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서연과 나는 처음 만난 신입 시절, 같은 조에 배정되어 밤늦게까지 프로젝트를 준비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때부터 우리는 서로에게 자연스러운 존재가 되어 있었다.
입사 첫 달, 회사 전체가 참여하는 신입 오리엔테이션 워크숍이 강원도 어느 리조트에서 열렸을 때였다. 나는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겉돌고 있었는데, 마이크를 든 인사팀 직원이 조 편성을 발표하는 동안에도 나는 어디에 서 있어야 할지 몰라 로비 구석 화분 옆에 우두커니 서 있었고, 그 와중에 다른 신입들은 벌써 삼삼오오 모여 이름을 주고받으며 웃고 있었다. 그때 서연이 다가와 "강도윤 씨, 저쪽 조끼리 게임하는데 같이 안 할래요?"라며 손을 내밀었고, 그때 나는 그녀의 그 순간적인 친절함에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던 기억이 있다. 손을 잡았던 건 아니었지만, 그 손이 나를 향해 뻗어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날의 공기가 조금 덜 차갑게 느껴졌던 것 같다.
"강도윤 씨는 원래 이렇게 말이 없어요?" 서연이 그때 물었고, 나는 대충 웃으며 얼버무렸지만, 그녀는 이미 내 성격을 파악한 듯 "괜찮아요, 저는 원래 말 많은 사람이랑 조용한 사람이 잘 맞는다고 생각하거든요?"라며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유난히 밝았던 걸 나는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워크숍 마지막 날 밤, 다 같이 모여 앉아 장기자랑을 준비하던 자리에서도 서연은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대본을 같이 짜자며 종이를 들이밀었고, 나는 그때까지도 이 사람이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로 그저 시키는 대로 대사를 받아 적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종종 점심을 함께 먹었고, 서연은 회사 근처 맛집을 꿰고 있어서 매번 나를 이끌고 다녔는데, 그 과정에서 나는 그녀가 겉으로는 밝고 씩씩해 보이지만 실은 매운 음식을 잘 못 먹는다는 사실이나, 회의 전에는 항상 손톱을 무의식적으로 만진다는 사실 같은 작은 습관들을 하나씩 알게 되었다. 한번은 그녀가 자신 있게 골라온 낙지볶음집에서 매운 국물을 한입 먹고는 눈물까지 찔끔 흘리면서도 "이 정도는 맵지도 않은데요, 뭘"이라며 억지로 태연한 척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 모습이 우스워서 물을 한 컵 더 따라 건네주었고, 서연은 그걸 벌컥벌컥 들이켜면서도 끝까지 맵지 않다는 말을 굽히지 않았다.
"오늘 회의에서 왜 그렇게 긴장했어요?" 언젠가 내가 물었을 때, 서연은 손사래를 치며 "저 안 긴장했거든요?"라고 답했지만, 그 순간에도 그녀의 손끝은 여전히 볼펜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고, '역시 거짓말 못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 볼펜은 결국 회의 도중 바닥으로 떨어졌고, 서연이 허둥지둥 주우러 몸을 숙이는 사이 팀장이 그녀의 이름을 불러 발표를 시켰는데, 나는 그때 테이블 밑으로 슬쩍 발을 밀어 그녀가 놓친 볼펜을 대신 주워 건네준 적도 있었다. 서연은 고맙다는 말도 없이 그저 눈으로만 웃어 보였는데, 그 짧은 눈빛 하나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서연이라는 사람이 내 일상에 아주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며칠 휴가를 가면 사무실이 텅 빈 것처럼 느껴졌고, 그녀가 웃을 때마다 내 하루의 기분이 함께 오르락내리락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걸 오랫동안 미뤄왔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버릴 것 같아서였는지, 아니면 이름을 붙여봐야 어차피 갈 곳 없는 감정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는 나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매일 아침 그녀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 그녀가 자리에 앉으며 가방을 내려놓는 소리, 그런 아주 작은 소리들에 나는 조건반사처럼 반응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지금, 사무실 창밖으로 빗소리가 점점 거세지는 가운데, 서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포트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도윤 씨도 커피 한 잔 할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익숙한 손길로 두 개의 잔에 커피를 따랐다. 그 사이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는데, 어깨선을 따라 흘러내린 머리카락과 조명 아래 드러난 목덜미의 곡선이 이상하게 눈에 밟혔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가 유리창을 두드리는 리듬과, 커피포트에서 물이 끓어오르는 소리가 뒤섞이면서 사무실 안에는 이상하게 아늑한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다른 팀원들은 이미 퇴근한 지 오래였고, 남은 건 나와 서연, 그리고 이 좁은 공간을 채우는 몇 개의 스탠드 조명뿐이었다.
"자."
서연이 잔을 내밀며 내 자리로 돌아왔고, 나는 얼른 시선을 돌리며 잔을 받았다.
"고마워요."
짧게 답한 나를 보며 서연은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는 "오늘 우리 진짜 야근 각인가 봐요, 이 비 좀 봐요"라며 창밖을 가리켰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보다가, 문득 이 순간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을 앞둔 그녀와, 그 감정을 숨긴 나, 그리고 이 좁은 사무실을 채우는 빗소리와 커피 냄새.
머그컵을 감싼 손끝으로 온기가 서서히 번져오는 걸 느끼면서도, 나는 그 온기보다 더 선명하게 그녀의 웃는 얼굴을 눈에 담고 있었다. 창문에 비친 그녀의 실루엣과 실제 그녀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그 짧은 순간에, 나는 이 시간이 조금만 더 길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우습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그런데 도윤 씨는 왜 아직 여자친구 안 만들어요?"
서연이 갑자기 물었고, 나는 커피를 삼키다가 잠깐 멈칫했다. 목 안으로 넘어가던 커피가 순간 뜨겁게 느껴졌던 건, 온도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였을 것이다.
"그냥, 인연이 없나 보죠."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답했지만, 속으로는 '인연이 없는 게 아니라, 이미 정해진 사람이 다른 사람 곁으로 가고 있어서'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삼켜졌다. 그 말을 삼키는 동안 나는 머그컵을 쥔 손에 괜히 힘을 주었고, 손등에 살짝 힘줄이 도드라졌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서연은 그 대답에 별생각 없이 "흐음, 그런가 보네요"라며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고, 나는 그 순간 안도와 서운함이 동시에 밀려오는 걸 느꼈다. 그녀가 눈치채지 못한다는 게 다행이면서도, 동시에 그녀가 조금은 눈치채 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는 걸, 나는 인정하기 싫었지만 인정해야 했다. 서연의 손가락은 다시 키보드 위를 오가고 있었고, 나는 그 손가락에 곧 다른 사람이 끼워줄 반지가 자리 잡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창밖의 번개가 다시 한번 사무실을 밝혔고, 나는 그 짧은 빛 속에서 서연의 옆얼굴을 다시 한번 눈에 담았다. 번개가 사라진 뒤 찾아온 어둠 속에서도 그 옆얼굴의 잔상은 눈꺼풀 안쪽에 오래 남아 있었는데, 나는 그 잔상을 지우려 애써 눈을 몇 번 깜빡였지만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 밤이 그저 평범한 야근으로 끝나기를, 나는 스스로에게 되뇌었지만 그 다짐이 얼마나 갈지는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창밖의 비는 조금도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나는 그 빗소리를 들으며 문득 이 사무실 안에서 우리 둘만이 갇혀 있는 것 같은 착각에 잠시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 착각이 나쁘지 않다는 사실이,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