치에 앉아 있었다. 캔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손바닥을 타고 흘러내렸다. 오후의 볕이 빌딩 유리창에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사람들이 광장을 오가는 소리, 비둘기들이 푸드덕거리며 날아오르는 소리, 저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경적 소리가 뒤섞여 귓가에 웅웅거렸다.
"인생 참 재밌지." 도현이 중얼거렸다. "회사에서는 잘릴 위기, 집에서는 여자친구한테 차이고. 오늘 삼재 아니냐." 나는 픽 웃으며 캔을 땄다. 탄산이 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삼재는 무슨. 그냥 원래 이런 거지 뭐." 나는 캔을 입에 대며 대꾸했다. 맥주는 미지근했고,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그 밍밍한 맛이 오히려 지금 내 기분과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근데 진짜 명단에 네 이름 있대?" 도현이 조심스레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몰라. 근데 팀장이 나만 안 부르는 거 보면 답 나온 거 아니냐." 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캔맥주만 홀짝거렸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앉아 벤치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유모차를 끌고 가는 젊은 부부, 손을 잡고 걷는 연인, 정장 차림으로 바삐 걸어가는 직장인들. 그 평범한 풍경들이 오늘따라 유난히 낯설게 느껴졌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나도 캔을 다 비우고 일어섰다. 우리는 광장을 가로질러 큰길 쪽으로 걸었고, 신호등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초록불이 켜지기를 기다리는 그 몇 초가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다.
횡단보도 신호가 초록으로 바뀌었을 때, 나는 무심코 도현보다 한 발 앞서 걸어 나갔다. 그때 도현이 뭐라고 소리쳤는데, 정확히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사이드미러에 반사된 햇빛이 눈을 찔렀고, 그다음엔 커다란 그림자가 시야를 덮쳤다. 경적 소리, 타이어가 아스팔트를 긁는 마찰음, 그리고 몸이 붕 뜨는 느낌. 죽는 걸까.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온몸에 힘이 눈사람 녹듯 풀려버렸고, 시야가 빙글빙글 돌면서 하늘과 도로가 뒤섞였다.
멀리서 도현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아니, 그건 도현의 목소리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였을지도 모른다. 귓가에서 웅웅거리는 이명 사이로 사람들의 비명 소리, 다급하게 뛰어오는 발소리, 누군가 119를 부르라고 외치는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온몸이 아스팔트 위에 널브러진 채 나는 눈을 뜨지도 감지도 못한 상태로 그 소리들을 흘려듣고 있었다.
엄마, 일어나…….
어릴 적 그 목소리가 왜 갑자기 떠올랐는지 알 수 없었다. 의식이 점점 흐려지는 와중에도 누군가의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걸 느꼈다. 구두 소리치고는 이상하게 조용했고, 마치 안개가 걷는 것처럼 무게가 없었다. 주변의 소란스러움과는 달리 그 발소리만은 이질적일 만큼 고요했다. 나는 마지막 힘을 다해 눈을 떴다. 검은 롱코트 자락과, 그 위로 겨울바람처럼 시리면서 묵직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 존재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크고 단단한 손이 내 얼굴 가까이 다가오는 듯했으나, 닿았는지 아닌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가엽네."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시야가 완전히 검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