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나는,
한서연이 내 문자를 세 시간째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인정했다.
[오늘 저녁, 늘 만나던 데서.] 마지막으로 보낸 문장은 오전 여덟 시쯤에 쓴 거였고, 지금은 이미 야간자율학습 시작종이 울린 뒤였다. 화면 상단에 붙은 숫자 1이 지워지지 않는 걸 몇 번이나 확인했는지 모른다. 수업 시간 내내 책상 아래로 핸드폰을 쥐고 있었는데, 선생님 두 명이 지나갈 때마다 심장이 철렁했다. 걸리면 그냥 압수당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화면에 뜬 이름이 [한서연]이라는 게 문제였으니까.
한심했다, 담임교사와 문자를 주고받으며 답장 하나에 심장이 오그라드는 고3짜리가.
하지만 그건 보통의 담임교사가 아니었고, 나는 보통의 학생이 아니었다는 걸, 나만 알고 있었다.
한서연, 스물넷, 나보다 일곱 살이 많은 여자였고, 삼 개월 전부터 나와 이 학교의 규칙을 통째로 걸고 만나고 있는 사람이었다.
"오늘은 좀 늦으실 것 같다는데." 반장이 지나가듯 던진 말에 나는 애써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이미 여러 가지 가능성이 어지럽게 뒤섞이고 있었다.
담임이 늦는다, 라는 문장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그 문장을 전한 게 반장이라는 것, 그리고 서연이 나에게 직접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뭐래, 왜 늦는대?" 나는 최대한 무심하게 되물었는데, 목소리가 살짝 갈라지는 걸 스스로도 느꼈다.
"몰라, 교무실에 무슨 일 있나 보던데. 너 왜 그렇게 궁금해해." 반장이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쳐다봤고, 나는 얼른 시선을 피했다.
"그냥. 야자 감독 누가 들어오나 해서." 거짓말이 입에서 너무 매끄럽게 나와서, 오히려 내가 놀랐다.
교실 뒷문으로 다른 반 담임이 대신 들어와 자율학습 감독을 시작했을 때, 나는 이미 서연이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알면서도 문 쪽을 몇 번이나 돌아봤다. 낡은 슬리퍼 소리, 복도를 지나가는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고개를 들었고, 아니라는 걸 확인할 때마다 가슴이 조금씩 버석거렸다.
자율학습이 끝나고 텅 빈 교실에 남아 핸드폰을 들여다보는데, [바쁘니까 오늘은 넘어가자]는 문장 하나가 그제야 도착했다.
하트도 없고, 미안하다는 말도 없고, 그저 사실 통보였다.
손끝이 서늘하게 식는 걸 느끼면서, 나는 이 짧은 문장 안에 뭔가가 잔뜩 눌려 담겨 있다는 걸 직감했다.
나는 화면을 몇 번이나 켰다가 껐다. 답장을 썼다가 지우고, 다시 썼다가 지웠다. [무슨 일 있어요?]라고 썼다가 지웠고, [알겠어요]라고 썼다가 그것도 지웠다. 결국 아무것도 보내지 못한 채, 나는 핸드폰을 책상 위에 엎어놓고 창밖을 봤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지, 우리?] 되묻고 싶었지만, 대신 나는 아무 답도 보내지 않고 창밖의 낙엽 지는 은행나무를 오래도록 쳐다보고 있었다. 노란 잎이 하나 떨어질 때마다, 삼 개월 전의 일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사라졌다.
관계의 시작은 어이없을 만큼 단순했다.
야자 감독을 서던 서연이 졸다가 커피를 쏟았고, 나는 그걸 대신 치워주다가 손등이 살짝 닿았을 뿐이었는데, 그날 이후로 그 여자의 눈빛이 이상하게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별거 아닌 순간이었다. 종이컵이 쓰러지고, 갈색 커피가 책상 위로 번지고, 서연이 화들짝 놀라 일어나던 순간. 나는 그냥 가까이 있던 휴지를 집어 들었을 뿐인데, 그녀의 손이 내 손 위에 겹쳐지면서 잠깐, 아주 잠깐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그 후로 나는 서연의 시선이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들을 하나씩 세기 시작했다. 수업 중에 나와 눈이 마주치면 그녀가 먼저 피했고, 나는 그게 못 견디게 신경 쓰였다.
[선생님, 저 좋아하시죠.] 라고 물었던 밤을 나는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때 서연은 웃지도, 화내지도 않고 그냥 나를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라고만 답했는데, 그 목소리가 너무 흔들려서 나는 오히려 확신했다.
그날 서연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는 것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커피잔을 쥐고,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나무라던 여자가, 다음 순간 나를 붙잡는 손에는 아무 떨림도 없었다는 것도.
그렇게 시작된 우리는 삼 개월 동안, 늘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만났다. 학교 근처 낡은 카페의 가장 안쪽 자리,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 서연은 늘 먼저 도착해서 창밖을 보고 있었고, 나는 그녀의 옆얼굴을 보는 게 좋아서 일부러 조금 늦게 들어가곤 했다.
다음 날 교무실 앞을 지나다 우연히 서연을 마주쳤을 때, 나는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지만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서류철로 얼굴을 반쯤 가렸다.
"오늘 시간 있으세요?" 나는 최대한 가볍게 물었는데, 그 순간 서연의 손끝이 서류철 모서리를 꽉 쥐는 게 보였다.
"수업 준비할 게 많아서." 그녀의 음성은 낮고 건조했고, 그 건조함이 오히려 나를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제서야 왜 이렇게 피하는 걸까.
삼 개월 동안 아무렇지 않게 만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서류철 뒤로 숨어드는 이유가 나로서는 짚이지 않았다.
교무실 안쪽에서 다른 선생님이 서연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서연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몸을 돌렸다. 나는 그 뒷모습을 붙잡고 싶었지만, 복도 저편에서 다가오는 학생들의 발소리에 손을 뻗지도 못했다. 그저 서연의 카디건 자락이 문 안으로 사라지는 걸 지켜보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저 요즘 뭐 잘못했어요?"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물었고, 서연은 잠시 멈춰 서서 나를 응시하다가, 아주 낮게 대답했다.
"……아니."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 뭔가가 숨겨져 있다는 걸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손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지도록 서류철을 쥐고 있던 그녀의 손을,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럼 왜 자꾸 피해요." 나는 목소리를 낮췄지만, 그 안에 담긴 조급함은 감추지 못했다.
"피하는 거 아니야." 서연이 대답했는데, 시선은 여전히 내 눈을 피하고 있어서, 그 말이 얼마나 공허한지 우리 둘 다 알고 있었을 거다.
"눈도 안 마주치잖아요." 나는 한 걸음 다가갔고, 서연은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 짧은 거리가, 삼 개월 동안 좁혀왔던 모든 거리를 한순간에 되돌려놓은 것 같아서, 나는 속이 뒤틀리는 걸 느꼈다.
"수업 있어서 가야 해." 서연은 그렇게 말하고 나를 지나쳐 갔는데, 지나가는 그 짧은 순간에도 그녀의 어깨가 살짝 굳어 있는 게 보였다. 도망치듯 걸어가는 발걸음이, 평소의 서연과는 너무 달랐다.
그날 밤 나는 다시 문자를 보냈다.
[내일 얘기 좀 해요.] 짧고 단호하게 썼는데, 답은 오지 않았다.
한서연이 나를 피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그날 확실히 알아버렸다.
핸드폰 화면이 꺼지고 나서도 나는 오래도록 어둠 속에서 그 화면을 다시 켰다. 읽음 표시조차 뜨지 않는 문자 하나를 두고, 나는 이불 속에서 몇 번이나 몸을 뒤집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누가 우리를 알아챈 걸까. 아니면 그냥, 서연이 나에게서 마음이 떠난 걸까. 어느 쪽이든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나는 애써 다른 가능성을 붙잡으려 했지만, 새벽이 다 되어서도 답은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