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그녀는 아버지의 여자였다

3화

이틀이 지났다. 집안은 겉으로 평온했다. 강선희는 아침마다 정확한 시간에 밥을 지었고, 다은은 여전히 늦잠을 잤고, 박정혜는 각종 모임으로 바빴다. 이강철은 회사 일로 늦게 들어오는 날이 많았다. 식탁 위에 놓인 국그릇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다은의 웃음소리가 계단을 타고 내려오고, 현관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그런 하루하루였다. 겉으로는. 그 사이사이, 서재 문이 몇 번 더 조용히 닫히는 걸 봤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던 낮은 목소리들. 발소리를 죽이며 지나가던 강선희의 뒷모습. 나는 그때마다 못 본 척 방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오르며 등 뒤로 문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쿵. 그 소리가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그냥 업무 얘기일 수도 있어.〉 그 말은 이제 더 이상 나 자신을 설득하지 못했다. 며칠째 반복되는 이 말을 스스로도 믿지 않고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어느 오후, 나는 물을 마시러 부엌으로 내려갔다. 발소리를 죽인 것도 아닌데, 강선희는 내 인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등을 돌린 채 통화를 하고 있었다. 어깨가 조금 굽어 있었다. "아니에요, 오빠. 지금 형편에 그건 무리예요···." 목소리가 낮고 힘없었다. 전화기 너머로 웅얼거리는 남자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아버지 병원비는 제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그러니까 그쪽은···" 나는 걸음을 멈췄다. 숨을 죽이고 벽 뒤에 섰다. 심장이 이상하게 조여왔다. 이런 대화를 엿듣는 게 옳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네, 다음 달까지는 꼭···. 죄송해요, 제가 지금 이것밖에···." 말끝이 흐려지며 전화가 끊겼다. 작게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숨을 고르는 듯한, 마음을 다잡는 듯한 그런 한숨이었다. 나는 인기척을 내며 부엌으로 들어섰다. 일부러 발소리를 조금 크게 냈다. 강선희가 놀란 듯 몸을 돌렸다. 얼굴에 남아 있던 그늘이 순식간에 지워지고, 그 자리에 익숙한 미소가 걸렸다. "어머, 준서 학생. 언제 왔어요?" "방금요." 나는 태연한 척 냉장고로 향했다. 문을 여는 손끝이 조금 떨렸지만,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길 바랐다. "뭐 필요한 거 있어요? 제가 갖다 드릴게요." 그녀가 서둘러 앞치마를 매만졌다. 방금 전까지 통화하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몸짓이 빨랐다. "아니요, 제가 할게요." 괜찮다는 말에도 그녀는 물러서지 않고 컵을 건넸다. 손끝이 스쳤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온기가 남았다. "···고맙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물을 받았다. 물줄기가 컵을 채우는 소리만 부엌 안에 울렸다. 그녀의 눈매가 순한 듯 지쳐 보였다.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밑에 깔린 피로는 감춰지지 않았다. 그 지친 얼굴 아래 감춰진 무게가 무엇인지, 나는 방금 통화로 짐작할 수 있었다. 아버지 병원비, 대출, 다음 달까지. 그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자꾸 맴돌았다. - 저녁 무렵, 나는 다은의 방문을 두드렸다. "오빠라고 부르라며. 왜 노크까지 해." 다은이 침대에 누운 채 웃었다. 이불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얼굴이었다. "물어볼 게 있어서." "뭔데." 나는 문가에 기대선 채 잠시 망설였다.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몇 번이고 문장을 골랐다. "너희 외할아버지, 편찮으셔?" 다은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휴대폰을 쥔 손이 멈췄다. "···어떻게 알았어?" "그냥, 얼핏 들었어." 다은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금발 머리가 흐트러진 채로 어깨 위에 걸렸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대 시트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엄마 아빠가··· 아니, 우리 진짜 아빠는 내가 어릴 때 돌아가셨어." 담담한 어조였지만, 눈빛은 담담하지 못했다. "엄마 혼자 나 키우면서 외할아버지까지 모셨거든." "근데 요즘 병원비가 좀···" 다은은 말을 흐리다 다시 이었다. 숨을 한 번 고르고서. "박정혜 여사님이 나 입양해준 것도, 사실 그런 이유가 컸어. 우리 형편이 너무 어려웠으니까." "제주도에서 두 분이 알고 지내셨다니까, 여사님이 도와주신 거지." 다은의 목소리에 감사와 씁쓸함이 뒤섞여 있었다. 그 두 감정이 한 문장 안에서 겹쳐 있는 게, 듣는 나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근데 나만 이 집 딸 되고, 우리 엄마는 그대로 일하는 사람이 됐어." "그게 좀 이상하긴 한데··· 엄마가 그렇게 하겠다고 했으니까." 다은은 애써 가볍게 말했지만, 눈빛에는 그림자가 있었다. 애써 웃는 얼굴이 오히려 더 마음에 걸렸다. "오빠, 너 우리 엄마한테 잘해줘. 알았지?" 갑작스러운 부탁에 나는 대답을 미뤘다. 다은의 눈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왜 나한테 그런 부탁을 해." "그냥. 이 집에서 엄마 편은 나밖에 없는 거 같아서." 다은이 픽 웃으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베개에 얼굴을 반쯤 묻은 채,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나는 그 말을 곱씹으며 방을 나왔다. 〈이 집에서 엄마 편은 나밖에 없는 거 같아서.〉 그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걸터앉아서도, 그 문장이 떠나지 않았다. 편, 이라는 단어가 이상하게 낯설게 느껴졌다. 이 집에서 누군가의 편이 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나는 아직 잘 알지 못했다. - 밤이 깊어질 무렵, 나는 목이 말라 다시 부엌으로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유독 크게 울리는 것 같아, 걸음을 조심스럽게 옮겼다. 서재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불빛이 그 틈으로 새어 나왔다.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대출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해결해준다니까." 이강철의 목소리였다. 낮고 단정한, 그러나 그 안에 어떤 냉기를 품은 목소리였다. "대신 넌 얌전히 여기 있으면 돼." "이사장님, 저는 그냥···" 강선희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냥 뭐." 낮게 깔린 반문이었다. 말끝을 자르는 듯한, 짧고 단호한 어조였다. "저는 다은이만 잘 있으면··· 저는 괜찮아요." "괜찮다는 사람이 그 표정이야?" 짧은 침묵이 흘렀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이었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벽에 등을 붙인 채 그 소리를 참았다. 심장이 목까지 차올랐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 〈저는 다은이만 잘 있으면 괜찮아요.〉 그 말이 가슴 어딘가를 짓눌렀다. 딸의 안전을 담보로 위태롭게 버티고 있는 여자. 그리고 그 위태로움을 이용하는 아버지. 나는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감각이 선명했다. 그 순간, 서재 안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작은 물건이 바닥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였다. 뒤이어 이강철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여유로웠다. 나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었다. 계단으로 향하던 발이, 그러나 다시 부엌 쪽으로 향했다. 무언가 확인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서재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등지고,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심장이 여전히 목까지 차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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