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너를 살리려, 악마와 계약했다

3화

오전 7시. 진남시. 알람이 울렸다. 나는 눈을 떴다. 천장의 얼룩이 여전히 그대로였다. 작년부터 저 자리에 있던 얼룩이었다. 비가 새는 곳인지, 곰팡이인지 알 수 없었다. 알아보려고 한 적도 없었다. 어차피 고칠 돈도 없었으니까. 몸을 일으켰다. 방 안 공기가 차가웠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보일러를 틀 여유는 없었다. 이불을 걷고 일어나는 게 매일 힘들었다. 배가 고팠다. 항상 그랬다. 먹어도 금방 고팠다. 이상한 일이었다. 남들보다 훨씬 많이 먹는데도 살이 붙지 않았다. 오히려 근육만 붙었다. 병원에 가봐야 하나 생각한 적도 있었다. 돈이 없어서 그만뒀다. 라면 두 봉지를 끓였다. 하나는 부족했다. 두 개도 부족한 날이 많았다. 냄비에 물이 끓는 걸 보면서 생각했다. 오늘도 저녁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매일 했다. 매일 똑같은 생각이었다. 면을 건져 먹었다. 뜨거웠다. 입천장이 데었다.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먹었다. 국물까지 다 마셨다. 그래도 배는 여전히 허전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휴대폰에 문자 하나가 와 있었다. 체육관 광고 문자였다. 나는 피식 웃었다. 좋은 하루라니. 그런 게 뭔지도 잘 몰랐다. 서은. 내 이름이었다. 엄마가 지어준 이름. 좋은 은혜를 받으라는 뜻이라고 했다. 엄마는 3년 전에 죽었다. 암이었다.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고 의사가 말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병실에서 마지막으로 엄마가 한 말이 있었다. "밥은 먹었어?" 그 순간에도 엄마는 내 밥을 걱정했다. 자기가 죽어가는데도. 그 뒤로 나는 혼자였다. 누구도 나에게 밥을 먹었는지 묻지 않았다. 아니, 한 사람 있었다. 박덕수 아저씨. 오전 8시. 잡화점으로 출근했다. 가게 문을 열고 셔터를 올렸다. 쇠 긁는 소리가 골목에 울렸다. 그 소리가 아침마다 반복됐다. 계산대에 서서 바코드를 찍었다. 삑, 삑, 삑. 소리가 반복됐다. 손님이 없을 때는 진열대를 정리했다. 같은 물건을 몇 번이나 다시 놓았다. 할 일이 없어서였다. "오늘 시합 있지?" 사장님이 물었다. 계산대 옆에 앉아 신문을 보다가 물은 거였다. "11번째던가?" "네." "이번에도 이길 거지?" "이겨야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지금까지 열 번 다 이겼으니까. 지는 걸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사장님이 신문을 접었다. "너는 참 신기해." "뭐가요." "덩치도 안 큰데 그렇게 이긴다는 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신기했으니까. 왜 이렇게 힘이 센지, 나조차 몰랐다. 오후 6시. 체육관으로 갔다.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다리에 힘이 붙는 걸 느꼈다. 이상하게도 몸이 가벼웠다. 배는 여전히 고팠는데도. 박덕수 아저씨가 먼저 인사했다. "왔냐." "네." "밥은 먹었어?" "라면 먹었어요." "라면만 먹지 말고." 박덕수가 혀를 찼다. 그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우리 순자가 김치 좀 챙겨줬는데, 가져가." "고맙습니다." 나는 웃었다. 박덕수는 항상 이런 사람이었다. 체육관에서 가장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고, 가장 걱정을 많이 해주는 사람. 엄마가 죽은 뒤로 나에게 밥을 물어본 몇 안 되는 사람. 가끔은 그게 고마운 건지, 부담스러운 건지 헷갈렸다. 그래도 매번 김치통은 받았다. 데드리프트 바를 잡았다. 쇠 냄새가 손바닥에 배었다. 120킬로. 숨을 짧게 뱉었다. 바가 무릎을 지나 허리까지 올라왔다. 130킬로. 손끝이 저릿했다. 140킬로. 숫자가 올라갈수록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저 여자 진짜 사람이야?" 누군가 중얼거렸다.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다 들렸다. 근처에서 러닝머신을 타던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쳐다봤다.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힘이 세다는 건 알고 있었다. 왜 이렇게 센지는 몰랐다. 바를 내려놓았다. 쇠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났다. 사람들이 잠깐 조용해졌다. 오후 7시 40분. 스파링 상대가 나타났다. 체급이 나보다 훨씬 컸다. 헤드기어를 쓰고 마우스피스를 물면서 그가 웃었다. "살살 부탁해요." 농담처럼 한 말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이겼다. 너무 쉽게 이겼다. 그의 잽을 흘리고 카운터를 넣었을 뿐인데 상대가 뒤로 쓰러졌다. 매트에 등이 닿는 소리가 났다. 관중석에서 탄식이 나왔다. "살살 해줘라." 박덕수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체육관 사람들이 다 도망가겠다." "살살 했는데요." "그게 살살 한 거였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이었다. 정말로 힘을 다 쓰지 않았다. 그런데도 상대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 사실이 조금 무서웠다. 아니, 무서워야 하는데 무섭지 않았다. 그게 더 이상했다. 체육관 문을 나섰다. 가방을 어깨에 메고 계단을 내려갔다. 땀에 젖은 티셔츠가 차가운 밤바람에 식었다. 오후 9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골목이 어두웠다. 가로등 하나가 깜빡였다. 전선이 오래돼서 그런 거라고, 예전에 옆집 아저씨가 말한 적이 있었다. 발걸음 소리가 골목에 울렸다. 내 발소리인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로 크게 울렸다. 그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등 뒤가 서늘해졌다. 누가 보는 것 같았다. 뒤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계속 걸었다. 발걸음을 빨리하지는 않았다. 겁먹은 걸 인정하는 것 같아서였다. 또 걸었다. 또 그 느낌이 왔다. 목덜미가 따끔거렸다. 세 번째로 뒤돌아봤을 때, 골목 끝에 뭔가 있었다. 검은 형체. 사람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갔다. 키가 큰 것 같기도 하고, 그냥 그림자 같기도 했다. 눈을 깜빡였다. 사라졌다. 나는 그 자리에 잠깐 멈춰 서 있었다. 심장이 빨리 뛰었다. 무서운 건 아니었다. 무서운데 무섭지 않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누군가에게 말해도 이해받지 못할 것 같았다. 다시 걸었다. 집 앞까지 오는 동안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는지 세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문을 잠갔다. 두 번 확인했다. 손잡이를 잡고 돌려봤다. 잠겨 있었다. 세 번째로 확인하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가방을 내려놓고 씻었다.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았다. 찬물로 대충 씻고 나왔다. 몸이 떨렸다. 추워서인지, 다른 이유인지 알 수 없었다. 밤 11시. 잠자리에 누웠다. 전등을 끄고 눈을 감았다. 낮에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바코드 찍는 소리, 데드리프트 소리, 매트에 쓰러지는 소리. 그리고 골목의 그 형체. 꿈을 꿨다. 낯선 남자의 얼굴이었다. 피부가 지나치게 하얬다. 왼쪽 눈이 감겨 있었다. 실로 꿰맨 것처럼. 검은 실이 눈두덩을 가로질러 얼기설기 엮여 있었다. 남자는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이 길었다. 손톱이 이상하게 날카로웠다. 손이 닿기 직전, 잠에서 깼다. 새벽 3시 17분. 방은 어두웠다. 심장이 여전히 빠르게 뛰었다. 숨을 몰아쉬었다.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손발이 떨렸다. "뭐야, 이 꿈은." 혼잣말이 나왔다.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방 안이 너무 조용해서, 내 목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다시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그 남자의 감긴 눈이 계속 떠올랐다. 실로 꿰맨 그 눈이, 마치 언제든 뜨일 수 있다는 듯이 느껴졌다. 창밖에서 이상한 빛이 스쳤다. 별빛도 아니고 가로등 빛도 아니었다. 푸르스름한, 처음 보는 색이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세 번째 빛이 가장 밝았다. 그리고 사라졌다. 나는 창가로 다가갔다. 커튼을 젖히고 밖을 살폈다. 아무것도 없었다. 골목도, 가로등도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 손끝이 이상하게 차가웠다. 방 안 온도는 그대로인데, 손끝만 차가웠다. 손을 비벼봤다. 따뜻해지지 않았다. 이불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았다. 낮에 이겼던 스파링, 골목의 검은 형체, 꿈속 남자의 얼굴. 전부 별개의 일인데, 왜 하나로 이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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