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다음 날 1교시, 교실 문이 열렸다.
담임인 최선영 선생님 대신 낯선 사람이 들어왔다. 나는 순간 숨을 멈췄다.
빨간 블라우스. 검은 스커트. 그 향수 냄새.
버스에서 만난 그 여자였다.
교실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몇몇 남학생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고정됐다. 그녀는 그런 시선에 익숙한 듯 태연하게 교탁 앞에 섰다.
또각.
구두 소리가 교탁 앞에서 멈췄다.
"안녕하세요. 이번 학기 생물 담당으로 임시 부임하게 된 한서은입니다."
한서은.
그 이름이 귀에 박혔다. 나는 책상 밑에서 손을 꽉 쥐었다.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었다.
그녀의 눈이 교실을 훑었다. 그리고 잠깐, 정말 잠깐이었지만, 내 쪽에서 멈췄다.
알아본 걸까.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눈빛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 뭔가 이상한 열기가 남았다.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나는 괜히 책을 펼치는 척했다.
"명진고 학생들 첫 인상이 참 좋네요."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그 말이 왜 이렇게 특별하게 들리는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애들도 그렇게 느꼈을까. 옆자리를 슬쩍 봤다. 박준서는 이미 턱을 괴고 그녀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수업이 시작됐다. 생식과 발생 단원이었다. 그녀는 화이트보드에 그림을 그리며 설명을 이어갔다. 목소리는 낮고 또렷했다. 어려운 개념도 쉽게 풀어냈다. 반 아이들이 하나둘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는 집중할 수 없었다.
그녀의 손끝이 보드를 짚을 때마다, 스커트 자락이 흔들릴 때마다, 나는 자꾸 다른 생각에 빠졌다. 그날 버스에서의 그 짧은 접촉이 자꾸 떠올랐다. 손등에 닿았던 그녀의 손가락. 놀란 듯 스치듯 지나갔던 시선. 그때도 이 향수 냄새가 났었다.
칠판 위에 세포 분열 그림이 그려졌다. 마커 소리가 사각사각 들렸다. 나는 노트에 뭔가를 적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이도현 학생."
갑자기 이름이 불렸다. 나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방금 설명한 부분, 다시 말해볼 수 있을까요?"
반 아이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나는 어물거리다가 겨우 대답을 짜냈다. 정확한 답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해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그 말투가 유독 부드러웠다. 다른 학생들에게 하는 말투와는 뭔가 달랐다. 아니, 내 착각일 수도 있었다.
그녀는 곧 다음 학생에게 질문을 넘겼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하지만 나는 그 짧은 순간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던 걸 봤다. 웃음이라고 하기엔 너무 옅고,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선명한.
수업 시간 사십오 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자 박준서가 다가왔다.
"야, 저 선생님 소문 들었어?"
"무슨 소문."
"원래 서울 큰 병원에서 일했다던데. 왜 갑자기 고등학교로 왔는지 모르겠다고 다들 그러던데."
박준서는 이미 여러 정보를 수집한 듯했다. 이런 데는 늘 빠른 애였다. 쉬는 시간 십 분 만에 어디서 그런 얘기를 다 듣고 오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아직 미혼이래. 인기 많을 것 같은데?"
그는 씩 웃으며 팔로 내 옆구리를 찔렀다. 나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관심 없어."
"아까 너 진짜 관심 없어 보이는 표정이었는데."
박준서가 눈치 빠르게 놀렸다. 나는 대답 대신 창밖을 봤다.
"진짜 아니야?"
"뭐가."
"너 아까 이름 불렸을 때 얼굴 하얘지던데. 나 봤어."
"그냥 놀라서 그런 거야."
박준서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봤지만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급식 메뉴가 뭔지, 오늘 체육 시간에 축구를 할 건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대충 대답을 흘리며 창밖 운동장을 바라봤다. 머릿속은 여전히 다른 곳에 있었다.
그날 오후, 복도에서 최유나와 마주쳤다. 같은 반이지만 별로 대화가 없던 사이였다. 그런데 그날은 먼저 말을 걸어왔다.
"한서은 선생님, 원래 우리 학교 졸업생이래."
나는 걸음을 멈췄다.
"뭐?"
"몰랐어? 십 년 전즈음 졸업했다던데. 그때 성적도 엄청 좋았대. 의대 갔다가 무슨 일 있었는지 그만두고 이쪽으로 왔다더라고."
최유나는 소문을 전하는 걸 즐기는 성격이었다. 눈을 반짝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마치 비밀을 나눠주는 것처럼.
"우리 이모가 여기 행정실에서 일하시거든. 서류 보다가 알았대. 근데 그것 말고도 뭔가 더 있는 것 같은데, 이모도 자세히는 모르더라."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건 나도 몰라. 근데 의대 그만두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 뭔가 사고가 있었던 거 아닐까?"
최유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른 반 친구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며 가버렸다. 나는 그 정보를 곱씹었다.
의대를 그만뒀다는 것. 이 학교 졸업생이라는 것. 뭔가 사연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자꾸 그 정보를 머릿속에서 뒤집어봤다. 십 년 전, 그녀도 나처럼 이 복도를 걸었을까. 이 교실에 앉아 있었을까. 창문 너머로 보이는 운동장도 그때와 똑같은 모습이었을까.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녀가 낯설면서도, 이 학교 안에서는 나보다 더 오래된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봤다. 낮에 봤던 그녀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수업 중 나를 부르던 목소리. 그 부드러운 말투.
착각이라고 생각하려 했다. 그냥 선생님이 학생을 배려하는 정도라고. 그런데 자꾸만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나를 알아본 거라면.
그날 버스에서의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 거라면.
손끝이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이불을 끌어당기며 몸을 돌렸다. 눈을 감아도 그녀의 얼굴이 사라지지 않았다. 빨간 블라우스, 향수 냄새, 잠깐 멈췄던 시선.
이러면 안 되는데.
선생님이잖아.
나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냥 우연이었다고. 그날 버스에서의 일도, 오늘 수업에서의 일도 전부 우연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되는 거니까.
하지만 마음 한쪽에서는 자꾸 다른 목소리가 올라왔다.
정말 우연일까.
나는 결국 몸을 일으켰다. 휴대폰을 열었다. 학교 홈페이지에서 교사 소개란을 찾아봤다. 사진도 없고 정보도 간단했다. 그저 이름과 담당 과목만 적혀 있었다.
한서은. 생물. 그게 전부였다.
뭐라도 더 있을까 싶어 화면을 몇 번이나 위아래로 넘겨봤지만 나오는 건 없었다. 나는 화면을 끄려다 말고 다시 켰다. 이번엔 검색창에 그녀의 이름을 입력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흔한 이름이라 그런지, 관련 없는 다른 사람들의 정보만 나열됐다.
허탈한 기분으로 화면을 끄려는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인스타그램. 낯선 계정이 나를 팔로우했다는 알림이었다.
나는 그 알림을 잠시 바라봤다. 스팸 계정인가 싶어 넘기려던 참이었다.
계정 이름은 무의미한 영어와 숫자의 조합이었다. 프로필 사진은 비어 있었다. 하지만 게시물 하나가 있었다.
빨간 립스틱이 묻은 유리컵 사진이었다.
나는 그 계정을 눌러봤다. 순간 손끝이 저릿해졌다.
화면 속 유리컵에는 얼음이 반쯤 녹아 있었고, 그 테두리에 진하게 묻은 립스틱 자국이 조명을 받아 번들거리고 있었다. 색이 낯설지 않았다. 오늘 아침 교탁 앞에 서 있던 그녀의 입술 색과 똑같았다.
게시물 밑에는 캡션도, 위치 태그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사진 한 장.
나는 그 계정을 몇 번이고 다시 눌러봤다. 팔로워도 없고, 팔로잉도 없었다. 게시물은 딱 그거 하나였다. 마치 오늘, 이 순간, 나에게 보이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손이 떨렸다.
우연일 리 없다는 생각이 확신처럼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