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속마음이 들리는 밤

2화

택시가 한강을 건널 때쯌, 창밖으로 낮게 깔린 노을이 강물 위에 부서지는 걸 보다가 나는 무심코 창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초점 없는 눈, 다크서클이 옅게 내려앉은 눈두덩, 입술은 하얗게 말라 있었다. 이런 얼굴을 하고 있었나, 스스로도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다 문득, 유리 속 내 얼굴 위로 아버지의 얼굴이 겹쳐 떠올랐다. 초등학교 육상대회가 열리던 날이었다. 나는 100미터 달리기 출발선에 서서 손끝이 떨릴 정도로 긴장했었고, 총성이 울리자마자 온 힘을 다해 뛰었다. 그러다 트랙 중간쯌에서 발이 엉키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무릎이 까져 피가 배어 나왔고, 흙이 상처 안으로 파고드는 느낌에 나는 울음을 삼키며 일으켜 세워줄 손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저 멀리 관중석 쪽, 그늘 밑에서 담배를 태우던 아버지가 보였다. 아버지는 다가오지 않았다. 그저 필터 끝까지 타들어가는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중얼거렸다. "쟤가 아들이었으면 저렇게 안 다쳤을 텐데." 그 말이 나를 향한 것인지, 그저 허공에 흘린 혼잣말이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나는 아버지 앞에서 유독 작아지는 아이가 되어버렸다. 목소리를 낮추고, 시선을 피하고, 웃음도 절반쯌으로 줄여서 웃는 아이. 이하은 언니도 나도, 둘 다 딸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아버지에게는 어떤 결핍처럼 남아 있었다는 걸, 나는 너무 어릴 때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그 결핍은 말로 표현되지 않았지만, 저녁 밥상 위 반찬 개수로, 명절날 세뱃돈 액수로, 그리고 무심한 눈빛 하나로 조용히 새어 나왔다. 그리고 또 하나,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마음이 갔던 선배였다.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안쪽이 뻐근하게 조여들었다. 그 애는 늘 교복 셔츠 소매를 살짝 걷어 올리고 다녔고, 웃을 때 왼쪽 볼에만 옅은 보조개가 생겼다. 그 보조개를 보려고 나는 부러 시시한 이야기를 늘어놓곤 했었다. 어느 날 하굘길, 우연히 손이 맞부딕혔다가 그대로 손을 잡았을 때, 그 애의 손끝에서 느껴지던 온도가 지금도 손바닥에 남아 있는 것처럼 선명했다. 따뜻했다. 그리고 그 온도가 채 식기도 전에, 나는 무심코 그 애의 생각을 읽어버렸다. 얘 좀 이상한 애 아니야? 왜 자꾸 내가 무슨 생각 하는지 맞추는 것처럼 말하지. 그 말을 직접 들은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그 애의 머릿속에서 스스로에 대한 혐오를 처음으로 마주했다. 손끝이 얼음물에 담긴 것처럼 차갑게 식었고,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 애의 손을 슬그머니 놓아버렸다. 그날 이후 나는 누구와도 손을 오래 잡지 않았고, 누구의 눈도 오래 들여다보지 않았다. 마음이 자라날 틈을 주지 않고, 뿌리째 뽑아버리는 것. 연애라는 것을, 나는 그렇게 스스로 지워버렸었다. 택시가 성수동 골목으로 들어서자 창밖 풍경이 바뀌었다. 낡은 벽돌 공장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는 사이로, 유리와 철제 프레임으로 세련되게 리모델링된 오피스텔 한 채가 우뚝 솟아 있었다. 낡음과 새것이 부자연스럽게 뒤섞인 그 거리는, 마치 오래된 상처 위에 새 살을 억지로 덧입힌 것처럼 보였다. 택시가 그 건물 앞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이상한 감각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마치 여러 개의 라디오 주파수가 동시에 잡히는 것처럼, 낯선 생각의 파편들이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누군가의 웃음기 섞인 생각이 먼저 흘러들었고, 뒤이어 조곤조곤한 목소리, 그리고 그보다 훨씬 낮고 서늘한 무언가가 그 위에 겹쳐졌다. 심장이 갑자기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언니, 저 안에……누가 있어?" 내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언니는 대답을 아끼며 오피스텔 로비로 나를 이끌었다. 나는 언니의 팔을 붙잡을까 하다가 그마저도 관두었다. "곧 알게 돼." 로비는 조용했다. 대리석 바닥에 발소리가 또각또각 울렸고, 천장의 조명이 지나치게 밝아서 눈이 시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언니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뒤따라 들어가며 벽에 등을 붙였다. 눈을 감았다. 심장이 쿵쿵쿵 뛰는 소리가 귀 안쪽에서 울리는 것처럼 크게 들렸고, 손끝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엘리베이터가 위로 올라갈수록, 낯선 생각의 조각들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그 안에 담긴 감정의 온도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누군가는 나를 기다리는 것 같았고, 또 누군가는 나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 마치 어항 속에 던져진 물고기처럼, 나는 그 시선들 사이에서 숨 쉴 곳을 찾지 못한 채 뻐끔거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을 때, 복도는 길고 조용했다. 벽지 색이 미묘하게 따뜻한 베이지색이었는데도 그 복도가 유독 차갑게 느껴졌다. 언니는 복도 끝, 한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문 너머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의 웃음소리였다. 조곤조곤하면서도 어딘가 여유가 넘치는, 상대를 내려다보는 듯한 웃음이었다. "준비됐어?" 언니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준비라니, 무엇에 대한 준비인지도 모르는 채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메어 대답할 수조차 없었다. 언니의 손이 도어락 위에 얹히는 순간, 나는 숨을 멈췄다. 문 안쪽에서 새어 나오는 향, 겨울바람처럼 시리면서 묵직한 그 냄새가 조금씩 더 진해지고 있었다. 그 냄새를 맡는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누구지, 이 냄새는. 문이 열리기도 전에 나는 이미 알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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