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그녀는 아버지의 여자였다

1화

이삿짐 트럭이 대문 앞에 멈춰선 건 오후 세 시쯤이었다. 엔진 소리가 골목을 울리다가, 이내 뚝 끊겼다. 나는 이층 창가에 서서 그걸 내려다보고 있었다. 커튼을 살짝 걷은 채로. 며칠 전부터 어머니는 몇 번이나 그 이야기를 했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오는 분이야. 살림 봐주실 분이니까, 다은이라는 딸도 같이 온다고 하더라.’ 그때는 그냥 흘려들었다. 새로 들어오는 사람이 누구든, 내 삶에 크게 끼어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어머니가 먼저 마당으로 나갔다. 굽 낮은 구두 소리가 또각또각, 현관에서부터 대문까지 이어졌다. "선희 씨,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지." 낯선 이름이었다. 나는 창문을 조금 더 열었다. 찬 공기가 훅 들어왔다. 트럭 옆에서 여자 하나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니에요, 사모님. 다은이도 좋아해요, 서울로 온다니까." 목소리가 낮고 부드러웠다. 바람에 실려 온 그 음성이, 이상하게 귓속에 오래 남았다. 여자가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숨을 삼켰다. 검은 원피스 위로 걸친 카디건이 헐렁했는데도, 몸의 굴곡이 감춰지지 않았다. 허리를 숙일 때마다 앞섶이 살짝 벌어졌다. 목선에서 시작된 시선이, 쇄골을 지나, 카디건 자락이 흔들리는 곳까지 흘러갔다. 입술은 옅은 색이었고, 눈매는 순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지쳐 있었다. 서른일곱, 여덟, 그쯤일까. 나이를 가늠하다가, 나는 스스로에게 조금 놀랐다. 왜 그런 걸 계산하고 있었는지. 창틀을 잡은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그 옆에 서 있던 여자애가 눈에 들어온 건 그다음이었다. 금발로 염색한 머리에, 피부가 새하얬다. 캐리어를 끌면서 영어로 뭐라 중얼거리다가, 다시 한국어로 바꿔 말했다. "엄마, 이거 무거워. 좀 들어줘." 딸인 모양이었다. 강다은이라고 했다. 트럭 기사가 짐을 내리는 동안, 다은은 계속 캐리어 손잡이를 붙잡고 투덜거렸다. 나는 그 애를 보다가, 다시 여자에게로 시선이 돌아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딸 쪽이 내 또래였고, 화려했고, 시선을 끌었는데도. 내 눈은 자꾸 그 여자, 강선희라는 이름의 여자에게로 미끄러졌다. 그녀가 짐을 들다가 허리를 짚었다. "괜찮으세요?" 다은이가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아. 살짝 삐끗했어." 웃으며 대답하는 얼굴이, 방금 전까지 지쳐 보이던 얼굴과는 또 달랐다. 주름 하나 없이 부드럽게 접히는 눈매. 나는 그 표정 하나에 심장이 이상하게 뛰는 걸 느꼈다. 한참을 그렇게 창가에 서 있었다. 트럭에서 상자들이 하나둘 내려지고, 어머니가 그중 몇 개를 손수 옮기는 걸 도우려 하자 강선희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유, 사모님이 이런 걸 왜 드세요." "괜찮아, 이 정도쯤이야."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짧게 오갔다. 나는 그 대화의 내용보다, 강선희가 상자를 받아 안을 때 팔에 힘줄이 서는 모양을 더 오래 눈에 담았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들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창문에서 물러나 커튼을 다시 쳤다. 그런데도 자꾸만 손끝이 다시 커튼을 걷고 싶어 했다. 저녁이 되자 집 안 공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부엌에서 낯선 도구들이 정리되는 소리가 들렸고, 복도에는 새 사람의 향이 배어들고 있었다. 세제 냄새인지, 향수 냄새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옅은 향이었다. 계단 난간을 짚을 때마다 그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어머니는 저녁 약속이 있다며 일찍 나갔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집 안이 갑자기 넓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아버지는 서재에 있었다. 문 아래로 새어 나오는 불빛이 희미하게 복도를 비추고 있었다. 나는 방에서 나와 물을 마시러 부엌으로 내려갔다. 발소리를 죽이려 애쓰지도 않았다. 그냥 물 한 잔 마시러 가는 길이었을 뿐이니까. 계단을 반쯤 내려왔을 때, 서재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게 보였다. 평소라면 굳게 닫혀 있던 문이었다.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시간에 여기 계시면···." 강선희의 목소리였다. 조심스럽고, 떨렸다. 말끝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흐려졌다. "들어와." 아버지의 목소리는 짧고 낮았다. 명령이었다. 그 한마디에 담긴 무게가, 계단을 타고 내 발밑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계단 중간에 멈춰 섰다. 숨소리를 죽였다. 물컵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문틈으로, 강선희가 서재 안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카디건을 벗은 채였다. 문이 닫혔다. 딸깍. 그 소리가 계단 전체를 채웠다. 나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손끝이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냥 업무 얘긴가. 입주 첫날인데, 뭘 정리하러 들어갔을 수도 있어. 그렇게 생각하려 했지만,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서재 문 너머로 낮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여자의 웃음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것이었다. 그 웃음소리가 낮게 깔리다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 뒤로 이어진 침묵이, 어떤 말보다 더 크게 들렸다. 나는 계단을 내려가지도, 올라가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물컵을 쥔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귀가 자꾸만 문 쪽으로 쏠렸다. 들어서는 안 될 소리를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 소리도 듣고 싶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그 순간, 서재 안에서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작고 낮은, 그러나 분명한 소리였다. 나는 뒤돌아 조용히 계단을 올라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유리 위를 걷는 것 같았다.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나서도, 심장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물컵은 결국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채였다. 침대에 걸터앉아 창밖을 보니, 마당에 세워둔 이삿짐 트럭이 아직 그대로 있었다. 그 트럭 옆으로, 다은이가 캐리어를 세워둔 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 애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어, 다시 아래층 복도 쪽으로 돌렸다. 문은 여전히 닫혀 있을 터였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나는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자꾸만, 그 문 너머의 침묵이 귓가에 맴돌았다. 딸깍, 하던 그 소리가. 그리고 그 뒤에 이어졌던, 낮고 짧은 웃음소리가. 나는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까지 덮었다. 잠은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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