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강의실을 나온 뒤, 나는 곧장 기숙사로 돌아왔다. 복도를 걸으면서도 다리가 제대로 움직이는지 확신이 안 갔는데, 발끝이 바닥에 닿는 감각조차 이상하게 멀게 느껴졌다. 계단을 두 칸씩 뛰어 올라가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방금 전 강의실에서 본 문장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 문장들이 사라지기 전에 방에 도착해서 다시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문을 걸어 잠그고, 창문 쪼가리 하나까지 커튼으로 가려버렸는데, 누가 볼 것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하는 내 모습이 스스로도 좀 우스웠다. 준서가 방에 있었더라면 시스템 창을 확인하지 못했을 텐데, 다행히 그는 아직 저녁 훈련장에 있는 모양이었고, 훈련 끝나는 시간까지는 못해도 한 시간쯤 여유가 있을 거라는 계산이 곧바로 섰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눈앞에 떠 있는 문구를 다시 노려보았다.
[미션 1: 어머니의 첫 균열]
[내용: 서인아가 수업 중 학생들 앞에서 상의 단추 두 개를 풀도록 유도하십시오.]
[제한 시간: 24시간]
[성공 보상: 시스템 권한 확장, 귀환 정보 1단계 해금]
[실패 시: 서인아의 마력 봉인 강화 — 이 세계에서 영구 이탈 불가]
...이게 무슨 미친 소리인가 싶었다. 나는 그 문장을 세 번쯤 다시 읽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그 내용이 더 선명해질 뿐이었지, 다르게 해석할 여지는 없었다. 혹시 내가 뭔가 잘못 읽은 게 아닐까 싶어서 손가락으로 한 글자씩 짚어가며 다시 읽어봤는데, 그래봤자 결과는 똑같았다. 그러니까 요컨대, 나는 어머니가... 아니, 서인아가 학생들 앞에서 스스로 옷을 풀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거였고, 그것도 하루 안에 해내지 못하면 어머니가 이 세계에 영원히 묶여버린다는 뜻이었다.
'이게, 되네...?' 하는 생각이 스쳤다가, 곧바로 나는 그 생각을 한 스스로에게 소름이 돋았다. 아니, 잠깐. 지금 내가 뭘 계산하려고 한 거지. 방법이 있을까 없을까를 먼저 재본 거잖아. 이건 흥미롭고 놀라운 일이 아니라, 명백히 잘못된 강요였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 안을 두어 바퀴 서성거렸는데, 그렇게 움직이면서 생각을 정리해야 할 것 같아서였지, 딱히 목적이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알림: 시스템 상세 규칙이 공개됩니다.]
[규칙 1. 시스템은 강태호님에게만 보이며, 서인아를 포함한 타인은 시스템의 존재를 인지할 수 없습니다.]
[규칙 2. 미션은 서인아의 '순도'를 단계적으로 낮추는 방식으로 설계되며, 순도가 완전히 소실될 시 서인아는 원래 세계로 돌아갈 자격을 얻습니다.]
[규칙 3. 강태호님이 미션을 거부하거나 방치할 경우, 서인아의 순도는 임의로 강제 삭감됩니다.]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나는 다시 한번 그 문구를 읽으며, 이게 나에게 유리한 조건인지 아니면 최악의 함정인지를 가늠하려 애썼다. 정리해보자면, 어머니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려면 반드시 이 '순도'라는 값이 소실되어야 하는데, 그 소실을 유도하는 건 오직 나만이 할 수 있고, 만약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시스템이 알아서 그 값을 깎는다는 거였다. 문제는 그 '임의로 강제 삭감'이라는 말이 정확히 무슨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전혀 설명이 없다는 점이었다. 순도가 깎이는 과정에서 어머니가 다치거나, 정신적으로 무너지거나, 최악의 경우 아예 다른 방식으로 존재 자체가 훼손될 수도 있다는 상상까지 뻗어나가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러니까, 내가 미션을 수행하든 안 하든 어머니의 순도는 어차피 깎이게 되어 있다는 뜻이었고, 그렇다면 차라리 내 통제 하에서 이 과정을 진행시키는 게 조금이나마 안전할 거라는... 그런 논리가 시스템에 의해 강제로 내 머릿속에 심겨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이게, 정말 나한테 유리한 조건이 맞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곧바로 다른 생각이 그 의문을 덮었다. 어머니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려면 이 시스템의 규칙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그 규칙이 요구하는 게 하필 이런 종류의 굴욕이라는 것. 시스템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사람을 몰아붙이는 방식으로 설계된 건지, 아니면 나라는 개체를 상대로 특별히 악의적으로 짜인 건지도 궁금했지만, 지금 그걸 따져 물을 상대가 없었다. 시스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다음 줄이 뜨기만을 기다리는 텅 빈 화면처럼, 조용히 내 앞에 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한참을 그렇게 있었는데, 머릿속으로 온갖 계산이 오갔다. 만약 미션을 거부한다면 어머니의 순도는 알 수 없는 방식으로 깎일 것이고, 그게 오히려 더 위험할 수도 있었다. 반면 내가 직접 미션을 수행한다면, 적어도 그 진행 속도와 방향은 내가 조절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단추 두 개. 그것뿐이었다. 24시간 안에 단추 두 개를 풀게 만들면 이 미션은 끝난다. 그렇게 생각하니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는데, 문제는 그 대상이 다른 누구도 아닌 서인아라는 것, 그리고 서인아가 내 어머니라는 사실이었다. 그 두 조건이 겹쳐지는 순간 이 미션은 단순한 임무가 아니라 뭔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변질되었다.
'그래, 이건 어머니를 위한 선택이다' 하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려 했지만, 그 합리화 뒤에 숨은 다른 감정을 나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강의실에서 그녀를 처음 마주했을 때 느꼈던 그 이상한 두근거림, 이건 단순히 어머니를 다시 만난 반가움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감정이었다. 그 감정의 이름을 굳이 붙이고 싶지 않아서 나는 계속 다른 말로 그것을 덮으려 했는데, 덮으려 할수록 오히려 그 감정의 형태가 더 뚜렷하게 만져지는 기분이었다. 이건 정말이지, 최악의 타이밍에 최악의 방식으로 자각하게 된 최악의 감정이었다.
'...이게 이렇게 되네' 하는 자조적인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웃을 상황이 전혀 아닌데도 웃음이 나오는 건, 아마 이 모든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였을 거다. 시한부처럼 줄어드는 숫자, 알 수 없는 시스템, 그리고 그 시스템이 나에게 요구하는 게 하필 어머니를 향한 감정의 실험이라니.
[제한 시간: 23시간 41분 남음]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그 숫자를 보자,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생각만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방금까지의 자조와 혼란은 잠시 접어두고,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한다는 감각이 뒤통수를 잡아채듯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서인아, 아니 어머니를 만나야 했고, 어떻게든 이 미션을 수행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다만 방법을 찾는다는 것과 그걸 실제로 실행에 옮긴다는 것 사이에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몇 개나 더 있었는데, 그 산의 정체가 뭔지는 나도 아직 정확히 알지 못했다.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태호야, 나야" 하는 목소리가 들렸는데, 낮게 억누른 듯한, 그러나 분명한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나는 순간 몸이 굳었다. 시스템 창은 여전히 시야 한켠에 떠 있었고, 그 창을 지운다고 해서 방금 읽은 내용이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으니, 나는 그 상태 그대로 문을 열러 걸어가야 했다.
문을 열자 그녀가 서 있었는데, 수업복 그대로였고, 표정에는 걱정과 혼란이 뒤섞여 있었다.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서 있는 모습이, 아까 강의실에서 봤던 당당한 강사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아까 그 표정, 뭔가 알고 있는 거지" 하고 그녀가 방 안으로 들어서며 물었는데, 나는 순간 시스템 창의 내용을 그대로 말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어머니는 이 시스템의 존재조차 알 수 없으니까. 규칙 1이 다시 눈앞에 떠오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게... 이 세계에 대해 뭔가 알아낸 것 같아요" 하고 나는 최대한 모호하게 대답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하려고 애썼지만, 그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럽게 들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뭘 알아냈는데" 하고 그녀가 재차 물었고, 나는 시선을 피하며 대답을 고르는 사이, 시야 한켠의 숫자가 무심하게 줄어드는 걸 느꼈다.
[제한 시간: 23시간 12분 남음]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이 미션을 수행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압박감에 짓눌리고 있었고, 그 압박감 아래에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흥분이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내 대답을 기다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 눈빛 속에는 아들을 걱정하는 마음과 함께,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걸 알아챈 사람 특유의 예리함이 함께 섞여 있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이 상황에서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거짓이어야 하는지, 그 경계선조차 아직 그려지지 않은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