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전송 완료.
화면에 뜬 글자를 본 순간 손끝이 차가워졌다. 나는 휴대폰을 침대에 내던지듯 놓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방금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한서은. 그 이름 위에 파란 말풍선 하나가 떠 있었다. 방금 전송된 영상. 삼십 초짜리. 내가, 그러니까 내 방에서, 혼자 찍은 그 영상.
왜 보냈을까.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취기가 오른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 순간에는 그게 맞는 일 같았다. 그녀라면 받아줄 것 같았다. 아니, 그녀가 원하는 것 같았다. 수업 시간에 나를 보던 그 눈빛이, 자꾸만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숨이 막혔다. 만약 그녀가 이걸 학교에 알리면. 만약 이게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면. 온갖 최악의 상상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삭제할까.
손이 다시 휴대폰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미 전송된 걸 지운다고 뭐가 달라질까. 그녀는 이미 봤을 수도 있었다. 아니, 아직 안 봤을 수도 있었다. 그 사실이 오히려 더 나를 괴롭혔다.
읍읍. 방문 밖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들렸다. 부모님은 아무것도 모른 채 거실에서 뉴스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 평온한 소음이 이상하게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다른 세계의 소리 같았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일 분, 이 분, 삼 분. 시간이 이상하게 늘어졌다. 나는 손목을 들어 시계를 봤다가, 다시 휴대폰을 봤다가, 그 사이를 반복했다. 화면은 그대로였다. 전송됨. 그 밑에 아무것도 없었다.
읽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그게 더 지옥 같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 모든 게 시작된 날. 통학버스 안이었다.
***
그날 아침은 평소보다 늦었다.
알람이 세 번이나 울렸는데도 못 들었다. 눈을 뜨자마자 시계를 보고 욕이 나왔다. 밥도 못 먹고 가방만 챙겨서 뛰었다. 버스 정류장까지 뛰어야 했다. 골목을 돌 때마다 가방끈이 어깨를 때렸다.
겨우 올라탄 버스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손잡이를 잡을 자리도 없었다. 나는 뒷문 쪽으로 밀려나며 겨우 몸을 세웠다. 숨을 몰아쉬느라 옆 사람들 눈치를 볼 여유도 없었다.
버스 안은 후텁지근했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손잡이 대신 옆 기둥을 붙잡고 몸을 지탱했다.
그때 버스가 급정거했다.
몸이 앞으로 쏠렸다. 누군가와 부딪혔다. 향이 먼저 코끝을 스쳤다. 은은하고 낯선 향수였다. 꽃향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거운 향도 아닌, 처음 맡아보는 냄새였다. 다음으로 느낀 건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손등이 누군가의 팔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어, 죄송합니다."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순간 말이 막혔다.
키가 큰 여자였다. 빨간 새틴 블라우스가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검은 스커트는 다리 라인을 그대로 드러냈다. 나이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이십대 중반쯤, 아니면 그보다 조금 더. 화장은 진하지 않았지만 눈매가 유독 또렷했다.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가 있어서 웃는 건지 아닌지 헷갈렸다.
그녀는 나를 빤히 보다가 웃었다.
"괜찮아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나는 그 순간 이상하게 얼굴이 뜨거워졌다.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창밖을 봤다. 하지만 자꾸만 다시 그쪽으로 눈이 갔다. 그녀는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화면 밝기가 낮아서 뭘 보는지는 알 수 없었다.
버스가 다시 흔들렸다. 이번엔 내가 먼저 그녀 쪽으로 밀렸다. 어깨가 스쳤다. 그녀는 이번엔 웃지 않았다. 대신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듯 시선을 옮겼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게 이상하게 오래 느껴졌다.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교복이네."
그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그냥 고개를 숙였다. 명진고 교복은 알아보기 쉬운 편이었다. 넥타이 색이 특이해서 자주 놀림을 받았으니까.
"3학년?"
그녀가 다시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가 안 나올 것 같았다.
"그럼 이제 곧 시험이겠네."
"네,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내 목소리가 이상하게 갈라졌다. 그녀는 그걸 눈치챈 듯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왜 그렇게 오래 머릿속에 남았는지 그때는 몰랐다.
다음 정류장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자리가 생겼다. 나는 그녀에게 앉으라는 뜻으로 손짓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대신 내 쪽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학생은 앉아요. 시험 준비하려면 체력이 중요하니까."
어떻게 내가 수험생인 걸 알았을까. 교복 넥타이 색을 본 걸까. 나는 물어보지 못했다. 그녀는 이미 다른 곳을 보고 있었으니까. 나는 결국 그 자리에 앉았다. 앉고 나서도 그녀의 다리가 내 눈높이에 있다는 사실이 자꾸 신경 쓰였다.
버스가 명진고등학교 앞에 멈췄다. 나는 내려야 했다. 그녀는 내리지 않았다.
"먼저 가요."
그 말이 끝이었다. 나는 버스에서 내려서도 한참을 뒤돌아봤다. 버스는 이미 다음 정류장을 향해 멀어지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그녀의 빨간 블라우스가 점처럼 작아졌다.
그날 나는 수업 시간 내내 그 향수 냄새를 잊지 못했다. 국어 시간에도, 수학 시간에도 자꾸 그 냄새가 코끝에 맴도는 것 같았다. 친구인 박준서가 옆구리를 찔렀다.
"야, 너 표정이 왜 그래. 뭐 좋은 일 있었냐?"
"아니, 그냥."
"그냥은 무슨. 얼굴에 다 쓰여 있는데."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창밖을 봤다. 준서는 몇 번 더 캐묻다가 포기하고 자기 문제집으로 눈을 돌렸다.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 가면서도 그 생각뿐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여자. 나이도 모르고, 어디 사는지도 모르는 사람. 그런데 왜 이렇게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만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것도 그렇게 빠르게, 그렇게 가까운 곳에서.
일주일 뒤, 학교 강당에서 있었던 특별 강연 시간에 그녀를 다시 봤다. 명진고 3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진로 특강이었다. 강사 소개 자료에 적힌 이름을 보고 나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
한서은.
버스에서 만난 그 사람이었다.
강당에 들어서는 그녀를 봤을 때, 나는 앞줄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무대 위에서 나를 알아본 듯 잠깐 시선을 멈췄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강연을 시작했다.
그날부터였다. 마주칠 때마다 그녀는 나를 보며 웃었고, 나는 그 웃음의 의미를 자꾸 다르게 해석하기 시작했다.
***
이불 속에서 눈을 떴다. 휴대폰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손이 떨렸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것 같았다. 나는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하다가 겨우 화면을 확인했다.
한서은.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숨이 턱 막혔다. 열어야 하는데,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화면 위에 뜬 미리보기 한 줄이 눈에 들어왔다. 그 짧은 문장을 보는 순간 방 안 온도가 뚝 떨어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