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도심 흡혈귀의 소유물

3화

딸랑, 하는 소리에 눈을 떴다. 아니, 이 성에 풍경 같은 게 달려 있을 리 없으니 착각이었을 거다. 그런데도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어김없이 그 소리가 귓가를 스쳤고, 나는 그때마다 이불을 움켜쥐며 눈을 깜빡였다.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의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덩굴이 뒤엉킨 듯한 문양 사이로 희미한 조명이 스며들었고, 그제야 여기가 서울 한복판이 아니라 어딘가의 고성이라는 사실이 다시 한번 명치를 눌러왔다. 벌써 사흘째였다. 사흘 동안 나는 이 방과 복도, 그리고 한소율이 데려가는 몇몇 장소만을 오가며 살았고,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조차 매번 같은 안개에 뒤덮여 있어서 도무지 이곳이 어느 나라, 어느 도시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때마다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는 여전히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무거운 걸음인 것도 같고, 가벼운 걸음인 것도 같은데, 확인하러 나가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나더니 대답도 듣지 않고 문이 열렸다. 한소율이었다. 금발을 짧게 자른 머리와 군더더기 없는 걸음걸이, 항상 같은 온도로 유지되는 무표정한 얼굴. 처음엔 스물예닐곱 정도로 보여서 나보다 어린 줄 알았는데, 이제는 그 나이라는 게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 안다. 낮에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걸 보면 뱀파이어치고는 이상하다 싶었는데, 한소율 본인이 무심하게 알려줬다. 자기는 데이워커라고, 반쪽짜리라고. 그 말을 할 때 목소리에 담긴 온도가 너무 낮아서, 나는 그게 자조인지 그냥 사실 전달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오늘부터 일과가 생겼어." 한소율이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주인님 서재 정리, 그리고 오후엔 지하 서고 목록 작업. 데워라고 놀고먹을 순 없으니까." "제가 뭘 할 줄 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몸에 밴 회사원의 습관인지, 이 와중에도 '업무 배정'이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피로감이 몰려왔다.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들고, 목덜미가 뻐근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죽었다가 살아난 마당에 또 정리를 해야 한다니, 이쯤 되면 팔자인가 싶었다. "할 줄 몰라도 돼." 한소율이 짧게 답했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나는 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슬리퍼를 꿰어 신었다. 발바닥에 닿는 차가운 감촉이 새삼스럽게 이곳이 낯선 곳임을 일깨웠다. 한소율은 대꾸 없이 앞장서서 걸었고, 나는 물 밖으로 던져진 물고기처럼 어색하게 그 뒤를 따랐다. 복도는 낮에도 어두웠다. 스테인드글라스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붉고 푸른 얼룩을 바닥에 뿌렸고, 그 사이사이 걸린 초상화들의 눈이 내 뒤를 쫓는 것 같아서 나는 자꾸 뒤를 돌아봤다. 초상화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창백한 얼굴에 짙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개중 몇몇은 왠지 낯이 익은 듯도 해서 나는 걸음을 잠시 멈추고 들여다보다가, 한소율이 재촉하는 기척에 다시 서둘러 발을 옮겼다. 발소리가 대리석 바닥에 부딪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서재는 생각보다 넓었다. 벽 하나를 통째로 채운 책장과, 그 앞에 놓인 커다란 가죽 소파, 그리고 구석에 놓인 텔레비전에서 낮은 볼륨으로 야구 중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는 플레이오프 경기가 한창이었는데, 소파에 앉아 그걸 보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선우해나였다. 검은 실크 셔츠 차림으로 다리를 꼬고 앉아, 손에는 와인잔 대신 캔맥주를 든 채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서른다섯이나 마흔쯤 되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그 나이 어디에도 맞아떨어지지 않는 정적인 아름다움이 있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길고 매끈했고, 캔을 쥔 손등에 도드라진 핏줄조차 어딘가 그림처럼 정교했다. 겨울바람처럼 시리면서도 묵직한 향기가 방 안을 채우고 있었고, 나는 그 향을 맡는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심장이 갑자기 발끝까지 떨어지는 것 같았다. "9회말인데 역전이 안 되네." 그녀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나한테 한 말인지, 한소율한테 한 말인지 알 수 없어서 나는 그냥 얼어붙은 채 서 있었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손끝을 티 나지 않게 바지 옆에 붙였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 땀이 나고 있는지 아닌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았다. 한소율이 목례를 하고는 나를 재촉해 서재 안쪽으로 들어갔고, 나는 책장 먼지를 터는 시늉을 하며 곁눈질로 선우해나를 살폈다. 저 여자가, 나를 산 여자다. 어머니가 나를 팔아넘긴 상대. 그런데 어째서 저렇게 태연히 야구를 보고 있을 수가 있나. 실감이 안 났다. 손에 쥔 걸레를 몇 번이나 접었다 폈다 하면서, 나는 책장 칸을 옮겨 다녔다. 먼지 냄새와 낡은 종이 냄새가 코끝을 스쳤고, 그 사이사이 선우해나가 들고 있는 캔맥주의 알루미늄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렇게 두어 시간쯤 책 정리를 하고 났을 즈음, 서재 문이 벌컥 열리며 낯선 향이 훅 끼쳤다. 향수 냄새가 진했다. 라틴계 느낌이 도는 이국적인 이목구비의 여자가 검은 가죽 재킷에 딱 붙는 청바지 차림으로 들어섰고, 그 뒤로 새빨간 머리를 늘어뜨린 또 다른 여자가 세련된 디자이너 옷을 입고 따라 들어왔다. 두 사람 모두 걸음걸이에서부터 자신만만함이 뚝뚝 묻어났고, 하이힐 굽이 대리석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또각또각 울렸다. "어머, 여기 있었네." 가죽 재킷 여자가 선우해나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목소리는 달콤했지만 그 안에 날이 서 있었다. "인사도 없이 새 장난감을 들이다니, 섭섭하잖아." "조은채." 한소율이 낮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내 앞을 반쯤 가로막았다. "연락도 없이." "옅은 피 주제에 말이 많네." 조은채가 콧방귀를 뀌며 한소율을 훑어보더니, 이내 시선이 나에게 옮겨왔다. 그 눈빛이 순간 이상하게 반짝였다. 뭔가를 감지한 짐승의 눈이었다. 나는 그 시선이 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근데 얘, 냄새가 좀 독특하다? 그치, 서영아?" 빨간 머리 여자, 백서영이 천천히 다가와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눈빛에는 계산적인 냉정함이 서려 있었지만, 입가에는 얕은 흥미가 걸려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콧잔등을 찡긋거리자, 목걸이의 보석이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신선하네요." 그녀가 짧게 말하며 웃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손끝이 차가워지고 목이 바짝 말라왔다.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뻐끔거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도망치고 싶은데 발이 바닥에 붙박인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용건이 뭐야." 선우해나가 여전히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용건은 무슨. 놀러 온 거지." 조은채가 웃으며 한소율 쪽으로 한 발짝 다가섰다. 손가락 끝으로 자신의 입술을 톡톡 두드리며 나를 힐끔거리는 게, 마치 먹잇감을 고르는 눈빛 같았다. "그런데 이 옅은 피가 자꾸 내 앞을 막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은채의 손이 순식간에 한소율의 목을 움켜쥐었다. 나는 그 속도를 눈으로 따라잡지도 못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한소율의 몸이 책장에 부딪혔고, 책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종이 냄새와 먼지가 훅 끼쳐 오르고, 바닥에 흩어진 책들 사이로 한소율의 발이 힘없이 늘어졌다. "소율 씨!" 나도 모르게 그 이름을 부르며 몸이 먼저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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