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속마음이 들리는 밤

1화

사각사각. 옆자리 여자애의 펜 끝이 노트 위를 긁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던 아침이었다. 강의실 안은 히터 바람 때문인지 후끈했고, 창문에는 뽀얗게 김이 서려 바깥 풍경조차 뭉개진 얼룩처럼 보였다. 나는 손끝으로 턱을 괸 채 교수님의 목소리를 흘려듣고 있었는데, 사실 그날 아침의 나는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등굣길 지하철 안에서 몇 번이나 다짐했던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좀 다르게 살아보자. 남들처럼 연애도 해보고, 누군가와 손을 잡아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지 않는, 그런 평범한 하루를 하나쯓 쌓아가 보자고. 그 다짐이 얼마나 얄팍한 것이었는지는, 채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 확인하게 될 운명이었지만. 그 애가 무심코 팔을 뻗어 지우개를 집으려다 내 팔꿈치에 손등을 스쳤고, 그 순간 무언가가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적록색 머리, 좀 특이하다. 근데 왜 저렇게 혼자 앉아 있지, 이상해. 그 애의 생각이 내 것인지 남의 것인지 구분도 되지 않을 만큼 선명하게 들려왔고,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걸 느끼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심장이 갓 잡은 활어처럼 팔딱거리기 시작했다. 손끝부터 시작된 저릿함이 팔을 타고 어깨까지 번지는 것 같았다. 또야. 이번에도,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의 속을 함부로 헤집어놓았다는 자책이 명치 아래에서부터 뜨겁게 치밀어 올랐고, 손끝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걸 숨기려 나는 두 손을 허벅지 아래로 밀어 넣었다. 그 애는 아무것도 모른 채 다시 필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지우개 가루를 손끝으로 톡톡 털어내는 그 무심한 손짓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미안해. 네 생각을 훔쳐 들을 생각은 없었어. 그런 말을 할 수도 없었으면서, 마음속으로만 몇 번씩 사과를 반복했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나는 가방을 챙기는 척하며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자리를 떴다. 계단을 두 칸씩 뛰어 내려가는 발소리가 텅 빈 복도에 울렸고, 나는 그 소리에조차 신경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화장실 맨 끝 칸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서야 겨우 숨을 크게 내쉴 수 있었는데,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세면대에 손을 짚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자, 찬물이라도 끼얹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죽을 것 같아. 열아홉 살이 되도록 단 한 번도 남의 머릿속에서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다. 스치기만 해도, 아주 짧은 접촉만으로도 남의 생각이 내 것처럼 흘러들어오는 이 몸뚱이가 지긋지긋했다. 초등학교 때는 짝꿍의 손이 스칠 때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도망 다녔고, 중학교 때는 버스 손잡이를 잡는 것조차 무서워 늘 서서 벽에 몸을 기대곤 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나는 분명 다르게 살아보겠다고 결심했었다. 도덕적인 거리감 따위, 이제는 벗어던지고 연애라는 걸 한번 해보겠다고. 그런데 강의실 한 칸 벗어나기도 전에 다시 남의 생각에 얻어맞아 무릎이 꺾이는 나를 보고 있자니, 그 결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씁쓸하게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수돗물을 틀어 손을 씻으며, 나는 거울 속의 나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태어난 걸까. 답이 나올 리 없는 질문이었다. 물기를 대충 닦아내고 화장실을 나서는데, 복도 끝에서 그 애가 친구들과 웃으며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내가 훔쳐 들은 생각 같은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평범한 하루를 보내는 얼굴.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금 놓였다. 건물을 나서며 정문 쪽으로 걷던 나는, 낮게 깔린 겨울바람 속에서도 유독 또렷하게 느껴지는 향을 맡았다. 시리면서도 묵직한, 마치 겨울바람 그 자체를 향으로 만들어놓은 것 같은 냄새였다. 익숙한 냄새였다. 걸음이 저절로 느려졌다. 이 냄새를 맡을 때마다 나는 항상 어릴 적, 밤늦게 집에 돌아온 언니가 현관에서 코트를 벗어 걸던 순간을 떠올리곤 했다. 고개를 들자 캠퍼스 정문 앞, 검은 코트를 입고 팔짱을 낀 채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언니, 이하은이 서 있었다. 나보다 다섯 살이 많지만 같은 적록색 머리와 같은 파란 눈, 같은 170cm의 키를 가진 언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었는데, 그건 단순히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서 있는 자세 하나에서부터 뭔가 다른 기운이 흘러나왔다. 어깨는 넓고 곧게 펴져 있었고, 두 다리는 어깨너비만큼 벌려 무게중심을 낮춘 채 서 있었는데, 그건 오랜 시간 무에타이로 다져진 몸에 배어버린 습관이었다. 지나가던 학생 몇몇이 흘깃흘깃 언니를 쳐다보며 지나갔지만, 언니는 그런 시선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오직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언니, 여긴 왜……." "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언니는 내 손목을 붙잡고 걸음을 옮겼다. 손목을 감싼 언니의 손은 크고 단단했으며, 무에타이로 다져진 손아귀 힘이 얼마나 센지 뿌리치려는 시도조차 무색하게 만들었다. 나는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다리를 휘청이며 언니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언니의 걸음은 크고 성큼성큼해서, 나는 거의 반쯓은 끌려가는 자세로 캠퍼스 정문을 벗어났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 둘에게 잠깐씩 머물렀다가 흩어지는 걸 느꼈지만, 그것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 "……몰라." 정말로 몰랐다. 달력을 확인한 적도 없었고, 특별히 기억나는 날짜도 아니었다. 언니의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는데, 그게 오히려 더 무서웠다. 화가 났다면 화가 난 대로, 서글프다면 서글픈 대로 티가 나는 게 나았다.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언니의 표정 앞에서 나는 늘 그렇듯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었다. "이제 더는 피하지 마." 짧고 건조한 그 말 안에 얼마나 많은 뜻이 담겨 있는지 나는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언니는 대기하고 있던 택시 문을 열어 나를 밀어 넣더니, 기사에게 성수동을 목적지로 불렀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왜 하필 오늘, 왜 하필 지금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옆에 앉은 언니의 옆얼굴을 힐끔거리는데, 그 표정에서는 어떤 흔들림도 찾을 수 없었다. 곧게 뻗은 콧대와 무표정하게 다물린 입술, 창밖을 향한 파란 눈동자까지, 전부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흔들리는 건 나 하나뿐인 듯했다. 택시가 도로를 달리는 동안 나는 몇 번이나 입을 열려다 다시 다물었다. 손끝으로 무릎 위에 놓인 가방끈을 만지작거리며, 언니에게 물어야 할 것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해보려 했지만 도무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성수동에 뭐가 있는지, 오늘이 무슨 날인지, 내가 대체 뭘 피하고 있었다는 건지. 어느 것 하나 답이 나오지 않았다. 택시가 신호에 걸려 멈춰 섰을 때, 나는 창문에 이마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유리창의 차가운 감촉이 이마에 닿자 정신이 조금 맑아지는 듯했다. 아침에 읽어버린 그 애의 생각, 그리고 방금 전 언니의 눈빛. 두 가지가 뒤섞이며 머릿속이 뒤죽박죽되는 기분이었다. 눈을 감고 있으니 오히려 오늘 하루의 조각들이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사각사각 펜 소리, 손등이 스치던 순간, 화장실 거울 속 하얗게 질린 얼굴, 그리고 지금 옆자리에 앉아 있는 언니의 시린 향기까지. 성수동으로 가는 이 길이 어떤 길인지, 나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다만 확실한 건, 심장이 아까부터 한 번도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언니가 나를 이렇게 직접 데리러 온 적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언니는, 절대로 이유 없이 이런 일을 벌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택시가 다시 출발했다. 창밖으로 익숙한 거리의 풍경이 낯선 속도로 스쳐 지나갔고, 나는 그 풍경 속에서 아무런 대답도 찾지 못한 채 그저 언니의 옆얼굴만 다시 한번 훔쳐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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