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다음 날, 비가 내렸다.
아침부터 하늘이 흐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고, 등교 준비를 하는 내내 목덜미가 축축했다.
오후가 되자 굵은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수업 시간 내내 창문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책상 위에 펼쳐놓은 노트에는 글씨 대신 낙서만 늘어갔다.
종이 울리고 가방을 챙기면서도, 나는 우산을 어디에 뒀는지 떠올리려 애썼다.
현관에 우산꽂이가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버스 정류장에 내렸을 때에야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하늘은 이미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빗줄기가 아스팔트에 부딪히며 튀어 오를 정도였다.
가방을 머리 위로 올린 채, 나는 집까지 뛰어야 했다.
운동화 안으로 빗물이 스며들었다.
바짓단이 무겁게 다리에 감겼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무렵, 골목 어귀에 들어섰다.
그리고 마당 앞에 강선희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장바구니를 든 채, 우산도 없이 비를 그대로 맞고 있었다.
젖은 앞머리가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고, 얇은 카디건이 몸에 그대로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빗속에 가만히 서 있는 그 모습이 이상하게 눈에 박혔다.
"어머, 준서 학생."
그녀가 나를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빗물이 눈썹을 타고 흘러내리는 와중에도, 그녀는 애써 웃어 보였다.
"장바구니 무거워 보이는데···."
나는 대답 대신 그녀의 손에서 봉투를 받아 들었다.
봉투 안쪽으로 물이 스며들어 무게가 배는 무거웠다.
"괜찮아요, 제가···"
"이거 놓치면 다 젖어요."
짧게 말하며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빗물에 젖은 옷소매가 손끝에 닿았다.
차가운 감촉이었는데, 그 아래 살갗은 이상하게 따뜻했다.
그녀의 팔이 순간 움찔했다.
"빨리 들어가요."
나는 그녀를 이끌며 대문 쪽으로 걸었다.
빗소리가 귓가를 가득 채워서, 다른 소리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좁은 처마 밑을 지나는 순간, 몸이 부딪혔다.
장바구니가 흔들리며 나와 그녀 사이 간격이 순식간에 좁아졌다.
그녀의 어깨가 내 팔에 닿았다.
비에 젖은 머리카락에서 시트러스 향이 옅게 풍겼다.
그 향이 빗물 냄새 사이로 스며들어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심장이 이상하게 뛰기 시작했다.
쿵. 쿵.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그녀의 어깨 위로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 물줄기를 멍하니 바라보다, 뒤늦게 시선을 거뒀다.
"죄송해요···."
그녀가 황급히 몸을 떼며 말했다.
뺨이 붉어져 있었다.
비 때문인지, 다른 이유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에요."
나는 애써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봉투를 쥔 손에 힘을 주며, 그 떨림을 숨기려 했다.
현관 앞에 도착해서야 그녀에게서 봉투를 건넸다.
빗물이 처마 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소리만 잠깐 이어졌다.
"고마워요, 준서 학생."
그녀가 다시 존댓말로 거리를 두었다.
그 짧은 한마디가 방금 전 좁혀졌던 간격을 도로 밀어내는 것 같았다.
그 거리감이 오히려 마음을 더 어지럽혔다.
나는 그녀가 현관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빗물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도 잊은 채였다.
-
집 안으로 들어서자 다은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젖은 창밖을 바라보다 나를 발견하고는 눈이 커졌다.
텔레비전 소리가 낮게 깔려 있었지만, 다은의 시선은 곧바로 나에게로 옮겨왔다.
"둘이 같이 왔어?"
"어, 비 오는데 엄마가 우산도 없이 서 있길래."
나는 대수롭지 않은 척 신발을 벗으며 대답했다.
다은의 시선이 내 젖은 어깨와 강선희의 젖은 머리를 번갈아 훑었다.
그 시선이 이상하게 느리게 움직였다.
"···그렇구나."
다은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낮아졌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계단으로 향했다.
한 계단, 두 계단.
등 뒤에서 다은의 시선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방으로 올라와 젖은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손끝에 남은 그 온기가 자꾸 되살아났다.
셔츠를 벗어 젖은 옷더미 위에 던지고, 마른 티셔츠를 꺼내 입는 짧은 순간에도 머릿속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빗물에 젖은 팔. 붉어진 뺨. 죄송해요···.〉
그 짧은 순간의 잔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내면서도, 나는 몇 번이고 그 처마 밑 순간을 되짚었다.
간격이 좁혀졌던 그 짧은 초 단위의 시간을.
시트러스 향이 남아 있던 옷소매를.
바보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생각은 자꾸 그리로 흘러갔다.
-
저녁, 나는 다은의 방으로 다시 불려 갔다.
"오빠, 잠깐 얘기 좀 해."
다은의 표정이 낮에 봤던 그 미묘한 무게를 여전히 담고 있었다.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섰을 때, 다은은 이미 침대 위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뭔데."
나는 문가에 선 채 물었다.
다은이 침대에 걸터앉아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너 우리 엄마 좋아해?"
직설적인 질문이었다.
숨이 턱 막혔다.
방 안의 공기가 순간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까 봤어. 둘이 처마 밑에서."
다은의 목소리에는 비난보다 걱정이 더 짙게 배어 있었다.
"그런 거 아니야."
나는 서둘러 부정했지만, 목소리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오빠, 나 눈치 없는 거 아니야."
다은이 무릎을 끌어안으며 말을 이었다.
"너 며칠 전부터 계속 부엌 쪽 신경 쓰잖아. 밥 먹을 때도 엄마만 쳐다보고."
"···그런 적 없어."
"있어."
다은이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그 단호함이 오히려 나를 더 궁지로 몰아넣는 것 같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다은의 시선을 피했다.
"근데 그거보다 더 걱정되는 게 있어."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나 어제 마당에서···"
말을 하다 말고 다은이 입을 다물었다.
"뭘 봤는데."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걸 느꼈다.
손끝이 다시 차가워졌다.
다은이 머뭇거리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중에 얘기할게."
"강다은."
나는 한 걸음 다가서며 이름을 불렀다.
다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진짜 나중에. 지금은 확실하지 않아서."
다은이 애써 화제를 돌리듯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핸드폰 화면 불빛이 다은의 얼굴을 짧게 비췄다.
그 얼굴에는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불안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더 캐묻고 싶었지만, 다은의 표정에서 지금은 물러서야 한다는 걸 직감했다.
"···알았어. 나중에 꼭 얘기해."
"응."
짧은 대답을 끝으로, 다은은 더 이상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방을 나서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 어제 마당에서···〉
그 말끝이 자꾸 귓가에 걸렸다.
다은이 무엇을 봤는지, 그것이 나와 관련된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어머니와 이강철에 관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복도를 걸으면서도 여러 가지 가능성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혹시 어제 마당에서 강선희와 마주쳤던 순간을 본 걸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생각이 꼬리를 물수록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계단을 내려오는데 서재 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강철의 목소리였다.
평소보다 날카로운 어조였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냉기는 또렷하게 전해졌다.
무슨 말인지 정확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 어조만으로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나는 숨을 죽인 채, 그 문 앞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