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너를 살리려, 악마와 계약했다

1화

왼쪽 눈에서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피인지 눈물인지 구분이 안 됐다. 뜨겁다는 감각만 남았다. [HP 3/120] 숫자가 눈앞에 떠 있었다. 붉은 숫자였다. 평소엔 초록이었는데 지금은 붉었다. 숨을 쉬려 했다. 공기가 목에 걸렸다. 가슴이 뻑뻑했다. 마치 폐 속에 돌을 채운 것 같았다. 나는 변경지의 킬러였다. 직업: 탐험가. 특기: 독. 서브 특기: 은신. 오늘 아침까지는 그랬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까지 그랬다. 지금은 아니었다. 박대박의 부하들이 매복해 있었다. 열둘이었다. 활, 창, 그리고 독을 무력화하는 향낭까지. 그 향낭 냄새를 처음 맡았을 때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독 계열 스킬을 쓰는 나에게 향낭은 치명적이었다. 그런데 그때는 그냥 이상한 냄새라고만 생각했다. 함정이라는 걸 알았을 땐 이미 포위였다. 사방이 막혔다. 뒤도, 좌우도, 하늘도. 왼쪽 눈에 화살이 박혔을 때 나는 웃었다. 웃을 상황이 아닌데 입꼬리가 올라갔다. 통증이 감정을 대신 채웠다. 너무 아프면 웃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게 사실이었다. 뇌가 고통을 처리하지 못해서 대신 다른 회로를 켜는 거라고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었다. 지금 그 회로가 켜진 것 같았다. "형!" 차동이의 목소리였다. 빨간 모자가 흙바닥에서 흔들렸다. "움직이지 마요, 형!" 그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있었다. 차동이는 이제 열여덟이었다. 아직 전장에 익숙하지 않은 나이였다. 움직일 수 없었다. 다리가 이미 감각이 없었다. 발끝부터 시작된 마비가 무릎을 지나 허벅지까지 올라왔다. 독인지, 출혈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알아도 소용없었다. 곽두식이 내 위로 몸을 던졌다. 작은 체구인데 무게가 묵직했다. 등에 화살 하나가 박히는 소리를 들었다. 곽두식의 몸이 대신 맞은 거였다. "들개 새끼, 뭐 하는 거야." 내가 겨우 뱉었다. "닥치고 숨이나 쉬어." 곽두식이 말했다. 목소리가 평소와 똑같았다. 화가 난 것도 아니고, 겁먹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평소처럼 무뚝뚝했다. 그게 더 무서웠다. 원숭이 다섯이 화살을 쏘고 있었다. 1호가 앞장서서 도끼를 던졌다. 2호와 3호는 활을 당겼다. 4호, 5호가 뒤에서 망치를 휘둘렀다. 숫자로는 밀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밀리고 있었다. 포진이 완벽했다. 박대박이 이런 판을 짤 줄 몰랐다. 지금까지는 그저 돈 많은 상인 길드 정도로만 봤는데. 그게 오판이었다. 오후 3시 12분. 숲의 그늘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늘이 길어질수록 원숭이들의 사거리가 넓어지는 느낌이었다. 착각인지 실제인지 판단할 정신이 없었다. 오후 3시 17분. 포위망이 좁혀졌다. 곽두식이 방패를 들었지만 방패는 이미 화살 세 개를 박은 채였다. "버텨야 해." 곽두식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조금만 더 버티면 지원이 온다." 지원이 언제 오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오후 3시 21분. 내 시야 절반이 사라졌다. 왼쪽 눈이 완전히 캄캄해졌다. 오른쪽 눈으로만 세상을 봐야 했다. 그 세상마저 흐릿했다. [상태: 출혈] [상태: 실명 - 좌안] [HP 3/120 → 0/120] 숫자가 0이 됐다. 0이 됐는데 나는 여전히 생각하고 있었다. 심장 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안 들렸다. 숨소리도 들려야 하는데 안 들렸다. 그게 이상하다는 걸 알았어야 했다. 죽었는데 왜 생각을 하지. 죽었는데 왜 곽두식의 목소리가 들리지. 죽었는데 왜 흙냄새가 느껴지지. 질문들이 순서 없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형, 형, 눈 떠요!" 차동이가 내 어깨를 흔들었다. 흔들리는 감각조차 멀게 느껴졌다. 마치 다른 사람의 몸을 흔드는 걸 지켜보는 느낌이었다. 곽두식이 부활 물약을 부었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두 번째 물약도 부었다. 역시 반응이 없었다. 세 번째 물약을 꺼내는 곽두식의 손이 떨렸다. 평소에 떨지 않던 손이었다. "약이 안 먹혀." 곽두식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이 자식, 진짜 죽은 거야." 그 말 뒤에 정적이 왔다. 전장의 소음마저 잠시 멎은 것 같은 정적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도 무섭지 않았다. 무서워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자리에 텅 빈 것만 있었다. 슬픔조차 없었다. 슬퍼야 하는데 슬픔이 있어야 할 자리가 그냥 비어 있었다. 서은. 그 이름 하나가 머릿속에 남았다. 다른 건 다 흐려졌는데 그 이름만 선명했다. 왜 서은이지. 왜 곽두식도 아니고 차동이도 아니고 서은이지. 질문에 답이 없었다. 그냥 그 이름이 거기 있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서은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지구에서 마지막으로 봤던 그 얼굴이었다. 그런데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았다. 손을 뻗는다는 행위 자체가 이제 의미가 없었다. 몸이 없는데 무슨 손을 뻗나. 오후 3시 40분. 나는 완전히 눈을 감았다. 아니, 감았다는 표현도 맞지 않았다. 그냥 모든 게 꺼졌다. ---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낮고 서늘한데 또렷했다.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방향을 알 수 없었다. 그냥 사방에서 동시에 들리는 것 같았다. "죽고 싶어?" 눈을 떴다. 아니, 뜬 게 아니라 원래부터 뜨여 있었던 것 같았다. 어둠 속에 회색 피부의 여자가 서 있었다. 검은 입술. 노란 눈동자. 옷은 없었다. 부끄러움이 없는 게 아니라, 그런 개념 자체가 없어 보였다. 마치 인간의 수치심이라는 개념을 아예 배운 적이 없는 존재 같았다. "누구야."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나왔다. 내 목소리인데 낯설게 들렸다. "이름은 야현." 여자가 말했다. "직함은 굳이 말하지 않을게." "여긴 어디야."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경계." 야현이 짧게 답했다.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곳." 나는 주변을 다시 둘러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색도, 소리도, 온도도 없었다. 오직 야현만 존재하는 공간 같았다. 발밑에 바닥이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런데 서 있다는 감각은 있었다. 모순이었다. 이 공간 자체가 모순으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돌아가고 싶어?" 야현이 물었다. "돌아가서, 계속 그 자리에 있고 싶어?" 돌아가고 싶다고 말해야 했다. 곽두식이 있고 차동이가 있으니까. 곽두식의 떨리는 손이 떠올랐다. 차동이의 울음소리가 떠올랐다. 그런데 입에서 나온 말은 달랐다. "한 사람을 데려올 수 있어?" 내가 말하고도 놀랐다. 왜 이 말이 먼저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야현의 노란 눈이 나를 응시했다. 오래, 아주 오래 그렇게 서 있었다. 시간이 흐르는지도 알 수 없는 공간에서 그 시선만 유일하게 시간을 재는 것 같았다. "흥미롭네." 야현이 웃었다. 웃는데 입술은 여전히 검었다. "죽어가는 놈이 남을 살려달라고 하다니." 야현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관찰하는 눈빛이었다. 마치 처음 보는 종의 표본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할 수 있어, 없어." 내가 다시 물었다. 목소리에 조급함이 묻어났다. "할 수 있어." 야현이 짧게 대답했다. "지구에서, 딱 한 사람." 숨이 멎었다. 지구. 그 단어가 이렇게 쓰일 줄 몰랐다. 여기서, 이 죽음의 경계에서, 지구라는 단어가 이렇게 구체적인 무게로 다가올 줄 몰랐다. "어떻게." "그건 네가 알 필요 없어." 야현이 말을 잘랐다. 칼로 자르듯 단호했다. "네가 알아야 할 건 하나야." "뭐." "대가." 그 단어가 방 안의 없는 공기를 다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대가. 악마와의 거래에서 가장 무서운 단어. 어릴 때 읽은 동화책에서도, 게임 속 대사에서도 항상 이 단어 다음엔 파국이 왔다. "뭘 원해." 목이 말랐다. 목이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공간인데 목이 말랐다. 야현이 다가왔다. 걸음마다 소리가 없었다. 발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전혀 없었다. 손끝으로 내 감긴 왼쪽 눈을 짚었다. 차가운 손가락이었다. 그 냉기가 눈을 통해 뇌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천천히 얘기하자." 야현이 미소 지었다. 그 미소가 여유로웠다. 마치 시간이 자기편이라는 걸 아는 사람의 미소였다. "시간은 많으니까." 그 말과 함께 눈앞이 다시 어두워졌다. 어둠이 밀려오는데 저항할 수 없었다. 저항할 힘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나는 아직 대가가 무엇인지 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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