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엄마를 타락시키라고?

1화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천장의 무늬가 낯설다는 것이었다. 우리 집 원룸 천장에는 곰팡이가 슬어서 만든 세계지도 같은 얼룩이 있었는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천장은 하얀 석회 벽에 나무 서까래가 드러난, 어디서 본 적은 있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는 구조였다. 나는 실직한 지 여섯 달째였고, 그날도 새벽 세 시까지 웹소설을 읽다가 잠이 든 참이었으니까, 이건 필시 꿈일 거라고 단정하며 다시 눈을 감으려 했다. 그런데 몸이 이상했다. 팔을 들어보려 했더니 팔이 너무 길었고, 손가락이 너무 가늘었으며, 무엇보다도 이 몸에는 내가 알던 흉터가 하나도 없었다. 재작년 겨울에 자전거를 타다가 손등을 긁힌 흉터가 있어야 할 자리에, 그저 매끈한 살결만 있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봤는데, 턱선이 너무 날카롭고 콧대가 너무 오뚝해서, 이건 내 얼굴이 아니라 남의 얼굴을 만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건... 꿈이 아니라 뭔가 잘못됐다' 하는 확신이 들자마자,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는데, 그 순간 시야 한켠에 반투명한 글자가 떠올랐다. [강태호님, 각성을 환영합니다.] ...강태호. 그건 내 이름이 아니었다. 내 이름은 이신우고, 서른한 살이고, 마지막 직장이었던 물류센터에서 잘린 게 반년 전이고,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었는데... 라는 생각을 거기까지 이어가다가, 나는 방 한쪽에 걸린 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거울 속에는 낯익은 얼굴이 아니라, 열여덟이나 열아홉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서 있었는데, 검은 머리에 각진 턱, 그리고 내가 평생 가져본 적 없는 넓은 어깨를 가진 청년이었다. 나는 그 앞에서 오른손을 들어 흔들어보았고, 거울 속의 청년도 똑같이 오른손을 흔들었는데, 그 동작이 완벽하게 동기화된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기이하게 느껴졌다. 마치 남이 조종하는 아바타를 억지로 빌려 쓰고 있는 느낌이랄까. "이게... 뭐야" 하고 나는 소리 내어 물었는데, 그 목소리조차 내 것이 아니어서 오히려 더 소름이 돋았다. 이신우로 살면서 서른한 해 동안 익숙해진 저음이 아니라, 아직 성대가 다 자리를 잡지 않은 듯한, 미묘하게 얇고 날 선 소년의 음성이었다. 나는 그 목소리로 몇 마디를 더 중얼거려봤는데, "어, 어..." 라든가 "뭐지, 이거" 같은 무의미한 말들이었지만, 그마저도 낯선 사람의 성대를 빌려 쓰는 것 같아서 자꾸 헛기침을 하게 됐다. 그 순간 머릿속으로 정보가 쏟아지듯 밀려들었다. 마치 오래전에 읽었던 책의 목차가 갑자기 통째로 기억나는 느낌이었는데, 요컨대 이곳은 '청람 마법학원'이라는 곳이고, 나는 강태호라는 이름의 신입생이며, 이 세계는... 어라,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설정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법과 등급, 그리고 인간의 욕망을 다루는 특수 과목까지, 이건 내가 몇 달 전에 정주행했던 웹소설의 배경 설정과 지나치게 닮아 있었다. 내가 실직한 백수 시절 유일한 낙으로 삼았던 그 소설, 제목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학원물이었고, 뭔가 좀... 자극적인 전개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는 그냥 시간 때우기용으로 새벽에 읽다가 스크롤이나 내리던 소설이었지, 설마 그 안에 내가 직접 들어와서 몸을 굴리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설마 내가 그 소설 속으로 들어온 건가' 하는 생각이 스치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왜냐하면 그 소설의 세부 내용까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뒷맛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주인공이 있었고, 그 주인공 주변에 여러 인물들이 얽히는 구조였는데, 강태호라는 이름이 그 주인공이었는지 아니면 스쳐 지나가는 조연이었는지조차 헷갈렸다. 기억이 통째로 들어온 게 아니라 조각조각, 마치 퍼즐 상자를 흔들어서 몇 조각만 바닥에 떨어뜨린 것 같은 상태였다. 그때, 눈앞에 다시 글자가 떠올랐다. [알림: '마미의 쿡 시스템'이 사용자를 인식했습니다.] [시스템은 강태호님만 인지할 수 있습니다.] '마미의 쿡 시스템'이라니. 이름부터가 뭔가... 요상했다. 게임 시스템이라면 보통 '용사의 검' 이니 '전설의 인벤토리' 니 하는 거창한 이름이 붙던데, 이건 마치 인터넷 밈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작명이었다. 나는 그 이름을 곱씹으며 헛웃음을 삼켰는데, '이게 시스템 이름이라고?' 싶은 실없는 의문이 먼저 들었을 뿐, 그 안에 담긴 함의까지는 아직 짐작하지 못했다. '쿡'이라는 단어가 요리를 뜻하는 건지, 아니면 뭔가를 쿡쿡 찌른다는 의미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어감이 웃겨서 붙인 이름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건, 이름이 가벼운 것치고 시스템이 나를 '인식'했다고 명시한 걸 보면, 뭔가 실질적인 기능이 딸려 있다는 뜻이었다. [상세 정보는 첫 번째 조건이 충족될 때 공개됩니다.] [조건: 대상과의 첫 접촉.] 대상이라니, 무슨 대상. 나는 그 문장을 읽고도 별생각 없이 넘겼는데,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때 조금 더 의심을 품었어야 했다. '접촉'이라는 단어가 물리적인 걸 뜻하는지, 아니면 그냥 대화 한 번 나누는 걸 뜻하는지도 애매했고, 애초에 '대상'이 사람인지 물건인지 몬스터인지조차 특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갓 전생한 신입생 처지에, 낯선 기숙사 방과 낯선 몸뚱이와 낯선 이름을 동시에 받아든 상태에서 시스템 메시지 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울 여력은 없었다. 일단 살아야 했고, 일단 이 몸에 적응해야 했으니까.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 안을 둘러봤다. 좁지만 깔끔한 방이었고, 벽에는 마법학원 특유의 문장이 새겨진 배지 같은 것이 걸려 있었으며, 책상 위에는 손도 대지 않은 교과서 몇 권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 방의 원래 주인, 즉 강태호라는 소년이 어떤 일상을 살았는지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적어도 정리정돈은 잘하는 성격이었던 모양이었다.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강태호, 일어났냐" 하는 목소리가 들렸는데, 걸걸하면서도 어딘가 활기찬 톤이었다. 문을 열자 붉은 머리에 운동선수 같은 체형을 가진 남학생이 서 있었다. 어깨가 떡 벌어졌고, 팔뚝에는 훈련으로 다져진 듯한 근육이 붙어 있었으며, 웃는 얼굴이 상당히 호탕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난 박준서다. 옆방 살면서 룸메이트도 겸하는데, 오늘부터 잘 지내보자" 하고 그가 손을 내밀었고, 나는 얼결에 그 손을 잡으며 강태호라는 이름에 처음으로 응답했다. 손을 맞잡는 순간 준서의 손이 내 손보다 훨씬 두껍고 거칠다는 게 느껴졌는데, 그것만으로도 이 세계가 단순히 마법을 다루는 곳이 아니라 몸을 쓰는 훈련도 병행하는 곳이라는 걸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어, 그래... 강태호다" 하고 대답하는 내 목소리가 여전히 낯설었지만, 이 상황에 적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는 계산이 섰다. 어차피 여기서 이신우라고 밝혀봤자 정신병자 취급이나 받을 게 뻔했고, 강태호로 사는 게 지금으로선 유일한 선택지였다. "근데 표정이 왜 그래? 자다가 무슨 꿈 꿨냐" 하고 준서가 물었는데, 나는 순간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어... 좀 이상한 꿈" 하고 얼버무렸다. 준서는 그 말에 별 의심 없이 "하긴, 개강 전날은 다 그렇지" 하며 웃어넘겼는데, 그 무심함이 오히려 나한테는 다행이었다. "오늘 오후에 첫 수업 있는 거 알지? '욕망의 무기화' 과목, 신입 교사가 왔다는데 다들 난리도 아니더라" 하고 준서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는데, 나는 그 과목 이름을 듣는 순간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 이름 역시, 내가 예전에 정주행했던 그 웹소설 속 설정과 지나치게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욕망의 무기화'라니, 이건 그냥 마법 수업 이름치고는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뭔가 서비스씬을 예약해놓은 것 같은 어감이었다. "신입 교사가... 누군데?" 하고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는데, 준서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건 나도 몰라. 근데 소문으로는 좀 특이한 사람이라던데" 라고만 답했다. 그 '특이하다'는 말이 어떤 방향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왠지 좋은 쪽으로는 특이할 것 같지 않다는 예감이 들었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뒤를 이을 구체적인 상상은 아직 형체를 갖추지 못한 채 흐릿하게 흩어졌다. 다만 확실한 건, 이 몸으로 이 학원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었고, 그것뿐이었다. 준서가 방을 나선 뒤, 나는 다시 거울 앞에 서서 낯선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강태호. 이 이름으로, 이 몸으로, 앞으로 얼마나 오래 살아야 할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신우로 살던 삶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거울 속의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얼굴을 향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잘 부탁한다, 강태호." 물론 강태호는 나였으니, 이 말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옷장을 열어보니 학원 교복이 걸려 있었고, 나는 그것을 주섬주섬 걸치면서 이 낯선 몸의 감각에 조금씩 익숙해지려 애썼다. 다리가 길어서 걸음걸이가 자꾸 어색했고, 팔을 흔들 때마다 예상보다 훨씬 멀리 나가는 손끝에 몇 번이나 벽을 긁적였다. 그렇게 어설프게 몸을 추스르는 사이, 시야 한켠에 떠 있던 '마미의 쿡 시스템'이라는 글자가 문득 다시 눈에 들어왔는데, 그 우스꽝스러운 이름이 앞으로 내 목숨줄을 쥐게 될 거라는 사실은, 이때까지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나는 그 '욕망의 무기화' 수업에 들어가서,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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