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엄마를 타락시키라고?

4화

그날 밤, 나는 어머니에게 아무런 진실도 말하지 못한 채로 대화를 얼버무렸다. 어머니는 저녁을 먹는 내내 나를 힐끔거리며 뭔가 묻고 싶어 하는 눈치였는데, 나는 그 시선을 피하느라 국그릇에 얼굴을 파묻듯이 숙이고 있었다. "여기가... 대체 어디니. 그리고 너는 왜 그렇게 변해 있고." 하고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물었을 때,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최대한 태연한 목소리를 짜냈다. "돌아갈 방법을 찾으려면 이 세계의 규칙을 좀 더 알아야 할 것 같아. 지금은 섣부르게 움직이면 위험할 수도 있어서." 하고 나는 모호한 설명만 던졌는데, 사실 이 말 자체는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그 '규칙'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 규칙 안에 어머니를 겨냥한 미션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도저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을 뿐이다. 어머니는 그 말을 믿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결국 더 캐묻지 않고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는데, 그 짧은 순간에도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죄책감으로 시간을 흘려보낼 여유는 없었다. 나는 홀로 남아 밤새 시스템 창과 씨름했다. [미션 1: 어머니의 첫 균열] [제한 시간: 8시간 22분 남음] 숫자는 무자비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그 숫자를 몇 번이나 눈으로 좇았는데, 8시간이라는 시간이 처음엔 넉넉해 보였다가도, 잠도 자야 하고 다음 날 수업도 들어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순식간에 빠듯한 시간으로 바뀌어 보였다. 요컨대 이건 '느긋하게 고민할 시간'이 아니라 '즉시 실행 계획을 세워야 할 시간'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결국 최후의 방법을 떠올렸다. 시스템 창에 미션 내용에 대한 힌트가 있는지 다시 살펴보니, 하단에 작은 문구가 하나 더 있었는데, 처음 봤을 때는 흘려 넘겼던 부분이었다. [힌트: 대상의 '몰입 상태'를 유도하십시오. 강의 중 마법 실습 시 대상은 무기화된 욕망 마법을 시연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계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몰입 상태라니. 나는 그 문구를 몇 번이나 곱씹으며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었다. 처음엔 그냥 '수업에 집중하게 만들라'는 뜻인가 싶었는데, 곱씹을수록 그 단어 선택이 지나치게 노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기화된 욕망 마법'이라는 표현부터가 이미 방향성을 알려주고 있는 것 아닌가. 결국 다음 날 수업에서 벌어질 마법 실습 시간을 이용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요컨대 이 과목의 특성상, 서인아는 학생들 앞에서 자신의 마법을 직접 시연해야 하는 순간이 있을 텐데, 그 마법이라는 게 하필 '욕망의 무기화'와 관련된 종류라면, 시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옷차림이 흐트러질 계기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몰랐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잠시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이걸 계획이라고 세우고 있는 내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게 유일한 방법이라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었다. ...더럽게 쓸모없는 죄책감이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수업 시간, 나는 맨 앞자리에 앉아 잔뜩 긴장한 채로 시작을 기다렸다. 강의실 안의 책상은 반원형으로 배치되어 있었는데, 맨 앞자리에서 보는 마법진은 유난히 크고 선명했다. 다른 학생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필기 도구를 꺼내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고, 나만 손바닥에 땀이 차오르는 걸 느끼며 시스템 창을 곁눈질로 확인하고 있었다. "오늘은 실전 시연을 진행하겠습니다" 하고 서인아가 담담하게 말했는데, 그녀는 마법진을 그리기 위해 강의실 중앙으로 나섰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평소와 다름없이 곧고 절제되어 있어서, 나는 잠시 이 사람이 몇 시간 후에 내 미션의 도구가 될 거라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욕망의 무기화'는 시전자 본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억눌린 감정을 외부 마력으로 치환하는 기술입니다" 하고 그녀가 설명을 이어갔는데,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시스템 창의 힌트를 다시 떠올렸다. 억눌린 감정이라니. 그렇다면 그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게 만드는 게 내 역할이라는 뜻일까. [알림: 대상이 마력 시연을 시작했습니다. 몰입도가 상승하면 미션 진행률이 오릅니다.] [현재 진행률: 12%] ...퍼센트로 표시되는구나. 나는 그 숫자를 보며 계산을 시작했다. 시연이 끝날 때까지 이 진행률을 최대한 끌어올려야 한다는 뜻이었는데, 문제는 내가 대체 무엇을 해야 진행률이 오르는지 정확히 모른다는 거였다. 12%라는 숫자가 그냥 '시연을 시작했다'는 사실만으로 주어진 것인지, 아니면 이미 내 존재 자체가 그녀를 긴장시켜서 오른 건지 구분할 방법이 없었다. 간단한 계산식이라고 생각했던 것치고는 변수가 너무 많았다. 서인아가 마법진에 손을 얹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에서 은은한 붉은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 빛이 강해질수록 그녀의 호흡이 조금씩 흐트러지는 게 눈에 보였다. 강의실 안의 조명이 그 붉은빛에 반사되어 벽면에 일렁이는 무늬를 만들어냈고, 몇몇 학생들은 그 시각적 효과에 감탄하며 작게 속삭이기도 했다. "이 마법은... 시전자의 감정이 격해질수록 위력이 강해집니다" 하고 그녀가 설명을 이어가는 동시에, 나는 문득 이 마법의 원리를 이용할 방법을 떠올렸다. 감정이 격해질수록 위력이 강해진다는 건, 반대로 말하면 위력을 억지로 끌어올리려면 감정을 격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감정을 격하게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은, 공개된 자리에서 부끄러움을 유발하는 것이었다. "교수님, 질문이 있습니다" 하고 나는 손을 들어 발언권을 얻었다. 내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말해보세요" 하고 그녀가 나를 돌아봤는데, 그 순간 나는 그녀의 눈빛에서 잠깐의 불안을 읽어냈다. 그 불안이 나를 향한 경계심인지, 아니면 이 마법 자체에 대한 부담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쪽이든 내게는 좋은 신호였다. "그 감정이 격해지는 조건이 구체적으로 뭔지 궁금합니다. 예를 들면, 부끄러움이나... 수치심 같은 것도 포함되나요" 하고 나는 최대한 학문적인 어조로 질문을 던졌는데, 그 질문의 의도를 그녀만이 알아챈 듯 얼굴이 순간 붉어졌다. 강의실 안의 다른 학생들은 그저 학문적인 질문이라 여기며 고개를 끄덕였고, 몇몇은 노트에 뭔가를 받아 적기까지 했는데, 그 무해한 반응들이 오히려 상황을 더 기묘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모든 강렬한 감정이 촉매가 될 수 있어요" 하고 그녀가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지만, 마법진을 쥔 손끝이 아주 살짝 떨리고 있는 게 내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알림: 진행률이 상승했습니다.] [현재 진행률: 27%] ...개사긴데? 나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질문 하나가 이렇게 큰 진행률 상승을 만들어냈다는 게 놀라웠고, 이건 곧 이 미션의 메커니즘이 내가 어머니를 심리적으로 압박하거나 자극하는 정도에 정확히 비례한다는 뜻이었다. 12%에서 27%로, 단 하나의 질문으로 15포인트가 올랐다는 건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었다. 이 속도라면 시연이 끝나기 전에 진행률을 상당히 끌어올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 계산이 서는 순간 나는 오히려 더 불편해졌다. 그 사실을 깨닫자, 나는 잠시 손을 멈췄다. 이걸 계속 밀어붙여도 되는 걸까 하는 망설임이 들었는데, 이건 결국 내가 어머니를 궁지로 몰아넣는 행위와 다를 게 없었다. 남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들고, 그 부끄러움을 이용해서 시스템의 진행률을 채우는 것. 말로 풀어놓고 보니 스스로도 어이가 없을 만큼 못된 짓이었다. 동시에 시야 한켠의 시간 표시가 무섭게 줄어들고 있었다. [제한 시간: 6시간 10분 남음]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미션에 실패했을 때 벌어질 일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 정확히 모르고 있었고, 그 무지가 오히려 나를 더 조급하게 만들었다. 실패 시 페널티가 어머니에게 직접적인 위해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이상, 나는 죄책감보다 안전을 우선해야 했다. 적어도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그렇다면 지금 그 감정을 직접 시연해보시면 이해가 더 쉬울 것 같습니다" 하고 나는 다시 손을 들어 말했는데, 강의실 안의 다른 학생들도 흥미로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몇몇은 팔짱을 끼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고, 어떤 학생은 옆자리 친구에게 뭔가를 소곤거리며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무해한 호기심들이 나에게는 오히려 무기가 되었다. 서인아는 잠시 나를 노려봤는데, 그 시선 안에는 분명한 원망이 섞여 있었지만, 동시에 수업이라는 명분 앞에서 거부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는 것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보면서, 나는 속으로 몇 번이나 사과의 말을 되풀이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하지만 입 밖으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하고 그녀가 낮게 대답하며 마법진 위에서 자세를 고쳤다. 그 짧은 대답 안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눌려 있는지, 나는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녀의 손끝에서 붉은 마력이 훨씬 강렬하게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 힘이 격해질수록 그녀의 상의 첫 번째 단추 부근이 팽창하는 마력에 의해 저절로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단추가 실밥을 견디지 못하고 조금씩 늘어나는 소리가, 조용해진 강의실 안에서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알림: 진행률이 급격히 상승했습니다.] [현재 진행률: 68%] ...이게, 이렇게 되네. 숫자가 41포인트나 한꺼번에 뛰어오른 걸 보면서, 나는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이 정도면 시연이 끝나기 전에 목표치를 채울 수도 있겠다는 계산이 섰지만, 그 계산의 정확도를 확인할 여유조차 없었다. 강의실 안 학생들이 숨을 죽인 채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고, 나는 그 시선들 사이에서 이상한 흥분과 죄책감이 동시에 밀려오는 걸 느꼈다. 이 상황을 만든 게 나라는 사실이, 이 순간 가장 견디기 힘든 부분이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