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도심 흡혈귀의 소유물

5화

사흘이 지났다. 그동안 서재 청소는 계속됐고, 한소율의 목에 남은 멍은 서서히 옅어져 갔지만 그녀는 그 일에 대해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나 역시 묻지 않았다. 물어봐야 돌아오는 대답이 없을 걸 사흘 만에 이미 배운 참이었다. 새벽마다 서재 문을 열 때면 먼지 냄새가 훅 끼쳤는데, 그 냄새에 익숙해질 무렵이면 어느새 손끝이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낡은 책등을 하나하나 닦아내고, 곰팡이가 슨 페이지는 조심스레 펼쳐 바람에 말리고, 좀먹은 자리는 따로 표시해뒀다가 버릴 것과 남길 것을 나눴다. 몸을 쓰는 일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편했다. 적어도 이 방 안에서만큼은 누군가 갑자기 목을 조르거나 뺨을 후려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으니까. 그날도 나는 서재 구석에 쌓인 낡은 서적들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등 뒤에서 문이 딸깍 열리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겨울바람처럼 시리면서도 묵직한 머스크 향이 방 안으로 스며들었고,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떨어뜨릴 뻔했다. "뭐 하나." 선우해나의 목소리였다. 나는 몸을 돌려 그녀를 마주했다. 오늘도 검은 실크 셔츠 차림이었는데,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올린 걸 보니 뭔가 평소와 다른 여유가 느껴졌다. 붉은 기운이 도는 그 눈동자가 서가를 훑더니, 이내 내가 정리해둔 책들의 순서를 유심히 살폈다. 그녀가 서가 앞을 천천히 오가며 책등을 하나씩 눈으로 훑는 동안, 나는 숨소리조차 조심스럽게 죽이고 서 있었다. 저 손이 뻗어와 어느 책을 뽑아 들지, 그 손끝이 무엇을 흠잡을지 알 수 없어 심장이 갓 잡은 활어처럼 펄떡였다. "저자 이름 순으로 했는데요." 내가 대답하자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책 한 권을 뽑아 들었다. 낡은 가죽 표지였는데, 그녀의 손끝이 그 표지를 쓸어내리는 모습이 이상하게도 조심스러웠다. 마치 오래된 상처를 어루만지는 것처럼. "이건 다른 데." 그녀가 책을 다른 서가로 옮기라는 듯 손짓했다. 나는 순순히 그 책을 받아 들었는데, 손이 닿는 순간 그녀의 손끝이 아주 짧게 내 손등을 스쳤다. 볼이 화끈거리는 걸 느끼며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책을 옮겼다. 손등에 남은 그 짧은 온기가 이상하게도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손등은 괜찮나." 등 뒤에서 들려온 그 질문에 나는 멈칫했다. 사흘 전 그 일을 언급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감정이랄 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나는 그 무뚝뚝한 물음 속에 뭔가 작은 배려가 숨어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아챘다. "덕분에요." 짧게 대답하고 나서, 나는 그녀를 슬쩍 바라봤다. 그녀는 창가로 걸어가 밖을 내다보고 있었는데, 성을 뒤덮은 안개 너머로 서울의 불빛이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창유리에 비친 그녀의 옆얼굴은 조각처럼 무표정했지만, 그 시선만은 오래도록 한곳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문득, 이 사람도 저 바깥 세상을 그리워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그녀가 갑자기 물었다. "저긴 가본 적 있나."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특정할 수 없는 불빛의 무리였다. 나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그냥 고개를 저었다. "살긴 살았는데, 딱히 구경 다닐 여유는 없었어요." "그런가." 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 그 짧은 대꾸 뒤로 침묵이 흘렀는데, 그 침묵이 불편하지만은 않았다. "차 마실 줄 아나."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 다닐 때 탕비실에서 커피 내리는 게 유일한 낙이었으니까. 상사 눈치를 보며 몰래 내려 마시던 그 값싼 믹스커피 한 잔이 그때는 그렇게 달았는데. 그녀는 그 말을 듣더니 손짓으로 서재 한쪽의 작은 티테이블을 가리켰다. "타." 명령인지 부탁인지 구분이 안 되는 말투였지만, 나는 순순히 몸을 움직였다. 낡은 주전자와 찻잎을 찾아내는 데 시간이 좀 걸렸는데, 서랍 깊숙한 곳에서 먼지 쌓인 찻잎통을 발견하고 뚜껑을 여니 은은한 향이 훅 끼쳐왔다. 물을 끓이는 동안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소파에 앉아 나를 지켜보았다. 그 시선이 등에 닿을 때마다 목덜미가 따끔거렸다. 주전자 물이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소리만이 방 안을 채웠고, 나는 그 소리에 맞춰 숨을 고르며 손을 움직였다. 찻잔에 물을 붓고 찻잎이 우러나기를 기다리는 그 잠깐의 시간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색이 옅은 호박빛으로 우러나는 걸 확인한 뒤에야 나는 잔을 들고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찻잔을 내밀자 그녀는 향을 한 번 맡더니 살짝 미간을 좁혔다. 맛없나, 하는 생각에 속이 철렁했는데 그녀는 한 모금 마시고는 의외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네." 그 짧은 한마디에 나는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회사에서 몇 년을 일해도 상사에게 이런 인정을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죽어서 팔려온 이곳에서 뜬금없이 칭찬을 듣고 있다는 게 우스웠다. 우습다고 생각하면서도 입가가 저절로 올라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내일도." 그녀가 잔을 내려놓으며 짧게 덧붙였고, 나는 그게 다시 이 시간에 차를 타라는 뜻이라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향할 때, 나는 무심코 물었다. "저 사람들, 다시 오나요? 조은채랑 백서영이요." 그녀는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나는 괜한 걸 물었나 싶어 목이 타들어갔다. 넓은 등이 미동도 없이 그대로 굳어 있는 모습을 보며, 나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올 거야." 그녀는 그렇게만 대답하고 서재를 나섰다. 나는 그 짧은 대답 속에 담긴 무언가 불길한 확신을 느끼며, 식어가는 찻잔을 오래도록 내려다보았다. 김이 서서히 사그라드는 걸 보면서, 조은채의 그 표독스러운 웃음소리와 백서영의 날카로운 손톱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선우해나는 같은 시간에 서재로 왔다. 나는 매번 차를 준비했고, 그녀는 매번 몇 마디 짧은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어느 날은 서가 정리에 대해, 어느 날은 날씨에 대해. "창문 좀 닦아." "오늘은 재스민으로." "거기, 먼지 남았어." 그 대화들은 하나같이 짧고 무뚝뚝했지만, 나는 그 안에서 조금씩 이상한 온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나쁘지 않네, 라는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해 매일 저녁 다른 찻잎을 시험해보는 나 자신을 발견했을 때는 스스로도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게 뭐라고, 이 사람 눈치를 이렇게까지 보고 있나.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목을 조여왔던 그 억센 손과는 다른 온기가 그리워지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그날 저녁, 한소율이 서재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 똑똑, 짧게 두 번. 그녀의 손에는 작은 나무 상자가 들려 있었는데, 그녀는 그것을 티테이블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상자를 내려놓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해나 님께서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나는 그 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오래된 은반지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반지 중앙에는 핏빛처럼 붉은 보석이 박혀 있었다. 그 보석이 미세하게, 아주 미세하게 맥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살아있는 심장 같은, 그런 기묘한 박동이었다. "이게 뭔가요." 내가 묻자 한소율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늘 무표정하던 그녀의 얼굴에 처음으로 균열이 가는 걸 보며, 나는 이 반지가 결코 평범한 물건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함부로 받으실 물건이 아닙니다." 그 말을 뱉는 한소율의 목소리가 사시나무처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상자 속 반지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그 붉은 보석의 미세한 맥동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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