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선생님과 엮이면 안 되는데

5화

나는, 윤하람의 경고를 들은 다음 날부터, 강이로의 시선이 예전보다 훨씬 집요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는 걸 부인할 수 없었다. [선배, 그 웃는 얼굴 뒤에 뭐가 있는지, 한 번쯤 생각해 봤어?] 윤하람의 그 말이, 이상하게도 하루 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별거 아니라고 넘기려 했는데, 넘겨지지가 않았다. 강이로는 여전히 밝고, 여전히 붙임성 있게 웃었지만, 그 웃음의 각도가 어딘가 달라 보였다. 아니, 달라진 건 강이로가 아니라 나였을지도 모른다. 그 애를 보는 내 눈이 이제는 예전처럼 순진하게 웃어넘길 수가 없어서. "선배, 오늘도 상담실이에요?"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그녀는 꼭 그 질문을 던졌고, 나는 매번 별거 아니라는 듯 웃어넘기면서도 속으로는 손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지도록 긴장했다. 그 질문 자체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문제는, 그 질문을 던지는 강이로의 눈빛이 매번 내 대답보다 내 표정을 더 오래 읽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 뭐, 상담이라기보단 그냥……." 나는 말끝을 흐렸고, 강이로는 그럴 때마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었다. "그냥, 뭐요?" 되묻는 말투는 가벼웠지만, 나는 그 가벼움 안에 숨겨진 무게를 느꼈다. 대답하지 않고 지나치는 게 최선이었다. 그날 방과 후, 서연은 늦게까지 남아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고, 나는 상담이 끝난 뒤에도 자리를 뜨지 않고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늦가을 햇살이 비스듬히 기울어 들어와, 서연의 옆얼굴에 옅은 주황빛을 얹었다. 그 빛 아래에서 그녀는 평소보다 훨씬 지쳐 보였는데, 나는 그 지친 얼굴이 자꾸만 눈에 밟혀서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안 가?" 서연이 물었지만, 그 목소리엔 이제 예전 같은 거부감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선생님 기다리는 거예요."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고, 그녀는 잠시 나를 응시하다가 옅게 웃었다. 환하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그 웃음이, 오히려 그 사람다워서 나는 마음이 놓였다. 서연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필요 이상으로 다정하지 않았고, 필요 이상으로 냉정하지도 않았다. 그 중간의 어딘가에서 그녀는 늘 나를 정확한 거리로 두었는데, 요즘은 그 거리가 조금씩 좁아지고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윤하람 만났다는 얘기 들었어." 그녀가 불쑥 던진 말에 나는 순간 심장이 덜컹했다. "그 언니가 그런 것까지 알아요?" 나는 놀라서 물었고, 서연은 서류를 정리하며 낮게 대답했다. "그 사람은 이 학교 소문의 절반은 다 알아. 나머지 절반은 자기가 만든 거고." 그녀의 말투엔 오래된 친분에서 나오는 익숙함이 섞여 있었다. "그럼, 저희 얘기도……." 나는 말을 다 끝맺지 못했다. 서연이 서류를 정리하던 손을 잠시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아니야. 그 사람이 안다는 건, 진짜 문제가 생겼을 때 알게 되는 거니까." 그 대답이, 위로인지 경고인지 나는 구분할 수 없었다. 그때, 상담실 문이 예고 없이 열렸다. "어, 선배 여기 계셨네요." 문 앞에 서 있는 건 강이로였고, 그녀의 손엔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서연과 나 사이의 거리가, 사실 그렇게 가까웠던가 싶을 만큼 서로에게 기울어져 있었다는 걸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언제 이렇게 가까워졌는지도 모르게, 나는 서연의 책상 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 서 있었고, 서연 역시 나를 향해 반쯤 돌아앉은 자세였다. "뭐 하러 왔어." 서연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차갑게 굳었고, 나는 그 급변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방금까지 나를 향해 웃던 얼굴이, 강이로를 향해서는 완전히 다른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선생님께 여쭐 게 있어서요." 강이로는 태연하게 웃으며 대답했지만, 그녀의 시선은 우리 둘 사이의 거리, 그리고 서연의 흐트러진 옷매를 스치듯 훑고 있었다. 그 시선이 지나가는 속도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의심스러웠다. 아무것도 못 본 사람의 시선이 저렇게 정확하게 훑을 수 있을까. "뭔데." 서연이 다시 물었고, 강이로는 핸드폰을 살짝 들어 보이며 말했다. "수행평가 제출 기한 다시 확인하려고요. 저번에 말씀하신 날짜랑, 공지에 뜬 날짜가 달라서." 별거 아닌 질문이었다. 정말로, 별거 아닌 질문이었는데, 나는 그 질문을 던지는 강이로의 태도에서 어떤 여유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여유를 읽어낸 것 같아서 속이 뒤틀렸다. 한심했다, 이 짧은 순간에도 우리가 얼마나 부주의했는지를 깨닫는 내가. 상담실 문은 원래 잠기지 않는다는 걸, 우리 둘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 사실을 매번 잊고 있었다는 게, 지금 이 순간 뼈아프게 되짚어졌다. 서연이 짧게 기한을 알려주었고, 강이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향해 돌아섰다. 그런데 문을 나서기 직전, 그녀가 다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선배, 오늘도 늦게까지 계시네요." 그 한마디를 남기고, 강이로는 웃으며 문을 닫았다. 강이로가 상담실을 나가고 난 뒤, 나는 서연에게 물었다. "저 애, 봤을까요?" 목소리가 조금 떨렸는데, 서연은 창밖을 바라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낙엽이 지는 은행나무 아래로 강이로의 뒷모습이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고, 나는 그 뒷모습에서 뭔가 확신에 찬 미소를 본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걸음걸이마저 평소보다 가벼워 보였는데, 그게 착각이 아니라면, 강이로는 지금 무언가를 확인한 사람의 걸음을 걷고 있는 것이었다. "괜찮을 거야." 서연이 뒤늦게 뱉은 말은, 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말이 아니라 자신을 다잡기 위한 말처럼 들렸다. 그녀의 손끝이 서류 모서리를 몇 번이고 다시 정리하고 있었는데, 그건 이미 정리가 끝난 서류였다. 나는 그 손끝을 보며, 그녀 역시 나만큼 불안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다만 그녀는 그걸 티 내지 않는 법을 나보다 훨씬 오래 훈련해온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날 밤, 강이로의 핸드폰 화면이 상담실 문틈 사이로 잠깐 빛을 냈던 걸 떠올렸다. 그 빛이 정확히 몇 초였는지, 화면에 무슨 앱이 켜져 있었는지, 아무리 되짚어봐도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그 빛이 존재했다는 사실만은, 눈꺼풀을 감아도 잔상처럼 남아 사라지지 않았다. 그게 단순한 알림이었는지, 아니면 방금 찍힌 사진의 섬네일이었는지,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침대에 누워서도 나는 몇 번이고 그 장면을 되풀이해서 떠올렸다. 문틈으로 새어 들어온 빛, 강이로의 손목이 움직이던 각도, 그리고 그 애가 문을 닫기 전에 마지막으로 던진 웃음. 그 웃음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려서, 나는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그 애의 웃는 얼굴 뒤에 뭐가 있는지 조심하라던 윤하람의 경고가, 이제야 뒤늦게 내 목덜미를 서늘하게 조여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등굣길에서 마주친 강이로가 나에게 내민 핸드폰 화면을 보는 순간, 나는 그 조여오는 감각이 결코 기우가 아니었다는 걸 깨달아야 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