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저 사실, 요즘 잠을 잘 못 자요."
서연이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순간 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무실 안은 야근하는 사람들 몇몇이 남긴 키보드 소리와 창밖에서 끊임없이 두드리는 빗소리로 채워져 있었고, 형광등 불빛 아래 그녀의 얼굴은 평소보다 조금 더 하얗게 보였다. 결혼을 앞둔 사람이 잠을 못 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왜요, 준비할 게 많아서 그래요?"
서연은 잠깐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커피잔 표면에 김이 서리다가 사라지는 걸 물끄러미 보던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런 것도 있는데... 그냥, 뭔가 자꾸 불안해요. 이게 맞는 선택인지,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녀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아 있었고, 나는 그 순간 그녀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는다는 사실 자체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겉으로는 담담하게 듣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그녀의 불안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고 싶은 마음과, 그 불안의 틈으로 내가 끼어들 여지가 있는지 가늠하는 마음이 동시에 뒤엉키고 있었다. 나쁜 놈이다, 나는. 이런 순간에도 그런 계산을 하고 있다니.
"그런 생각, 언제부터 들었어요?" 나는 볼펜 끝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최대한 무심하게 물었다.
"글쎄요... 한 달쯤? 예단 얘기 나오면서부터인 것 같기도 하고." 서연이 힘없이 웃었다. "근데 이게 정상인 거죠? 다들 이런 거 겪고 결혼하는 거잖아요."
"결혼이 원래 그런 거 아니에요? 다들 불안해하잖아요." 나는 최대한 무난한 대답을 골랐다. 서연은 그 말에 살짝 웃으며 "그렇겠죠?"라고 답했지만, 그 웃음에는 어딘가 힘이 빠져 있었고, 나는 그 웃음의 낙차를 보면서도 더 캐묻지 못한 채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우리는 그 후로도 한참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서연은 결혼식 하객 명단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이야기, 시어머니 될 분이 벌써부터 예단 이야기를 꺼낸다는 이야기, 신혼집 인테리어 때문에 재현과 며칠째 다투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쉬지 않고 쏟아냈는데, 나는 그 이야기들을 들으며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맞장구를 쳤지만 속으로는 재현이라는 이름이 나올 때마다 미묘하게 마음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거실 벽지를 그레이로 하자는데, 재현 씨는 자꾸 화이트가 낫대요.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한 문제라고." 서연이 팔짱을 끼며 투덜거렸다. "그러다가 결국 어제는 목소리까지 높였다니까요. 저는 그냥, 그 사람이 뭘 그렇게 고집하는지도 모르겠고."
"두 분 다 예민해진 거겠죠, 결혼 준비하다 보면." 나는 또 그렇게 무난한 말을 골라 뱉었다. 서연이라는 사람 앞에서 나는 늘 이렇게, 날카로운 말도 뭉근하게 다듬어 내놓는 사람이 되곤 했다.
"그런가 봐요." 서연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다 문득 뭔가 떠올랐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도윤 씨, 저 이거 알아요?" 서연이 갑자기 화제를 돌리며 눈을 반짝였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저 도윤 씨가 완전 재수 없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제가요?"라고 되물었고, 서연은 웃음을 터뜨리며 "네, 완전 무뚝뚝하고 말도 없고, 저 인사해도 대충 받아주는 것 같아서요"라고 덧붙였다.
"그때 저 진짜 별생각 없었어요, 신입이라 정신이 없었을 뿐인데." 나는 억울한 척 어깨를 으쓱했다.
"에이, 아니거든요? 완전 벽 세우고 있었거든요, 눈빛도 되게... 뭐라 그러지, 날카로웠어요, 날카로웠어." 서연이 손끝으로 허공에 선을 그으며 그때의 인상을 흉내 내려 했지만, 그 흉내는 그저 우스꽝스럽게만 보여서 나는 저도 모르게 짧게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지금은요?" 나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
서연은 잠깐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가 답했다. 그 짧은 정적 사이, 형광등 불빛이 그녀의 속눈썹 위로 옅게 내려앉는 걸 나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은... 제일 편한 사람 중 하나죠. 도윤 씨한테는 뭐든 말할 수 있으니까."
그 말이 나에게는 기쁨과 절망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제일 편한 사람. 그 표현이 얼마나 따뜻하면서도 동시에 얼마나 멀게 들리는지, 서연은 아마 알지 못할 것이었다. 편하다는 말은, 뒤집어 보면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어떤 선을 그어놓은 말이기도 했으니까. 나는 그 선의 이쪽 편에 서서, 그녀가 그 선을 넘어올 리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매번 새삼스럽게 아픈 척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때 사무실 한쪽 구석에서 인쇄기가 갑자기 작동을 시작하며 웅— 하는 소리를 냈고, 서연이 놀라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아, 저거 왜 저래." 그녀가 중얼거리며 인쇄기 쪽으로 걸어갔고,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문득 이런 사소한 순간들이 나에게는 얼마나 소중한지를 생각했다. 걸어가는 발걸음,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대충 넘기는 손짓, 인쇄기 앞에 서서 종이가 다 나오길 기다리며 팔짱을 끼고 발끝으로 바닥을 톡톡 두드리는 그 버릇까지도.
그녀가 인쇄된 종이를 정리하며 돌아오는 사이, 나는 얼른 표정을 가다듬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듯.
"이거 내일 회의 자료요, 도윤 씨도 한 부 챙겨요." 서연이 종이를 건네며 말했고, 나는 그것을 받아 책상에 내려놓았다. 종이 끝이 아직 인쇄기의 열기로 미묘하게 따뜻했다.
"고마워요." 나는 짧게 답했다.
그녀가 다시 자리에 앉으며 시계를 확인했다. "어우, 벌써 열 시 반이네요. 이 비는 그칠 기미가 없고." 그녀의 말대로 창밖의 빗줄기는 조금도 약해지지 않은 채 유리창을 세차게 두드리고 있었고, 가끔 저 멀리서 도로를 지나는 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빗물에 번져 유리창 위로 길게 미끄러졌다.
"우산 챙겨왔어요?" 내가 묻자 서연이 손가락으로 책상 아래를 가리켰다. 접이식 우산 하나가 삐죽 나와 있었다.
"이거요, 근데 이 정도 비면 우산도 소용없을 것 같은데."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이따가 재현 씨가 데리러 오기로 했어요, 비도 이렇게 오는데 걱정되네요." 서연이 휴대폰을 확인하며 그렇게 말했고, 나는 그 이름이 다시 등장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볼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데리러 온다는 말에, 나는 이 밤이 결국 그 사람의 등장으로 끝날 거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차는 안 막히려나요, 이 시간엔." 서연이 혼잣말처럼 덧붙이며 창밖을 흘긋 보았다. 빗줄기 사이로 가로등 불빛이 흐릿하게 번지고 있었고, 그 불빛을 보는 그녀의 옆얼굴에는 결혼을 앞둔 사람 특유의 초조함과 설렘이 반씩 섞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그렇겠네요." 나는 짧게 답하며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지만, 화면 속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커서만 깜빡이는 빈 문서를 앞에 두고, 나는 몇 번이나 같은 문장을 눈으로 훑고도 아무것도 읽지 못했다.
서연은 그런 내 상태를 눈치채지 못한 채 다시 서류를 뒤적이기 시작했고, 나는 창밖의 빗소리를 들으며 이 편안하고도 아슬아슬한 밤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십 분쯤 지났을 무렵, 서연의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화면을 확인하는 그녀의 표정이 순간 굳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왜요?" 나는 저도 모르게 몸을 살짝 그녀 쪽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서연은 잠깐 대답하지 않은 채 휴대폰 화면을 몇 번이나 다시 들여다보다가, 이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재현 씨가... 오늘 못 온다는데요."
그 말을 하는 그녀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나는 그 떨림을 보며 이 밤이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는 걸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