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우리 안에 갇혀 있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내 몸을 미워하는 일에 실패해본 적이 없었다. 쇠창살 틈으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이 가슴 위에 걸쳐진 낡은 천을 비추는 걸 보고 나는 또 한 번 옷깃을 끌어당겼는데, 아무리 여며도 감춰지지 않는 크기라는 걸 알면서도 그 짓을 반복하는 게 우스웠다. '숨겨질 리가 없잖아, 이렇게 태어난 걸 어떡해.' 그런데도 손가락은 매번 옷깃 끝을 찾아 헤맸고, 그 헛수고를 반복하는 나 자신을 보고 있으면 차라리 이 손을 잘라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옆 칸에서 팔려나갈 순서를 기다리는 다른 노예들이 나를 힐끔거리다 얼른 시선을 돌리는 게 느껴졌고, 그 눈빛 속에 담긴 감정이 동정인지 혐오인지 구분이 안 될 만큼 익숙해서 나는 그저 무릎을 끌어안고 몸을 웅크리는 걸로 응답했다. 웅크리면 조금이라도 작아 보일까, 그런 헛된 기대를 품는 것도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렸다.
엘프 마을에서 태어난 것도, 은빛 머리카락과 뾰족한 귀를 가진 것도 자랑스러워야 했을 텐데, 나는 그 모든 축복 아래 감춰진 저주 하나 때문에 열 살 무렵부터 마을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본 적이 없었다. 엘프들은 대체로 몸이 가늘고 곱다는데, 나는 유독 가슴만 남들보다 배는 크게 자랐고 어깨선도 여자애답지 않게 넓적해서, 마을 우물가에 모인 여자애들 사이에 섞여 있으면 나만 다른 그림에서 잘라 붙인 것처럼 어색했다. 그때는 그저 몸이 좀 크다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진짜 문제는 나중에 드러났으니까.
남들과 다른 몸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나는 청림 사람들에게 '숲의 저주'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몰라서 오히려 이름이 예쁘다고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숲의 저주라니, 어쩐지 신비로운 별명 같잖아.' 그렇게 순진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우스운데, 자라면서 가슴이 남들보다 몇 배는 크게 부풀고 허벅지 사이에는 여자에게 있어서는 안 될 것이 함께 자리를 잡았다는 걸 알게 된 뒤로는 그 별명이 조롱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몸이 자라는 속도만큼 마을 사람들의 눈초리도 날카로워졌고, 나를 씻겨주고 감춰주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난 뒤로는 더 이상 나를 사람으로 봐주는 이가 없었다.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는 적어도 밤마다 내 몸을 천으로 꼭꼭 싸매주며 "네 몸은 네 잘못이 아니야" 하고 말해주었는데, 그 목소리가 사라진 뒤로는 그 말을 대신 해주는 사람도 함께 사라졌다.
습격이 있던 날 밤을 떠올리면 지금도 손끝이 저릿한데, 인간 군대가 마을에 불을 놓고 사람들을 끌고 가던 그 혼란 속에서 나는 저항할 힘도 없이 그저 끌려나왔던 걸 기억한다. 불타는 지붕에서 떨어지던 재가 머리카락 위로 내려앉던 감각, 누군가의 비명이 내 이름을 부르는 듯 들렸지만 돌아볼 새도 없이 목덜미를 붙잡혀 끌려가던 그 순간이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대로 재생된다. '차라리 그때 죽었으면 이런 고생은 없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정작 살아남은 걸 후회하지 않는 걸 보면 나도 참 모순적인 인간, 아니 엘프라는 생각이 든다. 노예 상인의 손에 넘겨진 뒤로 나는 몇 번이나 시장에 나왔다가 몇 번이나 되돌아왔는지 셀 수도 없었는데, 이유는 하나였다. 내 몸을 본 구매자들이 값을 흥정하다가 결국 질겁하며 물러났기 때문이다.
"이거 봐, 이 계집 아직도 안 팔렸어?" 상인 박덕수가 우리 밖에서 나를 향해 짜증스러운 손짓을 하며 내뱉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그 목소리만으로도 오늘 하루가 또 순탄치 않으리라는 걸 짐작했다. 그는 몸집이 작고 배만 볼록 나온 남자였는데, 그 배 위에 늘 매달아둔 주머니를 손끝으로 두드리는 습관이 있어서 나는 그가 돈을 셀 때마다 저 배가 곧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었다. 오늘도 그는 이른 아침부터 주머니를 두드리며 우리 안을 서성였는데, 그 소리가 마치 시계추처럼 규칙적이어서 나는 저 소리가 멈추는 순간이 곧 내가 팔려나가는 순간이겠거니 짐작하고 있었다. "내가 이 몸 하나 때문에 얼마나 손해를 봤는지 알아?" 손해라니, 이 사람은 지금 자기가 산 물건이 팔리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건지, 아니면 나라는 존재 자체가 억울하다고 화를 내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박덕수는 화가 날 때마다 우리 창살을 발로 걷어차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 발길질이 창살에 부딪치는 소리가 꽤 요란했지만 정작 창살은 흔들림도 없었다. 그러니까 저 남자는 화풀이도 제대로 못하는 셈인데, 그 우스운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잠시나마 내 처지를 잊을 수 있어서 나는 속으로 몰래 웃었다. '차라리 저 발이나 부러지지.' 물론 겉으로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는 척했다. 노예에게 표정이라는 사치가 허락될 리 없다는 걸 나는 이미 뼈저리게 배운 뒤였으니까.
다른 노예들은 대개 밭일이나 집안일에 팔려나갔지만 나는 사정이 달랐다. 몸을 본 구매자들 중 절반은 눈살을 찌푸리며 돌아섰고, 남은 절반은 오히려 흥미를 보이며 값을 깎으려 들었는데 그 흥미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난달에는 뚱뚱한 상인 하나가 내 옷깃을 잡아당겨 가슴을 확인하려 했고, 재작년 겨울에는 술 냄새를 풍기는 귀족의 하인이 나를 두고 "특별한 취향을 가진 주인님께 딱 맞겠다"며 히죽거렸다. 그때마다 박덕수는 옆에서 신이 나서 값을 올렸는데, 결국 하인은 값이 너무 뛰자 침을 뱉고 돌아갔고 박덕수는 그날 저녁 내내 나를 원망스레 노려보았다. '그럴 때마다 박덕수는 신이 나서 값을 올렸겠지.' 나는 그 계산속을 알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는데, 노예에게 발언권 같은 게 있을 리 없다는 걸 이미 온몸으로 배운 뒤였기 때문이다.
옆 칸의 나이 든 노예 하나가 나를 향해 조그맣게 속삭인 적이 있었다. "너, 그냥 죽은 척이라도 해봐. 그럼 값이 떨어져서 아무도 안 살지도 몰라." 그 말에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고개만 끄덕였는데, 실제로 그렇게 해봤자 박덕수가 내 뺨을 몇 번 후려쳐서 정신을 차리게 만들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미 몇 번 시도해봤던 방법이었으니까. 그럴 때마다 박덕수는 "네가 죽으면 내 손해가 얼만데" 하고 씩씩거렸는데,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내 목숨이 그의 장부 위 숫자 하나로 환산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해야 했다.
창살 틈으로 시장의 소음이 밀려들었다. 가축을 파는 소리와 사람을 파는 소리가 뒤섞여 구분이 안 되는 이 거리에서, 소를 파는 상인이 소값을 부르는 소리와 옆 칸 노예를 파는 상인이 나이와 건강 상태를 읊는 소리가 한데 뒤섞여 어느 쪽이 짐승이고 어느 쪽이 사람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나는 오늘도 누군가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하루를 보내겠거니 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아침 해가 슬슬 중천으로 오르면서 우리 안의 공기가 후끈해지기 시작했고, 나는 목덜미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오늘은 또 몇 번이나 옷을 걷어붙이고 몇 번이나 흥정이 오가다 깨지는 걸 지켜봐야 할까 하는 생각으로 지루함을 달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시장 저편에서 갑옷을 입은 남자 하나가 천천히 우리 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는데, 그 걸음걸이가 여느 구매자들과는 사뭇 다르게 무겁고 신중해서 나는 이유도 모르게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다른 구매자들은 대개 흥정을 준비하는 상인의 얼굴을 하고 다가왔지만, 저 남자는 무언가를 확인하러 온 사람처럼, 아니 무언가를 찾으러 온 사람처럼 시장의 다른 노예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곧장 우리 칸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갑옷에 부딪치는 태양빛이 눈부셔서 나는 잠시 눈을 찡그렸는데, 그 순간에도 박덕수는 벌써 눈치를 채고 배를 두드리던 손을 멈추더니 허리를 굽히며 알랑거리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또 흥정이 시작되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무릎에 얼굴을 묻으려 했다. 그때는 그 발걸음 하나가 내 남은 인생을 통째로 바꿔놓을 줄은, 정말로 몰랐다.